나는 심지어 (표현 자체가 변명처럼 들리는) ‘도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관해서도 쓰지 않는다. 내가 쓰는이야기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래할 리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 P7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 소설이 하는 일, 또는 적어도 내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희망과 공포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최신 경향을 토대로 추론하고 점차 흔해지는 패턴들을 상술하고 아직 덜 여문 혁신의 논리적 귀결을 제시함으로써, SF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면면을선명하게 드러내고 강조하는 고성능 필터로서 기능한다. 그것도 좋은 면과 나쁜 면, 양쪽 모두를, 이른바 ‘사실주의‘ 문학에서라면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모호해서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사변과 상상의세계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변한다.
- P8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천착한 중요한 주제 하나는 격렬한 변화 앞에서 인간으로 남고자 부단히 애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현대성은 전통을 전복하고 세상의 크기를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뒤엎었으며, 이로써 몇 세대가 흘러도 또렷이 파악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영향력으로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다. 
- P8

오늘날 개개인은 고대의 어떤 현자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소비와 여가, 직업, 결혼, 자기 정체성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린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더 자유롭다고, 더 현명하다고, 더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아니면역설적이게도 과거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답답하다고, 더 불안하다고, 그러면서도 덜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 P8

(Singularity, 특이점),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소재를 많이 다룬다. 그러나 핵심만 놓고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인간으로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선 이들은 상상도 못 했던 갖가지 선택과 직면한 시대에 한 개인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 만물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변하지말아야 할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전통과 정체성, 문화, 가족, 사랑(이 경우에는 다양한 형태를 모두 망라하여) 같은 것들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면 우리 발밑의 세상이 흔들리면서 그런 것들의 의미 자체도 변해 가는가?
- P9

내가 보기에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진화했다. 나는 법학 교육을 받고 변호사로일해 온 까닭에 사실과 숫자가 인간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껏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 P9

우리는 윤리 강령이나 두꺼운 규정집을 읽으며 도덕적인 의사나 선량한 변호사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자신이 흠모하는 이들을 모방하고, 이로써 그들의 삶을 우리스스로가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정표로 믿고 따르는 이야기로 변화시킨다.
- P10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사건들은 적잖은 경우에 우연과 돌발의 결과이다. 누구와 결혼하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어떤 책과 시에서 오래가는 즐거움을얻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삶을 무작위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로 엮어 이야기를 짓고, 그 이야기에 플롯을 부여하고, 스스로가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따라갈 성장 곡선을 창조한다.  - P10

우리는 저마다 각자가 만든 장대한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 P11

그러나 이야기는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을 이해하도록돕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시간의 강을 건너가는 동안 길잡이가되어 주기도 한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원래 출발한 곳이어디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목적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며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결국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셈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 P11

삶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우리는 결국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 이로써 우리는자기 운명의 저자가 된다.
- P11

이처럼 시간과 공간, 언어, 문화를 넘어 쓰는 이와읽는 이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인간다워진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짓는 종(種)이니까요.
- P12

기자들은 누구나 내 손부터 본다. 얼굴을 빤히 볼 엄두는 차마 나지 않아서 손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검버섯과 주름진 살갗, 관절염 때문에 부은 손목을,
- P15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차갑게 잘박거렸고, 이따금 조가비 부스러기가 발바닥을 콕콕 찔렀다. 그런데도 물가를 따라 줄곧 맨발로 걸은 까닭은 등 뒤로 이어진 내 발자국 모양에 넋이 나가서였다. 자국하나하나가 야트막한 굽이였다. 방금 막 파 놓은 무덤처럼.
- P17

등 뒤에 남은 발자국 모양 무덤들에 뭐가 묻혀 있는지를, 나는 그때 깨달았다.
- P18

채드를 만난 건 그때껏 나한테 일어난 최고의 행운이었는데, 어쩌면 나는 그 행운 속에 함정이 있을 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 같기도 하다 - P19

