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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 나의 해방일지와 미투 운동의 탄생
타라나 버크 지음, 김진원 옮김 / 디플롯 / 2024년 3월
평점 :
📚 타라나 버크 《해방》
✏️해방, unbound.
이 책은 미투운동의 창시자이자 인권운동가인, 타라나 버크의 이야기다. 일곱살에 성폭력을 당하고, 스스로를 가둬온 모든 것으로부터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나는 두어번을 울어야했다. 어린아이였던 타라나의 이야기에서 한 번, 그리고 타라나 딸의 이야기에서 한 번. 특히, 성폭력에 대한, 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도 모르는 나이에 당하고서도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의 글을 보면서, 나또한 그녀의 주변에 있던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1인 딸아이에게 가끔 이런 얘기들을 언급하면서도 어쩌면 제일 중요한 말들을 생략한 채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평소에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막상 중요한 때에는 분노와 좌절의 감정밖에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p. 59~60
내가 살면서 만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들은, 엄마든 이모든 같은 아파트에 살던 아주머니든 나를 사랑스러운 아이로 바라보는 여성들은 나 자신과 내 은밀한 부분을 내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무도 내 은밀한 부분에 손대게 해서는 절대 안돼, 모두 그렇게 말헀다. 하지만 그 은밀한 부분을 왜 지켜야만 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 경험을 돌이켜보았을 때도 나는 성범죄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했다. 나 자신만 나무랐다. 내가 보기에 저들이 나를 학대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규칙을 어겼다. 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생존자로 인식하지 못했다. 희생자로 인지하지 못했다.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한 고통을 겪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계속해 떠오르는 장면과 불안과 공포로 괴로움을 느껴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떤 고뇌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도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내가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짐을 짊어졌다. 등을 무겁게 짓누르고 살을 깊이 파고드는 고통을 참아냈다. 그 무게가 날마다 내 어깨를 서서히 내리눌렀고 마침내 나를 으스러뜨렸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타라나가 점점 자신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면서, 테스 건티의 <우주의 알>에서 '깨어나고 싶은 게 꿈'이라던 말이 생각났다. 타라나가 깨어나고 있다는 느낌. 물론 단번에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의식적으로는 계속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한 학생이 손을 뻗어왔을때는 먼저 회피해버리는 상황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바뀌게 된다. 사실, 이것 자체도 대단한 일이다. 용기다.
누군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앞서 나갈때에는, 같이 걸어가지 못할지언정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삐딱하게 보거나, 적어도 방관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느리게 가더라도 말이다.
🏷 p. 301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런데 용기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용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면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공동체가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용기가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면 어떨까? 스스로에게 공감할 수 없으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공감과 용기가 치유의 핵심일까?/ 이제 질문들이 기억보다 빠르게 솟아났다. 대답도 그럤다.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곧 봇물처럼 터질 기세로. 난생처음으로 내 이야기가 내 몸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ㅇ내 그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할 한 사람, 바로 나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나도 당했다. Me,too.
덧, <편집자 레터 중에서>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을 읽는 자의 최선은 무엇일까. 고민이 가닥 중 하나는 '미투'가 등가의 표현으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모습, 비슷한 맥락의 상흔들이 동등한 통증을 주는 건 아니다. 100명의 외치이 있다면 저마다 다른 무게를 가진 100개의 아픔, 천편일률로 치환할 수 없는 100개의 길이 있다. 타라나는 같지만, 결코 같지 않으며, 같을 수도 없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다. 타라나의 길을 따라 세상을 바꿀 수많은 '나'에게, 완연한 고백을 품은 채 치유와 자유의 나날을 기다리는 모든 '나'에게. 이 책이 닿기를 바라며.
엽서로 들어있던 편집자의 레터를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문장이 생각났다. "타인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히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어떤 이의 상황이나 아픔에 대하여 공감한다라는 표현은 어쩌면 터무니없는 말일 것이다. 함부러 행해져서도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온마음을 다해 헤아려 보려고 애쓸 수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