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셰스쿠 -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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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에게 외국인 부부의 시체가 나오는 뉴스는 충격이었다. 무시무시한 공포영화 한 장면을 본 후유증처럼 한동안 죽어있는 사람의 영상은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누구였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막연하게 사형제도에 대한 두려움만을 느끼게 했다. 그리곤 세월이 흘러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까마득한 망각 속에 묻혀 지내던 중 『차우셰스쿠』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루마니아라고 하면 드라큘라(블라드 3세 바사라브)와 체조선수 코마네치 외에는 떠오르는 게 딱히 없는 나라다. 동유럽 국가로 공산주의를 지향한 국가. 비옥한 토지의 국가. 아무리 노력해도 학창시절 배운 루마니아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책을 읽으면서 물론 두려움이 만연한 국가에서 독재정권의 횡포나 차우셰스쿠라는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도 되었지만, 루마니아라는 국가의 서글픈 역사나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참으로 뜻 깊었다.

대한민국만큼이나 외세의 침략과 식민시대의 아픔을 보냈던 나라. 연이은 세계전쟁의 중심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립과 굴욕적인 동맹을 감수해야했던 나라. 꺼삐딴리가 자꾸만 생각나는 슬픈 역사를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행정보로 루마니아를 검색하면, ‘라틴계로서 활달하고 양순한 편이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나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자기변명이 많습니다.’라는 대인관계 문화결과를 볼 수 있다. 신용이 없고 변명에 급급한 문화는 혹시 얼룩진 역사가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배층의 횡포와 억압에 길들여진 역사 때문일까. 속된 말로 가방 끈도 짧고, 지혜롭지도 못한 지도자가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24년간을 탐욕스럽고 무식하게 통치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독한 폭군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악마’라고 부르고 드라큘라와 빗대어 어린 소년의 피를 수혈 받을 것이라 루머가 도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집권할 수 있었을까.

- “나는 지금 현재까지도 왜 수많은 학자, 언론인, 지식인들이 서로 앞 다투어 차우셰스쿠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그럴듯한 단어들을 찾으려고 사전을 뒤적이며 아귀다툼을 벌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p252)

  - … 처음에 방송국 직원 한 명이 매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동정을 약 10분간 보도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상관의 눈에 들고 싶었던 다른 직원 한 명이 그 일을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면서 방영 시간이 30분으로 늘어났다. 방송국 내의 아첨꾼들이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경쟁에 경쟁을 거듭한 끝에 결국 방영 시간은 두 시간으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한 비굴한 행동이나 불합리한 행태에는 한계가 없어 결국 파국으로 끝이 났다. (p258)

 

- “국내에서 갖은 역정보와 공포감을 조성하고, 평범한 이야기도 차우셰스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 사라질지 모른다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대한 기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루마니아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심리적인 테러입니다. 루마니아인 네 명 중 한 사람은 정보원이라는 이야기는 비밀경찰이 고의적으로 퍼뜨린 역정보였습니다.” (p319)

 
이청준 작가의 『소문의 벽』이라는 단편소설이 떠오른다. 전지불 너머에 누가 있는 줄 모르는 채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고 감시하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 무력탄압이나 학대보다 무서운 두려움과 고립감. 수많은 꺼삐딴 리를 생산해내는 차우셰스쿠의 정권 하에서 나는 과연 나의 소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 … 또 다른 경제정책 실패 사례들도 무수히 많다. 그 중 하나가 골칫거리로 변해 버린 ‘다뉴브 강 - 흑해 운하’ 이며, 다른 하나는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p282)

 

갑자기 우리나라의 대운하가 떠오르는 것은 기우라고 믿고 싶다. 두려움과 기회주의적인 생존본능으로 우리는 수많은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자문하게 되었다.

 

- 갈 곳 없는 비밀경찰들은 새로운 집권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 (368)

 

-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죽은 후에까지 루마니아 사람들 간의 증오심과 과민 반응을 유발했고, 분파 행동과 투쟁심을 야기했으며 수치심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서로 의심하게 만든 과정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p371)

 

이 책은 루마니아만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차우셰스쿠라는 미치광이와 엘레나라는 악녀를 다룬 공포물만도 아니다. 나만 아니면 되는, 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눈 찔끔 감고 눈앞의 이기만을 좇는 수많은 우리를 투영하는 듯하다. 승리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역사와 눈 가리고 아웅해대는 지배층의 언론공세에서 본질과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간 중간 미묘한 오타나 애매한 번역이 있긴 했지만 그조차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만큼, 기대이상으로 유익하고 몰입도 높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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