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친구랑 간간히 만나서 서로 책을 빌려주고 있는데 이번에 빌린(조만간 반납해야하는) 책이 종이동물원이었다. 무려 단편이 열네개나 든 단편집. 엄청 두껍고, 그만큼 읽는데도 오래 걸렸다. 꼬박 4주를 읽었으니 한달 걸린 셈이네.
우선 단정해두자면 켄 리우는 천재다. 단편 소설의 천재. 장편은 또 모르겠다. 아직 안 읽어봐서.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머리말이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종이동물원은 시작부터, 그것도 소설이 아닌 부분부터 가장 SF 소설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켄 리우의 말대로 무분별한 현실과 달리 은유의 논리를 더 중시하는 이야기의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환상적으로 암시하는 서막이다.
평범한 단어로 결코 평범하지 못한 이야기를 짜는 켄 리우의 세계가 한 발 앞서 나를 맞이했다는 걸 다 읽은 이제서야 깨닫는다.
< 종이 동물원 >
익숙하다못해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모성애를 그린 이야기다.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행복했다가 바깥 세상과 만나며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과정 끝에 소홀해진 어머니와의 관계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것이 소중했음을 깨닫는다는, 흔한 돌아온 탕아의 후회극. 이렇게 지겨운 이야기를 켄 리우는 특유의 감성으로 은은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영어를 잘 모르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 숨쉬는 종이 동물들을 친구 삼아 보낸 어린 시절, 성장하며 두 개의 문화권 사이에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버린 일, 미국 사회에 적응하며 자라다 어머니를 잃고 종이 인형들이 생명을 잃은 일. 어느날 종이 인형들의 숨이 돌아온 일까지.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한없는 애정과 잔잔한 감동이 좋았다. 뒤에 이어지는 단편들이 중국 근현대를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강한 지지와 의지를 보여준다면 이 이야기는 그들을 향한 켄 리우 본인의 사랑과 애정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 천생연분 >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가 화제였다. 친구가 그걸 보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떠오르는 단편이었다. 이걸 소재로 지어낸 SF도 처음 보았고(SF를 즐기지 않으니 그래서일 것이다) 너무나도 적절한 활용에 감격스러웠다.
현재의 소셜미디어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의 삶을 보조하는데, 과연 그것이 우리의 의지일까?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천생연분은 직접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맞춤 서비스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과정이 조금도 인위적이지 않고 마음에 스며든다. 정말 재밌는 작가다.
< 즐거운 사냥을 하길 >
가장 크게 감탄한 단편이다. 내가 머리가 굳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소설을 읽고는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니!
판타지를 즐겨 읽는 입장에서 SF가 판타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알지만, 소재면에서 두가지는 항상 대립해왔다. 둘을 이어낸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걸 해낸 소설이다. 사람으로 둔갑하는 여우가 다시 여우로 돌아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전율을 안겨준다.
당시 중국과 홍콩의 시대상이나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는 점에 있어서도 볼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 상태 변화 >
사람의 영혼이 어떤 물질적인 형태를 가진다는 가정하에 쓰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한조각 얼음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고, 영혼을 잃으면 목숨도 잃는 세상 속에서 언제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며 산다.
사실 제목을 제대로 안 보고 읽었기 때문에 결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뒤늦게 단편을 다 읽고 나서야 제목을 보고 웃었다. 결말을 짐작할 순 있었지만, 그 의미가 좋았다.
< 파자점술사 >
타이완의 근현대사가 엮인 이야기인데, 문제는 고문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다ㅠ_ㅠ 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하는 이야기를 못 읽는단 말이에요.
종이동물원과 비슷하게 섬세하고 잔잔한 감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너무 무서웠지만, 역사공부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
켄 리우가 만든 다양한 가상 인류가 가진 기록하는 습성을 기록한 단편이다. 모든 기록을 책이라고 칭하는 켄 리우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시뮬라크럼 >
재밌게는 읽었는데 솔직히 마지막 결말이 어리둥절했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후다닥 마무리된 느낌? 문장 하나하나에서 결말의 의미를 찾느라 고생했다.
어쨌든 징그러운 아버지이기는 합니다. 이런 부모는 싫어!
< 레귤러 >
책을 빌려준 친구가 가장 좋아했다고 추천한 소설. 첩보물 같은 매력이 있다. 재밌었다. 악당 말고는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라는 점도 포함해서. 메인 화자인 루스는 초반에 남자라고 생각하다가(심지어 악당이랑 동일인물인 줄 알았다) 뒤늦게 놀랐다.
