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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4월
평점 :
안후이에 닥친 기근은 왕룽이 가족과 대지를 떠나 남쪽 도시로 이주하게 한다. 노인인 아버지, 어린 첫째와 둘째 아들, 갓난쟁이 딸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화차를 탔고, 도시의 성곽 아래 구호소에 의존한 채 난민으로 기약 없이 입에 풀칠을 하며 버틴다. 왕룽은 오란과 결혼하고부터 재산을 쌓는 재미로 왕성하게 노동했다. 그 결과 황 대감으로부터 비옥한 논마지기를 사들였고, 풍족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나 이곳 대지는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 사이로 극심한 기근과 홍수가 번갈아 들었다. 이번 가뭄에 왕룽 가족은 모든 걸 버리고 오직 땅만을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남쪽 도시 성곽 아래 거렁뱅이로 전락했다.
2년의 극빈 생활을 아내 오란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오란은 굶주림이 극에 달했을 때조차 단호하게 땅을 팔지 않는다. 미련없이 가구와 집안 물품을 모조리 팔아치워 여비로 삼았다. 남쪽 도시에 도착한 직후 여자인 자신과 아이들은 구걸로 먹고 살 수 있으니 남편은 돈을 모아 집으로 돌아갈 대책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모두 살아남아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왕룽은 오란이 마찬가지로 굶주린 처지의 부모가 노예로 팔아넘겨 황 대감댁 계집종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무 부유해진 부자들이 혁명으로 몰락할 때 기회가 생겼다. 피난한 도시 부자의 집에서 왕룽은 금화를, 오란은 보석주머니를 노략질했다. 이를 밑천 삼아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지는 펄 S. 벅의 대표작으로 <아들들>, <분열된 집안>으로 이어지는 3부작의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왕룽이 오란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시작한다. 왕룽을 중심으로 그의 집안 가족들의 생애를 따라가고 있다. 안후이 농촌의 전근대적인 중국 가족의 삶과 풍습이 생생하다. 딸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부모, 전족을 강요받는 여성의 삶, 지주의 축첩과 축재라는 사회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루지만, 이야기는 농부 왕룽이 대지와 맺은 “풍요의 약속”을 신화의 이야기처럼 전한다. <대지>는 도시화 이전의 삶, 농촌과 농사, 땅과 인간의 풍요와 생명력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농촌문명의 풍습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성장하고 변모하는 인물인 왕룽의 시야를 따라서 모험하듯 체험해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개성적이고 특출나다기보다는 관습적이고 전형적이지만 생생하고 강렬하다.
오란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왕룽의 인생의 챕터가 나뉜다. 1부는 고난과 축재, 2부는 풍요와 병폐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황 대감 댁에 들렀던 가난한 농부 왕룽은 2부에 들어 대감 댁의 땅뿐 아니라 집까지 모조리 자기 것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제 자신도 대감의 입장에 선 것이다. 왕룽은 고민을 겪지만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아들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왕룽은 계집종 출신이었던 오란을 소중한 아내로 맞았고 땅에서 노동하며 스스로 일어선 인물이다. 그의 첫째와 둘째 두 아들은 어린 시절 남쪽 도시에서의 극빈을 경험했으나 이후 왕룽이 재산을 쌓으면서 노동이 면제되고 간단한 글공부를 배우며 땅으로부터 멀어졌다. 터울이 있는 막내 아들은
글공부를 시키지 않고 농부로 키웠다. 막내 아들은 형들과 다른 처우에 피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모습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 오란을 닮았고 말수가 적은 점까지 물려받았다.
맏아들의 혼례를 보고 오란은 죽었다. 왕룽에게 오란은 몹시 가난하고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겪은 아내로 말 그대로 조강지처(糟糠之妻)이다. 이어서 늙은 왕룽의 아버지가 죽었다. 옆집 남자였고 자신을 잘 따르며 집사 역할을 했던 칭도 죽었다. 이 집에서 이제 과거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졌다. 둘째 딸은 시집 보냈고, 백치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자신이 돌본다. 집안에서 오란이 묵묵하게 맡았던 조화는 사라졌다. 첫째와 둘째 아들의 며느리가 싸우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로 인해 골치를 썩지만 아편을 제공해서 무마시켜나간다. 위협이 되던 종제가 전쟁터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왕룽은 한시름을 덜었다. 이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친다. 막내 아들이다. 막내 아들은 배움을 원했다. 왕룽은 농사일을 맡겨 막내 아들만은 농부로 키우려던 생각을 접었고, 가정교사를 붙여줬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왕룽의 말년은 조용히 흘러갔다. 종제의 위협마저도 지니고 있는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계집종을 한 명 내주면서 파국을 피했다. 늙은 롄화 대신 몸종이던 어린 리화를 취했다.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고 체면이 조금 상하지만 원하는 건 모두 가졌고 표면적으로는 두 아들도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막내 아들만은 달랐다. 자신에게 대드는 막내 아들에게 원한다면 계집종을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농엔과 눙웬에게는 어린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보이는 것이 껄끄럽지 않았다. 막내 아들에게는 달랐고 두려움을 느꼈다.
