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는 하소연
김민준 지음 / 자화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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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식물을 무생물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길을 가다가 예쁜 벚꽃을 꺾거나 보도블럭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무심히 밟는다거나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식물이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식물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은 그냥 무생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살아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식물도 사실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느낀다면 어떨까? 김민준의 쓸모 없는 하소연은 바로 그런 식물과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오의 창가 앞에서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는 그녀와 나, 둘의 마음이 스치듯 마주 닿으면 우리는 그 순간에 보란 듯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어린 식물과 한 명의 인간은 시간 앞에 한낱 티끌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시들어 가고 말 것이다. 그렇다 할 지라도 분명 믿음은 단촐하게, 마음은 투명하게, 표현은 진솔하게, 한 시대를 전부 풍미할 순 없을 지라도 결단코 지금 이 순간을 홀연히 흘려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뤽 베송 감독이 제작한 영화 <레옹> 레옹이 들고 있는 식물로 익숙한 식물 아글라오네마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하소연이라는 여자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아글라오네마는 비록 하소연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 줄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한다. 하소연이 아글라오네마에게 털어놓는 그녀의 일상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 ()사랑, 자존감, 외로움, 상실, 추억 등의 소재는 약간 세부적인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거의 비슷하게 경험하는 일상의 이야기이자 고민거리이다. 그런 일상을 하소연하는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글라오네마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어린 아글라오네마는 하소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항상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물론 그것이 사람의 말의 형태로 전해지지는 못하지만 아글라오네마는 하소연의 고민을 같이 고민해준다. 하소연의 고민은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고민들이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 짝사랑과 연애, 상실과 같은 관계맺기에서 나온 고민들은 우리 주위에서 늘 맴돌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식물을 통해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여주는 것은 문학에서 종종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라는 방식이다. 사건을 그대로 제시하지 않고 플롯을 활용해서 비틀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틀에만 박혀서 문제를 보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 영혼의 채도에 비례할 뿐 현실의 무게 속에 퇴색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색깔을 지닌다는 것은 빛의 산란(散亂)이 곧이곧대로 선사하는 결과물은 아니다. 왜 노을은 붉고 정오의 하늘은 푸르며 장미꽃이 새빨간 것일까. 그것은 그 속에 고스란히 품고 있던 내면의 파장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나만의 색을 가진다는 것은 자연의 빛이 나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식물의 관점에서 하소연의 고민거리들은 때로는 단순하게, 때로는 너무 쉽게 보인다. 아글라오네마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가 보아도 그렇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가 아글라오네마의 눈으로 보자 명확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 식물의 관점에서 그렇게 위로를 받는다. 지금 내게 너무나 큰 고민이고 힘들게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위로.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고민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글라오네마는 당신의 고민이 하찮다고 하지 않는다. 별 것 아닌 문제에 소중한 자신을 메마르게 두지 말라고 토닥여주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꽃이 활짝 피어야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겠지 그런데, 애정을 쏟고 있다면 말이야. 그게 전부는 아닌 거야. 들판에 이름 없는 잡초에게도 아름다움이 있어. 다 떨어지고 지르밟힌 꽃잎에게도 향기가 있는 법이니까. 구태여 남들의 시선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아도 돼. 우리 비록, 지금은 활짝 핀 꽃이 아니더라도 고개 숙이지 말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곧 우리의 태도인거야.”

 

이 이야기 속에서 아글라오네마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바로 아글라오네마만의 고민이다. 그의 고민은 온실에 살 때에 본 다른 식물들은 봄이 되자 꽃을 피우는데 자신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글라오네마의 고민에서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서 볼 수 있다. 모두가 인생의 절정을 찍은 것 같을 때, 나는 아직 절정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이 절정은 취업에 성공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결혼에 골인한 연인의 모습,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글라오네마는 계속 자신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한다. 하소연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억지로 꽃을 피워보려고도 하지만 그 노력은 그를 시들게만 한다. 이야기가 끝나갈 쯤, 아글라오네마의 고민을 듣기라도 한 듯이 하소연이 그를 토닥여준다. 누구나 꽃이 피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사회적인 시선을 기준으로 자신을 스스로 깎아내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자고, 또 그렇게 남을 보자고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문장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무언가를 꼭 이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면서 우리 스스로를 존재 자체로 소중히 여기고 남도 또 그렇게 대해주자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렇게 모두가 자기 자신을, 또 남을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둥글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읽었던 같은 작가의 에세이집인상실의 끝 고독의 완결에서도 느꼈지만 작가의 섬세한 생각이 글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정말 이 일상 속에서 만난 문제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한 것들을 글로 옮겨 쓰면서 의미가 변질되지 않게 한 단어 한 단어 조심스럽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아글라오네마와 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진한 마음의 위안을 얻어갈 수 있다.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얼어붙었던 땅에 내리는 봄비처럼 마음을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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