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새긴 이, 김상유 - 100년의 시간, 작품 회고집
김상유.김삼봉 지음 / 아이리치코리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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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유는 1962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평양에서 졸업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상유는 종군화가로 입대했다. 제대 후 1954년 다시 동산중학교로 돌아갔다. 화가의 작품집을 읽고 일대기를 적으며 서평을 시작하는 것은 그의 작품은 그의 생이 유소년기의 일제강점기, 청년기의 해방과 6·25동란기, 중장년기의 한국 도약기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것과 시대적인 관점을 작품에 남기는 것 아닐까.



1958년 ‘한국판화가협회’가 탄생하고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 판화과목이 생기며 한국에 판화가 자리잡았다. 이때부터 김상유는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판화가로 한국에서 미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전·후다. 김상유는 비슷한 시기에 앵포르멜 미술에 근접하며 인정받기 시작한다. (엥포르멜 양식은 프랑스 중심의 서정적 추상회화 경향을 띈다.)


김상유는 일반 사람들의 미술 통념을 깨기 위해 동판화에 접근했다. 동판화는 다른 판화에 비해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고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그가 동판화를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익혔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1963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동판화 부문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김상유는 새로운 기법으로 판화를 선보였다. 물은 확산하는 성질이, 아교는 응집하는 성질이 있다. 그는 화선지에 엷은 연두색을 색칠하고 아교를 떨어뜨려 추상적인 번짐을 유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또 그는 동판에 강한 산을 부어 부식이 일어나는 것을 이용해 자연스러운 추상 효과를 만들었다. 녹슨 판은 오묘하고 절묘한 효과를 만들었다.



김상유가 현대미술 판화부분에서 이름난 작가로 활약한 이유는 남다른 지적 능력과 판단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문명사회 모순에 괴리를 느껴 이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정신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김상유는 점차 동판화를 지양하고 목판화로 작업했다. 그는 소재 역시 엥포르멜에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낸 토속적인 내용으로 변화시킨다. 동양스러운, 한국스러운 작품을 목판화로 표현했다. 이 영향으로 한국은 목판화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김상유는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그는 목판화 작업을 유화로 확대했다. 그는 유화 재료를 유화답지 않은 장르에 접목해 유형을 파괴하는 등 초월적 작업에 몰입했다. 당시 전국의 고건축을 순례하며 한옥과 법당의 아름다움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한국적인 정서와 무위자연의 세계, 고요와 청렴이 공존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이로써 아연판을 이용한 동판화의 세밀한 표현에서부터 목판화를 통한 고요하고 간결한 풍경까지 다양한 양상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 작업을 통해 예술 역량을 확장시킨다. 동판화에서 목판화, 사진과 유화, 어쩌면 판화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집은 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만든다. 그만의 특별한 사유가 곳곳에 담겨있어 그것을 읽는 재미도 있었고, 특히 오일페인팅으로 그려졌던 70년대 판화에서 등장한 인물은 귀엽기까지하고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없었기에 특별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결국 친근해져 버리기까지 했다. 눈을 감고 편안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김상유 작품은 기교 없는 기교의 맛이 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새로움에 도전하지만 절제된 미학이 담겨있다. 작품의 면모는 역동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음에도, 그 감흥과 울림은 깊고 길다.



김상유 작가의 예술적 삶은 ‘시대가 안았던 불안한 현실과 층위가 다른 자연과 고요, 평온을 향하여 구도했던 삶’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가 평생 동판과 목판 그리고 유화의 화폭에 새기고 그린 작품들은 현대 문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저항, 달관과 해탈이 각인된 예술적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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