“전 이제 군대에 가겠어요. 이제 전 떠나야겠어요.”
막내 아들은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문제 삼고 대들지는 않았지만 “왕룽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 아들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대지>의 후속편 <아들들>로 이어지는 30장의 이 부분은 이야기의 경첩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1) 왕룽과 막내 아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지, (2) 막내아들이 두 형 농엔과 농웬과 어떤 다른 감정과 동기를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를 어렴풋하게 가늠해보게 한다. 오란은 26챕터에서 죽었고, 30챕터에서 막내 아들이 농부 역할을 면제받았다. 왕룽은 가부장으로서 자식들의 인생을 자신 뜻대로 결정해 왔으나 자식들은 대체로 따라주지 않았다. 장남은 위신을 위해서 가르치고 재물을 대주었고, 차남은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곡물상으로 밀어줬다. 그 결과 장남 농엔은 허례허식과 허영으로 가득한 놈팽이가 되어갔고, 차남 농웬은 자기 결혼식 하객에게도 고기와 음식을 아끼는 재산만 쫓는 자로 성장했다. 왕룽이 베풀어준 도움이 좋게 작용한 적이 별로 없고 아들들의 본성의 나쁜 면이 더 무성하게 자라나게 했다. 그에 비해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막내 아들은 하인이나 일꾼처럼 농사일만 하고 컸다. 오란과 막내 아들이 닮은 지점들이 연결된다. 참고 견디는 이들에게 왕룽은 무심했고 이들은 굳은 결심을 가진 채로 세월을 견뎠다.
<대지>의 풍요는 정의로움과 관련이 얕다. 자연이 주는 벌과 선물은 짧은 인생사를 예측불허하게끔 만든다. 누가 부를 쌓을지, 누가 번성할지에 있어서 대지가 요구하는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 아무튼, 왕룽은 대지의 풍요를 누렸다. 재산과 처첩, 자손과 수명에 있어서 은혜를 입었고, 그렇기에 그는 두 아들이 땅을 팔아치울 생각임에 분노한다. 대지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펄 S. 벅의 필체는 다음 시대를 예고했다. 막내 아들은 천하를 주유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중국 역사의 최대 혼돈기이기도 했던 이 시대 왕룽의 자손들은 무엇을 마주할 것인가? 왕룽과 오란에게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찾았던 남쪽 도시였고, 맏아들에게는 향락과 도피의 장소였던 남쪽 도시였다. 작가의 펜은 막내 아들의 발걸음을 따라 남쪽 도시를 향해 천천히 옮겨가고, 수많은 도시와 전장의 사람들이 쏟아내는 젊고 빠른 말 속으로 뒤섞이며, 그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현대의 태동을 향해 약진할 것이다.
추기
- <대지>의 배경은 어림잡아 1900~1910년대 초반이다. 이때 중국의 도시화율은 10%에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UN이 추정한 2025년 기준 세계 인구의 4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 막내 아들이 친모 오란에 대해서 더 깊은 정을 느낀다는 것이 소설에 표현된 부분은 없다. 부자가 된 이후 왕룽은 아이들에 관심을 잃고, ‘롄화’라는 첩을 들이고 재산의 즐거움을 느끼는 데 몰두한다. 막내 아들은 이 시기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롄화 사건이 정점을 치고 수그러들즘에 오란은 병으로 수명이 다하고 재산을 누려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가부장질서에 따라서 글공부를 했던 농엔과 농웬에 대해서 어머니 오란은 자신이 모셨던 황 대감댁의 도련님들처럼 엇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왕룽에게 돈을 받아 서당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째와 둘째 아들은 어른대우를 받으며 오란의 품을 벗어난다. 오란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세번째인 백치 딸과 그 아래 막내 아들, 막내 딸이 많았을 것이다. 백치인 딸과 시집으로 떠난 막내 딸의 이야기를 알 수 없고, 막내 아들만이 가부장 왕룽에 대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막내 아들의 입장에서 볼때, ‘자신이 겪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에 순종하는’ 어머니 오란의 죽음 다음인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오란의 죽음 이후 막내 아들의 이탈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다. 오란의 죽음은 이미 싹트고 있던 막내 아들의 이탈과 결단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서사적 경첩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오란의 존재는 훗날 토지개혁을 다룬 중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이 형상화한 ‘고대구심한 노동인민’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 현대문학의 혁명적 서사와 비교할 때 펄 S. 벅의 접근은 다른 방향에 서 있다. 오란과 같이 가장 미천한 사람이 때론 가장 강인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그려지고, 주목받지 않던 막내 아들이 미래를 열어가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지》의 후속편 《아들들》의 서사 구조는 약한 자가 뒤집는 성서의 문법과 닮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