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기
안채윤 지음 / 자화상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인 소년기는 기간을 의미하는 소년기가 아닌 소년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소년기라는 제목을 가졌다. 한자를 같이 적긴 했지만 '소년기'라는 표현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소년기를 겪는 중인 소년의 기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년기, 즉 사춘기하면 중학생이 주인공인가 싶겠지만 책의 주인공은 18살 청소년이다. 벽촌이라는 시골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주인공 준경. 모범생인 자신의 쌍둥이 형 준희와 다르게 삶 앞에서 무기력한, 죽고 싶기만 한 준경이 어떻게 19살로 성장해 가는지를 기록했다.

안채윤 작가가 자신의 괴로웠던 소년기 시절을 떠올리며 만들어졌다는 소년기는 그래서 소년(소녀)들이 그 시간 속에서 느꼈던 생각과 감성을 잘 담아냈다. 아무래도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역시 풋풋한 모습이 그려지지만 이 소설은 그냥 그런 귀여운 청소년 성장소설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심각했던 그 시절 우리들에게, 또는 그 시절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격려이자 앞으로 나아가며 또다시 시련을 겪을 모두 함께 힘내자는 작가의 생각이 담겼다.

그렇기에 우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만큼 정직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걸 축복이자 신의 선물이라 여기는 것에 대해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생명을 가진 무언가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길 뿐이었다. 결국 다 부질없어질 것들을 위해 숨쉬는 내내 '열심히''최선'을 강요 받아야 하는 현실이라니.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소년기는 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담았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걸쳐있는 소년은 죽고 싶어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살하려는 청소년에게 기대하는 원인인 성적 비관, 교우 관계 문제 등이 원인이 아니다. 준경은 다만 죽고 싶어져서 죽고 싶어할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준경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죽고 싶어한다. 왜 살아야하는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무상함을 느끼는 준경의 모습은 확실히 더 이상 준경이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반면에 앞으로 이어질 생을 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더 멋지게' 느껴진다는 준경의 모습은 그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준경의 모습에서 나는 이 소설에 담긴 성장의 한 요소가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죽는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내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통과해야하는 통과의례나 다름 없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자신이 꼭 존재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우리가 꼭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자신의 세계관이 깨지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자신이 생각보다 작은 존재라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럼에도 내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나만의 가치를 받아들이면 그는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

 

아무렴 어떤가?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다른 건 뭐 어떻든 그저 좋았다. 눈만 마주쳐도, 손끝만 스쳐도, 우리 사이엔 별빛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으니까. 훈이가 그동안 입버릇처럼 말했던 '살아 있으니까 이런 것도 해보는 거야'라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매순간 꽃이 피어나는 날들이.”

 

준경은 한번 자신의 삶을 포기했지만 그의 쌍둥이 형인 준희 덕분에 살아난다. 그리고 반강제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준희와 그의 친구 훈이와 어울리며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계도 맺어보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점차 준경은 삶에 대한 의지를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삶의 의지를 찾은 것은,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쌍둥이 형인 준희의 죽음이다.

자신을 구해줬던 쌍둥이 형을 자신은 구하기는커녕 죽을 시간을 마련해줬다는 것, 그토록 죽고 싶었던 자신도 무서워서 할 수 없었던 스스로 목을 매는 행위를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보였던 자신의 형이 성공했다는 것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 준희에 죽음에서 준경은 처음으로 삶과 죽음을 제대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관심을 바랐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똑바로 보게 된 준경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렇게 준경은 성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인다.

우릴 집으로 데려다줄 버스.

우릴 열아홉 인생으로 데려다줄 버스.

그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관찰 일기의 첫 문장을 써본다.

나는 곧잘 죽고 싶어졌었다.“

 

'나는 곧잘 죽고 싶어졌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 '나는 곧잘 죽고 싶어졌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맺음이 나는 것에서 우리는 준경이 한발짝 내딛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준경의 사계절과 하나의 계절이 더 담긴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책을 펼치면서부터 준경의 관점을 쭉 따라가게 되서 책이 끝날 쯤에는 같이 성장해 있는 느낌. 그리고 비록 소설 속 인물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이 성장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이 주는 쾌감이 있다. 아마 준경과 같은 성장통을 앓아보았다면 아마 더욱 더 그런 감정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 속에 현재와 소년기 속 우리를 위한 충분한 격려와 위로가 담겨있으니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렇기에 우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만큼 정직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걸 축복이자 신의 선물이라 여기는 것에 대해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생명을 가진 무언가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길 뿐이었다. 결국 다 부질없어질 것들을 위해 숨쉬는 내내 ‘열심히‘와 ‘최선‘을 강요 받아야 하는 현실이라니.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다른 건 뭐 어떻든 그저 좋았다. 눈만 마주쳐도, 손끝만 스쳐도, 우리 사이엔 별빛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으니까. 훈이가 그동안 입버릇처럼 말했던 ‘살아 있으니까 이런 것도 해보는 거야‘라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매순간 꽃이 피어나는 날들이.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인다.
우릴 집으로 데려다줄 버스.
우릴 열아홉 인생으로 데려다줄 버스.
그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관찰 일기의 첫 문장을 써본다.
나는 곧잘 죽고 싶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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