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는 정의상 소수자일지 몰라도, 그 존재감은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니다.
새롭게 나오는 문학이나 영화, 담론이나 이슈에 있어 이만큼 가시적으로 자기 영역을 차지한 주제는 많지 않다.
이제는 일반 연애소설보다 퀴어소설이 더 흔해 보일 정도다.
이는 분명 그 안에 사람들이 느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한 예시 중 하나이다.
관람이나 독서 후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것이 창착의 의의라고 볼 때, 이 소설은 분명 그 목적을 충족한다.
그리고 그 생각할 거리는 대부분 의문의 형식을 띈다. .
우선, 떠오르는 질문은 주인공이 만난 대상은 과연 수호천사가 맞는가이다.
내용을 보면 오히려 주인공이 천사를 보살피고, 요구를 들어주고, 지켜주는 존재 같다.
그렇다면 자신을 수호자로 여기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수호천사인 것인가.
즉, 무기력과 두려움, 공허와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실존의 의미를 자각하게 하는 존재로 여기게 해주는 고차원적인 고단수 수호천사.
그 수호천사는, 주객의 역전이 일어났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피수호자 자신을 잘 인식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관조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 의문은 '누나'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주인공에게 갖는 의미이다.
사실 주인공은 퀴어가 아니거나 그 여부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작중 '누나'로 인해 그 주제에 합류하게 되는 인물인데, 그녀/그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범위와 이해하는 폭이 성장한다.
'퀴어'의 본질은 터부를 타파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며, 세계관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나'는 또 다른 의미의 수호천사이며, 사랑하는 대상이 된다.
아울러, 수호천사와 누나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즉 사회에서 강요하는 일반적인 구분, 한계들을 횡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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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