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먹으라 - 영적 독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 2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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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는 제목 자체가 혁신적이다. 내 마음에 확 와닿는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종교적 열성이 대단하지만 정말 성경책을 영혼의 양식으로 먹고, 맛보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성경통독, 성경공부 등이 난무하지만 그것이 뼈와 살이 되고, 혈관에 피가 되어 흐르노 녹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교만하게 되고 독선에 빠지며, 심지어는 이단과 사이비로 흐르는 경향들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하기마저 하다. 읽고 싶다. 먹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을 먹으라"는 그렇게 쉬운 책은 아니다. 신앙간증이나, 일차원적인 '하라 하지 마라'식의 설교집과 같이, 독자의 입맛과 필요에 맞추어 나온 인스턴트 책과는 달리, 이 책은 깊은 내공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함께 신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유래한다. 밧모섬의 요한의 체험을 말한다. 거대한 천사가 한 발은 대륙에 한 발은 바다에 다디고 설교를 하는데, 그것을 성 요한이 받아적으려하니까 받아적지 말고, "이 책을 먹으라. 입에는 달고, 배에 내려가면 쓰리라." 특이하게도 처음에는 달지만, 나중에는 쓰다고 한다. 이것은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사람을 완전히 수술하고 변혁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리라. 단순히 말씀을 내 입맛에 맞게 고르거나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변혁시키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세 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성경의 삼위일체적 읽기 방식에 대하여, 둘째는 말씀묵상방법인 렉시오디비나에 대하여, 셋째는 오늘날의 성경번역에 대한 저자의 고민에 대하여 쓰고 있다. 흔히 두번째 말씀묵상법에 독자들이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지만, 필자는 1부가 이 책의 핵심이자 유진 피터슨이 한국의 독자들을 섬기는 가장 탁월한 부분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1부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지, 삼위일체적 성경읽기란 무엇인지, 성경읽기의 놀라움과 성경의 권위,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독자들이 빠지는 '자아의 권위'중심의 문제점, 성경읽기와 주해, 예전 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코 쉽게 읽을 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으라 스터디 가이드> 책이 나온 것은 당연하고 잘 된 일이라고 본다.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불행이요, 무지이다. 설령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도 성경의 권위보다는 '자아의 권위'를 더 중시하여, 체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을 자구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한다든지 한다. 저자는 한 마디로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를 책망하고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한다고 한다. 칼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보나벤투라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졌더라도 그것을 맛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라고 하였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성경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뜻일 것이다.  

성경을 인격적으로 읽는다고 할 때, 성경을 비인격적으로 읽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 성경을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여, 지식이나 정보를 추구한다든지, 실용적인 목적이나 원리만을 도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영성이나 영적 사유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을 비인격적으로 읽는 그릇된 방식이라고 한다. 즉, 비인격적인 성경읽기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더 앞세우는 것은, 폴 리꾀르가 말하는 의심의 해석학을 넘어서 숭배의 해석학, 즉 '제2의 순진성'으로 나가는 진리의 현현을 맛보는 길이다. 훗설에서 시작한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바로 논리와 합리성으로 질식해 가는 현대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괄호치기와 판단중지를 통하여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며, 진리를 맛볼 것을 충고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세계에 귀먹었으며, 진리를 겸손하게 경청해야 하리라."고 하이데거는 경고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적 성경읽기란 어떤 방법인가?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 교리가 200~300년의 고민을 통하여 생겨난 배경을 설명한다. 어떻게 투박한 마가복음을 유대인의 경전인 모세오경과 같은 경전에 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바울의 편지를 시편과 선지서의 탁월하고 위대한 경전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이러한 경전화의 고민에서 태어난 것이다. 성경전반에 흐르는 통일성과 일치성 속에서 성부는 창조하시고, 성자는 구원하시며, 성령은 복을 주시는 다양한 사역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음을 삼위일체라는 교리적 구성물을 통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일 저자의 말대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면, 그렇다면, 현대에서 중요시하는 개인의 자유는 말살되는 것인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한 개인을 성경의 범주안에만 가두고 제한하는 것인가? 성경이란 고대의 책이 우리를 미래로 더 나아가게 하는 발걸음을 묶는 것인가? 저자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근거를 '내러티브'(이야기)에서 찾고 있다.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지 제한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이야기에는 공백이 있어서 독자가 풍성하게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내러티브, 이야기가 성경의 형식이다. 