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성명을 발표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상황에서 소리 높여 말하다니 버스를 탄 애들 몇 명이 뭘 바꿀 수 있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거나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이 있을지는잘 모르겠어. 하지만 상관없어. 나한테는 내 아들이 입을 다물지 않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비밀은 그 애 덕분에 조금이나마 지키기 힘들어졌으니까. 그건 의미 있는 일이야 - P417
나는 베티의 말을 되씹어 본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입을 열고 의견을 밝히는 것은 미국인 특유의 집착이다. 미국인은남들이 묻어 두려 하는 것,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하는 것에 관심을집중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 P418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식구들의 삶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내 감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간의 경험 때문에 내가 얼마나 냉정해지고 무뎌졌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 중에는 결코 입 밖에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거북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몸을 둘러싼 껍데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거북이가 된 느낌이. - P423
나는 정을 조금 작은 것으로 바꿔 들고 조각을 시작한다. 도안은단순하다. 서로 이어진 타원 세 개. 사슬이다. 그 사슬은 대륙 두 개와 대도시 세 곳을 하나로 묶는 고리이자, 목소리를 영원히 묵살당한 채 이름마저 잊히고 만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족쇄이다. 그 사슬 속에는 아름다움과 경이가, 공포와 죽음이 있다. 한 번 또 한 번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허물어지는 기분이 든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가. 마비 상태가. 침묵이. 비밀을 지키기가 조금이나마 힘들어지게 하는 것. 그건 의미 있는 일이야. - P429
하지만 베티가 내 머릿속에 심어 놓은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않는다. 조용한 어둠 속에 서 있는 소년, 그 소년이 말을 한다. 소년의 말은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오른다. 그 말이 터지면서 세상은 조금 더 환해지고, 숨 막히던 침묵도 조금 느슨해진다. - P418
그 여자한테 딱히 미안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했으니까. - P419
나는 예비 인원으로 뒤쪽에 대기시켜 둔 포로들에게 보조 터널입구에, 즉 앞서 들여보낸 인원들의 등 뒤에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하라고 지시했다. 속으로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골수 공산당 테러분자들이라고, 십중팔구 이미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일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포로들은 머뭇거렸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었고,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몇 포로는 미적미적 움직였다. 다른 포로들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P426
"제발, 제발 꺼내 주세요. 전 그냥 돈 몇 푼 훔쳤을 뿐이에요. 죽을죄를 진 게 아니에요.." 남자는 내게 민난어로 얘기했다. 내 모어로,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 사람은 포모사에서 끌려온 잡범이었단 말인가? 만주에서 생포된 중국인 공비가 아니라? - P427
나는 무너진 터널 이쪽에 있는 죄수들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틈새를 다 막고 나서 뒤로 물러나 다이너마이트를 더 설치한 다음, 한번 더 폭파하여 돌더미로 확실히 밀봉했다. 작업이 다 끝났을 때, 분대장은 부하들에게 남아 있는 죄수를 모조리 사살하라고 지시했고, 우리는 또다시 폭발을 일으켜 돌무더기속에 그들의 시체를 은폐했다. 포로들의 집단 봉기 발생. 공사 방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모두 자살함.. 분대장의 사고 경위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고, 나도 보고서에 서명을 했다. 그런 보고서를 그런 식으로 쓴다는 것은 누구나아는 사실이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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