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 서서 별을 올려다보는 밤이면 언제나, 우리는 별빛과 시간에 함께 물듭니다.
- P473

예를 들어 천칭자리의 글리제 581 이라는 별을 올려다볼 때, 우리는 사실 20년 전의 그 별을 보고 있는 겁니다. 지구에서 20광년 떨어진 별이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글리제 581 근처에 누군가, 지금이곳을 볼 수 있을 만큼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에번과 함께 하버드 대학교 교정을 걷는 제 모습을 볼 수있을 겁니다. 저희가 아직 대학원생이던 시절의 모습을요.
- P473

하지만 과거는 눈에 보이는 순간 소모되고 맙니다. 광양자는 렌즈로 들어온 다음 그곳에서 이미지 처리 장치의 표면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우리 눈의 망막이나 필름, 아니면 디지털 센서일 수도 있지요. 그러면 광양자는 원래의 이동 경로에서 완전히 멈춰 버립니다. 보고 있다가 한순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놓쳐 버리면 다시는붙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순간은 우주에서 지워집니다. 영원히.
- P475

어쩌면 중국인들은 과거의 이 한 부분을 뒤에 남겨두고 전진하는것으로 만족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중국인들이 그 길을 택한다면, 세계인들 역시 그들과 함께 전진하려 할 것입니다.
- P479

과거로 향하는 문은 열 수 있었지만, 그 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해일같은 정보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 P481

인간 두뇌의 병렬 처리 능력은 관측기에서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를 분류하고 이해하는 작업에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됐거든요. 두뇌는 가공되지 않은 전기 신호를 받으면 99.999퍼센트는 그냥 버리고 나머지를 시각 및 청각, 후각 정보로 바꾸어 모두이해한 다음, 기억으로 기록하지요.
그건 놀라운 일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 두뇌가 삶의 매 순간 하는일이 결국엔 그거니까요. 우리는 눈과 귀와 피부와 혀를 통해 어떠한 슈퍼컴퓨터보다 더 많은 양의 미가공 신호를 접하지만, 우리 뇌는 그 모든 잡음 속에서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식을 유지해 내니까요. - P482

그때 ‘환시‘라는 말을 썼던 걸 지금은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서툴게 선택한 단어 하나에 결국에는 너무나 큰 무게가 실리고 말았으니까요. 역사란 건 그런 겁니다. 정말로 중요한 결정이당시에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거지요.
예, 두뇌는 신호를 받아들여서 그 신호로 이야기를 빚어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환시가 아닙니다. 과거이든, 현재이든 간에요.
- P483

사용하는 편리한 도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선포하면 과거는 순식간에 망각됩니다. ‘혁명‘이 일어나면 기억과 피로 얼룩진원한은 어느 날 갑자기 깨끗이 지워져 버립니다. 조약에 서명하면과거는 한순간에 땅속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요. 현실의 삶은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말입니다.
- P487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보기로 했던 겁니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건 그렇게 사소한,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나중에는 턱없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런 우연은자연계보다 인간 사회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지요. 그래서 물리학자인 저로서는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 P496

31부대의 활동에 점점 집착하게 된 거지요. 그건 에번에게 깨어 있는 시간의 삶이자 잠든 시간의 악몽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역사를 몰랐다는 사실이 에번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자, 전쟁을알리는 나팔 소리였습니다. 에번은 희생자들의 고통이 망각되게 놔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들을 고문한 범죄자들이 빠져나가게 놔둘 수가 없었던 거고요.
- P497

고고학의 핵심 모순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가 유적을 연구할 목적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유적을 소모하고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분야의 학자들은 어떤 유적을지금 발굴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덜 파괴적인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지금 이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을지 언제나 고민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굴하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요?
- P503

"자백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지. 예전 같은 부대에 있던 친구는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난 자백을 안 해서 벌써 몇 년 전에 석방됐어. 지금은 번듯한 데서 일해. 내 아들도 의사가 될 거야, 전쟁 중에 일어났던 일 같은 건 입 밖에 내지도 마."
- P517

저희는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 P523

학살 현장에서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은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 P528

웨이 박사가 품은 신념의 핵심은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개개인은 희생자의 고통을 공감하지도, 기억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라는 함정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우리 개개인이 과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있는, 개인화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웨이 박사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 P531

우리는 죽은 이들을 착취할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범죄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수 없습니다.
- P537

웨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록된 역사는 모두 한 가지 목표를공유한다. 바로 일련의 역사적 사실에 일관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실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에 빠져있었다. 이제 우리는 시간 여행을 통해 마치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손쉽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P549

하지만 가장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가 아니면, 도대체 언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평온한시절에는 교양인의 탈을 쓰고 점잖은 척하기가 쉬운 일이지만, 사람의 진정한 본성은 암울한 시절에 막중한 압박감에 시달릴 때에만드러나는 법입니다. 다이아몬드인지 아니면 시커먼 석탄 덩어리인지는 그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겁니다.
- P556

어떤 사람에게 괴물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괴물이라는 말은 애정과 두려움이라는 굴레를 끊어 버리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 P556

진실은 연약하지 않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둡니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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