미래의 인류는 이런 식으로 사이보그화할까? 꽤 괜찮은 미래다.
당연한 이야기긴 하지만,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루스의 이야기가 완결성 있게 이어져서 좋았다. 의외로 단편에서 재미와 메세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작가가 드물더라고요.
<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
켄 리우의 상상 인류 이야기 두 번째. 여기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곁들여져서 재밌었다. 나중에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랑 등장하는 인류들을 비교해볼 생각이다.
< 파(波) >
생존을 위해 먼 우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금 현재의 우리와 비슷한 입장인 것 같지만 아마 기술은 훨씬 발달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위해 출발했고, 긴 세월을 우주선에서 버티며 생존하기 위해 치밀한 체계 속에 살아간다. 그러던 그들에게 지구에서 마지막 연락이 날아온다. 영생을 살 방법을 찾았다는 소식이다.
화자와 그의 남편은 죽음을 두고 인간다움을 논하며 다투고, 각자의 선택 하에 일부는 생명과 노화를 봉인한 채 우주선에서의 삶을 이어간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에서 발견한 것은 기계로 만들어진 지적 생명체. 외계인이라고 여겼으나 곧 멸망한 지구에서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인류임이 밝혀진다. 어린아이로 고정되었던 선원들부터 차례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는 화자 역시 유기체 인간의 형태를 버린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더욱 업그레이드된다. 그 끝에 마주한 것은 새로운 생명체의 약동이다.
노화와 변화, 그리고 발전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가며 흘러가는 모습을 아주 재밌게 다룬 단편이었다. 여러가지 지구의 신화가 나오는 것도 재밌었다.
< 모노노아와레 >
파와 비슷하게 처녀자리로 떠나는 우주선의 이야기다. 파의 후속편으로도 보였는데, 운석 충돌을 앞둔 지구가 마지막으로 띄워보낸 우주선의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아는 입장에서(어쩌면 요즘의 일본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웃기면서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부터 평범한 영웅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조금 오묘한 기분이었다. 켄 리우가 평범한 한 사람의 영웅을 간절히 외치는 이유는 그가 미국인이라서일까, 중국계라서일까.
<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 >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물밑 지하 횡단 터널 열차가 나오는 이야기다. 화자는 터널 공사에 동원된 인부다.
그는 가난한 농민이었고 반쯤 속다시피 끌려가 인부가 되었다. 터널 공사에는 화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나 일본이 끌고 온 포로들이 동원되었다. 화자 역시 고된 노동에 시달렸으나 포로들이 처한 현실은 그보다 가혹했다.
화자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사실을 데이트하던 미국인 여성에게 털어놓은 끝에, 지나간 과거를 폭로하기로 마음 먹고 행동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의문스러운 것은, 모노노아와레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가장 마지막 작품에서도 그렇고 작가는 계속해서 ‘미국다운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가 무얼까. 미국인으로서 작가가 가진 자부심인걸까?
< 송사와 원숭이 왕 >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부터 세 개의 작품은 모두 학살과 잔학행위의 역사와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의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송사는 소송 전문가라는 의미고, 원숭이 왕은 제천대성을 뜻한다. 터널 약사보다 약간 범위가 넓고, 마찬가지로 학살의 역사와 침묵 앞에서 침묵할 수 없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
일본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 박사 부부가 각자 분야의 특기를 활용해 과거의 시간을 인간의 뇌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본 731부대가 중국에서 벌인 잔혹한 인체실험을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하는 형식으로 진행돼서 왠지 소설로 보는 서치(영화) 같은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끔찍한 인체실험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는 볼 때마다 내게 기묘한 느낌을 준다. 어쩐지 완전히 다른 세계 이야기 같은 거리감과 함께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자책,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질렀다는 잔혹행위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무심해지는 이유는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얼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이야기 뿐인데. 이토록 무심한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무서운 이야기가 많았는데도 평소보다 무심하게 읽었다. 이 이야기 때문에 바로 리뷰를 쓰지는 못했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아직 발화할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더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켄 리우가 말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기억하고 말해야한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공감하고 동정을 베풀 수 있다. 그들을 지지하고 등 떠밀어줄 수도 있다.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비록 오늘도 중국 정부의 행패와 짱깨를 외치는 한국인을 무수히 보았지만 나는 슬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