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의 사랑을 읽은지 어언 15년이 지나갔다. 15년이 지났을 뿐이지 나는 시인의 시대를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때의 낭만과 그때의 쾌락과 그때의 절망과 그때의 고독을 온몸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런 것은 내가 시인의 시를 읽는데 일종의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문장에 대한 많은 논평을 할 수도 있고 철저하게 나의 입에 오르내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선 무언가 텅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래 공허했다고 하는 말이 딱 맞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도 없는 것이고 나도 그 빈 공간에 무엇을 채울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최승자의 시가 가진 매력일 지도 모른다. 해석은 된다. 마음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텅빈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내지 못한 시대의 부재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누군가는 최승자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해서 혹은 시인의 시가 시같지 않고 무슨 꼭 전장 출전사를 닮거나 아니면 일종의 '유서'를 닮듯 읊조리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시인을 아주 멀리서만 지켜보려고 한다. 그 시인이 내뱉는 말은 다 옳다고 멋지다고 여기지만 시인의 삶은 싫어한다.
나는 이러한 일들이 일견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시인의 시를 낯설어 함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 나는 이 시인의 글 안에서 나와 조우한다. 그것을 멀찌기 서서 지켜보거나 단순하게 박수를 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란 시를 외며 시인에게서 빠져나와 나의 삶을 냄새맡는다.
그런데 그런 시인의 어조가. 그런 시인의 시 쓰는 방법이. 좀 더 과장하자면 시인의 마음이 변화했다고 여겨진다. 그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전보다 좀 덜 내면적이라 환호도 받지만 아마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일종의 '배신'같이 느껴질 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시인은 변했고 나는 빈 배 처럼 텅비어 홀로 그 자리에 있다. 이 시들은 시인을 말하고 있지만 거기에 더이상 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