따라서 성경의 독자는 성경을 무슨 명령이나 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주해는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된다. 흔히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주해-이야기의 문법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파악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주해는 사랑의 행위이다"라고 정의한다. "주해가 없는 영성은 방종에 빠지기 쉽다"고 경고한다. 주해는 단지 학자들의 현학적인 뽐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고층건물을 지을 때, 그 기초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해는 건물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영성과 주해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영성을 추구하며 근거없는 주관주의와 말씀의 사유화에 빠져버린 영성의 흐름에 중요한 일침을 가한다. 필자는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은 본인은 말씀의 사유화를 더욱 중시하는 입장으로 흐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는 영성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진 피터슨의 말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영혼에 대한 관심없이 읽으면 유익이 없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수박겉핥기식의 성경이해에서 좀 더 낯설고 충격적이며 놀라운 성경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성경을 낯설게 읽자! 성경을 이미 안다, 이미 내 것이라는 자만을 버리자. 언제나 겸허히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경청하고 순종하도록 하자. 더 나아가 성경을 발로 읽자. 실천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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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종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
신성종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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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저명한 목회자요 신학자가 이론서가 아닌 체험적인 글을 낸다는 자체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따라서 독자는 어느 정도 균형있고, 신뢰할 만한 통찰을 이 책에서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환상은 대개 본인이 체험하고 생각하고 느낀 소재들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에 대한 파편적인 통찰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첫째, 단테의 <신곡>과 같은 불후의 문학작품의 기법을 이용하여 천국과 지옥의 환상을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둘째, 저자는 통상적으로 "천국과 지옥에 갔다왔다"는 확정적 언어보다는 "보았다"는 표현을 선호하며,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소설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것은 소설이라는 기법이다. 그것은 절대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구도자의 입장에서 본인의 체험을 통하여 독자들이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독선과 아집으로 어떤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저자는 보수교단의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는가?' '어린아이들도 지옥에 가는가?' '연옥은 있는 것인가?'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나?'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 등의 보편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면서, 이에 대한 환상에서 얻은 답변을 기술하고 있다. 

연옥편, 지옥편, 천국편으로 되어 있다. 지옥과 천국은 각각 12관, 12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즉, 사후세계에도 공로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지옥에는 결코 기쁨과 감사가 없고, 천국에는 결코 원망과 불평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실과 사후세계는 '역전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와 장로도 지옥에 가 있다든지(지옥편), 천국편에서 살인자인 김모씨가 천국에 와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천국은 다시 '전도의 산' '기도의 산' '찬양의 산' '섬김의 산' 등 세상에서의 행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예컨대, 찬양연습했던 것도 찬양의 산에 쌓여 있다. '기도의 산'에서 저자는 제가 기도 많이 했는데, 이것밖에 안쌓였냐?니까, 다른 목사들은 더 쌓인게 없다며 얘기한다. 천국에서는 평신도와 교회지도자들이 역전되어 평신도가 더 큰 공로를 인정받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후세계에는 놀랄 일이 많을 것이다. 역전현상이 일어나니까. 

천국과 지옥의 이슈를 낡을 사고의 잔재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겠으나, 이것은 여전히 기독교의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이 주제를 다시 생각하고, 한국의 기독교의 행태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유도한 저자의 용기와 진솔함에 박수를 보낸다. 한때 주목받는 지도자로서 비판과 지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소 과감한 시도를 한 것은 그가 제도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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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사다 - 목회자를 위한 영적 지침서
신성종 지음 / 신앙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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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었다. 유익하다. 진솔하다.  합동측 목사이면서 초교파적인 관점으로 썼다는 사실에 놀랬다. 그만큼 열린 사고를 가졌고 폭넓은 공부를 한 것이리라. 성령운동, 영적싸움, 성공적인 목회, 특히 체험에서 나오는 설교학 등이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신성종목사, 교단이 달라서 잘은 모르지만, 그만큼 다양한 이력과 교수와 목회자, 한국의 대표적 교회들에서 이민목회와 선교사까지 다양하게 하면서 지금은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는 '일체의 비결'을 가진 목회자도 드물 것이다. 그의 사랑어린 충고와 조언을 감사하게 받았다. 

