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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평점 :
소개글) 실패는 작가의 은밀한 희열이다.
실패의 연습만이 가능성의 장을 넓혀 준다. 그렇다, 베케트의 말마따나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작은 성공을 논할 수 없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의 고백을 우려내는 것에 가깝기 떄문이다. …(중략)… 저자는 이 개인적 에세이에서 카프카, 페소아, 콕토를 소환하면서 … 우리의 한계와 상처를 다시 생각하고 그것들의 효용을 고려할 기회를 다시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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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낭패감이란 손톱 밑에 이쑤시개가 파고든 느낌처럼 아주 쓰라린 것 중 하나다. 진전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굴복했다. 요컨대 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의 정신은 앞으로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p.34 언어들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균열이 있다. 번역은 그 균열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번역은 다른 것을 제안한다. … 번역은 자신의 실패를 근사치의 작업으로 만든다.
글을 쓸 때, 특히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직전까지 담아뒀던 어떤 양자 세상의 수치(숫자) 안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렬히 실패했다. 내가 살았던 양자 세상의 물성을 사람의 세계로 이끄는 데 실패했다.
생각해 보면 실패의 원인은 명확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저 겪었던 소재를 가느다란 실에 엮은 것처럼 나열해 버렸다.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섞이지도, 온전하게 하나가 되지도 못한 단어의 나열과 같았다. 소재에 벅차서, 이야기의 기틀을 생각하지 못한 채 단어만 내뱉었다. 꼭 초기 AI가 문맥을 인지하지 못하고 문장을 번역한 것처럼, 내러티브가 뭉개진 파편적인 문장은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실패해 버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자화되지 않은 나의 세계를 문자로 번역하는 일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로서 양쪽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각별한 실패’의 실패 사례들은 좀 더 나은 실패를 하게끔 이끄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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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9 프란츠 카프카가 실패의 귀재, 그르치기의 흑태자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품을 계속 써 나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늘 위태롭고 불가능하며 금지된 일처럼 보인다. 물론 그에게는 핑계가 있다. 가족, 직장, 약혼녀, 전쟁 등등. 카프카는 편지와 일기에서 사방팔방으로 이 핑계들을 들먹인다. … (중략)…중요한 것은 외부 세계가 완성을 방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의 모두가 타인과의 소통과 밥벌이라는 제약, 다시 말해 어찌할 수 없는 일상과 타협해야 한다.
p.89 사회적 맥락을 번명삼아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오래 먹히지 않는다. 작가란 당연히 글쓰기에 전념하는 사람이지만 하루 평균 두 시간 이상을 집필에 매달리기는 힘들다. 물론 그 나머지 시간에도 글쓰기에 사유의 힘을 바치지만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갖춰진 시간과 장소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몰아치는 현실의 벼랑 끝에서 써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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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사람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데도 인간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자꾸 마주하는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모아서 또 다른 공감과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