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며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나는 언제나 유쾌한 농담을 날릴 줄 아는 센스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또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도서실은 단지 내가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적당한 침묵과 열기가 뒤섞인 근사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너는 지적이고 유머 있고 감동적인 존재야"라는 표현은 정말이지 볼품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온 나를 스스로 재인식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보통은 가출을 하면 집에서 식구들이 찾아오고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는 게 상식이었다. 가장 친하다고 믿고 연락했던 친구가 스파이가 되어 집에 전화를 하고 갑자기 부모들이 들이닥쳐 머리채를 잡고, 그런 맛에 울며불며 끌려가 반성문도 쓰고 결국은 외출 금지를 당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 걸 기대하면서 가출도 하는 것인데 나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만큼 힘든 일은 세상에 없었다. 빨리 지나가! 김 작가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중얼거렸다. 얼마나 싫었으면 내 눈앞으로 지나가는 것조차도 참기 힘들었을까.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쓰고 보니 할 얘기도 없었고 별로 재미가 없었다. 경험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었다.

글을 쓰고 싶은 순간엔 그 특유의 모드가 있는 것 같다. 그 모드에 접속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모드가 바뀌는 순간도 있다.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처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느꼈던 순간. 안채 할머니의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입안을 데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모성이라는 것이 자연법칙이 아니라는 것,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는 순간 저절로 여성의 신체 안에 부여되는 선천적 기질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인이 되어 만난 내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모성이 없는 애들이 꽤 여러 명 있었다. 모성은 없지만 그들도 결혼은 해야 했고 아이는 낳아야 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의 한 구절을 곧잘 인용했다.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어머니는 어머니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모성은 여성 억압의 가장 나쁜 이데올로기였다. 그녀들은 엄마 역할과 자아실현 사이에서 충돌하다가 가끔씩 흔들렸다. 그나마 이혼하지 않고 아이들이 좀 클 때까지 곧잘 버티던 친구들도 아주 우스운 일로 한순간 나쁜 엄마로 전락했다

‘모든 문장을 다 쓸 수 있다.’

사실 그 순간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굉장히 놀랐다. 무슨 대필 광고문구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손이 떨렸다. 모든 문장을 다 쓸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이 다른 장르와 비교했을 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제일 비슷하기 때문이야. 설명하려 들지 말고 보여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라구.

‘설명을 하려 들지 말고 묘사를 하라.’ J작가가 나에게 한 문학수업 제1강의 내용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어떤 깨달음이 저절로 찾아와주기를 기다렸던 적은 없었다.

간절히 원하면 얻을 수 있다는 말을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걸까. 아니면 내 몸이 나보다 먼저 그 답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머리로 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몸이 먼저 길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람이 성격이 어두우면 가까이 하고 싶지가 않지. 밖에 나가서 길거리 식당들을 봐요. 손님들이 어떤 집으로 제일 많이 들어갈까? 밝고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들어가기 마련이야. 사람도 동물이야. 동물은 볕이 잘 드는 쪽으로 몸이 움직이기 마련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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