아니면 단순히 채드가 그 일에 말을 보태는 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서 채드는 이 고결한 일에, 오래된 동시에 새롭기도 한 이 일에 관여할 권리를 이미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임신중단이나 입양 같은 선택지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몸이고, 내 삶이고, 내 아기였으니까.
- P19

나는 기다렸다. 찌릿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모든것이 선명해지는 감각을,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따사로움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 P20

내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간호사는 우는 어린것을 안고 자리를 떴다.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달라질 듯도 싶었다.
아니면 그 어린것이 사라지거나.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소리 내어 울며,
요구했다. 간호사들이 한 시간마다 교대로 나를 찾아와 엄마가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며 클립보드에 끼운 문진표의 목록에 하나씩 확인 표시를 했다. 나는 번번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동안 비명을지르고 싶었다. 그것이 내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 너무나 아팠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기분은 안 들었다. 고결한 일이라는 느낌도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P21

내가 끼니를 굶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내 손이로 내리찍은 발등을 지켜보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처지였다.
기저귀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도 싫었다. 이유식 냄새도 역했다.
졸음은 늘 쏟아졌다. 나는 아기가 꼴도 보기 싫었다.
- P22

나는 울었다. 온 우주에 나 혼자였고 내 힘으로 되는 일이라곤 우는 것뿐이었다.
- P22

"나는 아기가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얼빠진 사람처럼, 유아차를, 바보처럼, 우리 조그만 찰리를,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난 저 덫에 걸렸는데.

- P23

"아기가 누구의 소유물인 건 아니잖아."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내 곁에 앉더니, 꼭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순 없으니까. 나는 제임스라고 해."
남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이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너를 옭아맬 덫 같은 건 없어. 너한테는 이 길밖에 없다고 제풀에 믿어 버리지 않는 한은 - P23

"잘 있어." 나는 찰리에게 말했다. "넌 내 소유물이 아니야. 나도네 소유물이 아니고."
- P24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렇게 첫 번째 삶을 등지고 떠나면서 나는비로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 P24

내 사랑.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순 없어. 
너랑 나는 영원히 자유야.
- P25

그래도 마음은 아팠다.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남자였지만,
제임스는 내게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꼭 잔디 마당이 딸린집에서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는 것을, 의무와 덫과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날로 삶을 채우지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런 교훈을 남자들은 본능처럼 알지만 여자들은 배워야만 아는 듯싶었다.
- P25

제임스에게서 자유가 무엇인지 그토록 많이 배웠는데도, 나는 아침이면 그의 널따란 어깨가 뺨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고, 밤이면 그의 손이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다. 결국 나는 그의 것이라고,
또 그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간에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말 같은 것은 중요하지않았다.

- P25

자유는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25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에마가 말을 거의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말은 생각의 그림자, 그 자체가 믿기 힘들고잡기 힘들고 비현실적이었다. 육신은 플라스티네이션을 통해 보존되어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아세톤과 폴리머가 혈액과 수분의 자리를 차지할 때, 생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 P29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라."
언젠가 에마가 내게 한 말이었다. 에마는 유물론자였다. 그래서자기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것만을 믿었다.
- P29

남의 양손을 해부하고 방부 처리까지 해서 자기 집 거실에 여봐란듯이 놔두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할까? 그것 또한 덧없는 삶과 경이로운 인간의 육신을 관조하는 한가지 방식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 ‘메멘토 모리(mementomori‘는 라틴어로 ‘그대가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라‘라는 뜻으로서 삶이 유한하다.
는 사실을 일깨우는 경구이다. ― 옮긴이)‘를 중얼거리며 바라보았던 해골처럼, 저 손도 보는 이에게 필멸을 상기시키는 상징일까?

