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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박주초 지음 / 작가와비평 / 2026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새해의 계절은 늘상 겨울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추운 날씨에 어깨와 계획들이 움츠러든다.
새해에는 시집을 좀 읽어보고 싶다는 계획이 이 책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시집의 제목이 '책임'이라니, 지키지 못한 신년 계획들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나는 무엇에 대해 책임지고 있는가, 혹은 무엇을 책임이라는 말로 미뤄두고 살아왔는가.
이 시집에서 말하는 책임은 거창한 윤리나 의무라기보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들에 깃든 감정에 가깝다. 말하지 못한 마음, 지나쳐버린 관계,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 이후에 남는 미묘한 흔들림 같은 것들. 박주초의 시는 그런 장면들을 정면으로 붙잡기보다, 살짝 비껴서 오래 바라본다. 그래서 읽는 이는 시 속 화자보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시집이 책임을 ‘짐’이 아니라 ‘감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 해서가 아니라, 느껴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책임. 사랑했기 때문에, 알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안게 되는 감정의 무게가 시 곳곳에 배어 있다. 그 무게는 무겁게 짓누르기보다, 조용히 곁에 남아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든다.
문장은 대체로 절제되어 있고, 여백이 많다. 그 여백 덕분에 시는 완결되지 않은 질문처럼 남고,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그 질문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일까.
다른 시들은 쓰면 안 될 것 같아 책소개글에 공개된 시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여운이 / 머문 시간보다 오래 남는 건 / 아직 깨달을 여지가 / 내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시는 답을 주기보다 여지를 남기고, 그 여지는 읽는이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책임이란 결국 완결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깨달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어제와 다름을 즐기고 / 어제와 같음도 기뻐하는” 태도는 변화와 지속을 동시에 껴안는 법을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말하는 흔들림은 미성숙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방식이다.
이 시집에서 책임은 단단히 고정된 자세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감각에 가깝다.
“일탈이 없으면 일상도 없다 / 이탈이 없으면 이상도 없다”라는 문장은, 책임이 순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시인은 일상과 이상, 현실과 탈주의 관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벗어남이 있어야 돌아올 자리가 생기고, 흔들림이 있어야 지켜야 할 중심이 드러난다.
“여백을 공백으로 살지 말라.”
마지막으로 이 한 줄은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돈다. 이 시집의 여백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자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 시는 그 여백을 허투루 넘기지 말라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책임』은 우리에게 더 잘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흔들림과 멈춤, 여운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