- P31

에마는 알 게 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질문이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이야. 답이랍시고 돌아오는 것도거짓말이거나,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이고." - P31

나는 에마에게 작품의 손가락을 세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털이놓았다. 손가락 주위의 신경에 수술칼을 댈 때면 여지없이 내 손가락에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일손을 놓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당신의 거울 신경 세포가 간섭해서 그래." 내 이야기를 들은 에마는 그렇게 말했다. "극복할 거야. 극복해야 돼. 내 경우엔 항상 얼굴이 제일 세공하기 힘들었는데, 결국엔 얼굴 보기를 그만뒀어. 윤곽하고 음영, 색조만 보게 된 거지. 우리는 남들이 점토를 깎아내는방식으로 살을 깎아내니까."
- P32

"육신은 반드시 사라지는 법이지." 떠나려고 돌아선 에마가 입을열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으니까.  - P32

조그마한 찰리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제임스와 함께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동트기 전의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을찰리가 찰리의 꼭 움켜쥔 자그마한 두 주먹이.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늘 그랬듯이. 또한 덫에 걸린 신세였다. 늘그랬듯이,
- P34

"그런 일을 날마다 하는데 몸이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제 아버지는 생전에 하던 일을 예술이라고 포장했을지 몰라도, 죽음을 삶처럼 꾸미다 보면 결국에는 스스로도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요 - P35

"슬픔은 힘이 세죠.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 놓기도 할 만큼요."
존이 말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릎위에 차분하게 포갠 두 손이 꼭 생각에 잠긴 불가사리 한 쌍 같았다. 마치 …… 서로의 감정에 이입한 것처럼.
- P36

"우리 아버지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너무 철저하게 격리되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보디워크스를 세웠어요. 사람들로 하여금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죽은 육신을 동력이 끊긴 기계처럼 보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었던거예요. 아버지는 죽음을 우스꽝스럽고 절대적이지만 두렵지 않은것으로 바꾸려 했어요."
- P36

"하지만 죽음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삶이 멈춰 버리기도 해요. 그건 플라스티네이션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가끔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 P37

내 눈앞에서 내 손이 저절로 날아오르더니, 허공에 있는 존의 손과 만났다. 두 손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춤추는 한 쌍처럼. 기도하는두 손처럼. - P37

"난 당신이 좋아. 하지만 난 고등학교도 안 나왔어. 할 줄 아는 거라곤 근육에서 근막을 벗겨내고 사람의 양손을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재주뿐이야. 당신이랑 나는 사는 세상이 달라. 절대로 행복해질수 없어."
- P37

나는 상상했다. 20년 전에 조그마한 라텍스 주머니 하나가 제 할일을 다했더라면, 나의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나도 연거푸 후회하지 않고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 P37

"우리 아버지의 관심사는 부패를 멈추는 거였어요. 영혼이 떠나버린 육체를 정지 상태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나는그보다 훨씬 더 멋진 걸 하고 싶어요. 노화와 죽음을 정복하는 거예요 - P38

"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엄마가 되는 법을 모르는 사람."
- P38

"이미 작동을 멈춘 틀을 신기한 것처럼 구경하느니, 차라리 그 틀의 작동 기한을 최대한 연장하는 게 낫지 않아요?"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어. 그래서 삶이 의미 있는 거잖아."
"그건 선택의 어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하는 거짓말이에요. 시인들이 영생을 구하려 애쓰는 이를 폄하한 건 아무 힘도 없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였고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무력하지 않아요."
- P39

"단지 수백 년을 살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 기간 동안 내내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우리 몸속의 생체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는지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존이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어찌나 철석같이 믿었던지 나는 차마 부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P39

"결과가 잘 나왔어요." 존이 말했다. 당신의 신체 나이는 이제 서른 살이에요. 정기적으로 관리만 해 주면 지금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멋진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빙긋 웃었다. 아이를 가질지말지 결정하는 일을 훨씬 더 나중으로 미룰 수 있었으니까.  - P41

나는 그때껏 얼어붙은 껍데기 속에 삶을 멈춰 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하고 싶었다. 누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해 보고 싶은 것들도 너무나 많았다. 내가 만든 ‘죽기 전에 꼭 해볼 일‘ 목록은 갈수록 길어졌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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