다만, 저자가 추천해주는 책을 사고 싶으나 <절판>된 것들이 많았다. 사모님의 <이럴 때 사모는 어떻게 말할까>등에서부터. 그러나 그의 망원경식 성경공부라든지, 성경개요에 대한 책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가 새벽형인간으로 시간활용한 것과 폭넓은 독서생활과 글쓰기는 정말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내가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합동측 교단에서 담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는 정체성이 모호한 주변인으로 살았다고 할까. 단순히 교단신학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가운데 자신을 개방하여 살아온 자유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저자에게 이메일로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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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김진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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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가 세 가지인 것으로 보아서 1999년부터 지금까지 두 세 출판사에서 계속 보강하여 출판된 책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인간이해와 인간의 성숙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 기독교 목회자나 신학자는 연역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했다면, 정신과의사 전문가인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으면서 종교와 개인의 성숙을 논한다는 면에서 구별이 된다. 과연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만을 제공하면, 인간의 성숙과는 무관하단 밀인가? 인간의 구원은 개인의 성숙과는 무관하고 사후세계에나 이루어지는 것인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다분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아니다"라고 반론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곧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닫힌 의식'을 볼 수 있는 자기성찰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 곧 '통시적'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할 때, 한 개인의 역사를 아는 것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치유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도 몰랐던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성령님은 사람의 깊은 영과 혼까지 통달하여 아신다. 따라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이해하기 전에 자기를 온전히 아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고 알 때, 온전한 인간이해를 방해하는 방어기제들-투사, 합리화, 책임전가, 억압-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신앙을 가지면 마치 인간적인 개인의 책임과 성숙의 노력은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모습은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정신병적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귀신들림으로 보고 당사자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개인의 신앙적인 과시의 목적으로 오용하는 사례는 큰 문제이다. 실제로 많은 정신불열증 환자들을 병원의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을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귀신축출을 한다고 해서 상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저 자기도 모르고, 남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있지 않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에게 반성할 점을 제시한다. 진정한 인간이해는 한 개인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깊은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경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구원은 막연히 내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구체적인 삶속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괜히 자신의 관점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조언함으로써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상대방에게 짐만 지우는 그런 경우는 없어야하겠다. 이 책의 최대의 장점은 첫째, 인간 성숙의 열쇠인 닫힌 의식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 둘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정신분석과 인간치료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 셋째,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저자는 정신과의사로서 신학도 공부하였음), 넷째,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해 나가야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는 기독교세계관속에서 성장하여 정신과공부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세계관에 충실하면서 심리학을 비판수용하였다.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저자의 인간이해는 타락한 인간관과 중생한 인간관의 이분법적 구도이다. 따라서, 그 독자를 그리스도인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대화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가 공부한 칼빈신학교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이해에 머무는 한계때문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구체적인 인간이해를 제공한 것은 독보적인 공헌이라고 본다. 한국 기독교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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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신학 - 20세기 최고의 신학이 교부
김명용 지음 / 이레서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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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사상가를 이해할 때 지나치게 맹신을 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비판적이 입장에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되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칼 바르트의 생애와 사상을 알기 쉽게 소화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과 그 일치방안에 대하여 모색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미국교회의 분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편견과 선입견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한국 교회의 분열의 핵심에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권위의 문제가 있다. 이 책은 성서는 오류가 있는 인간의 기록이지만,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면에서 그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성서무오설에 집착하는 보수주의 입장과 성서의 권위를 상실한 진보주의 입장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현대의 역사비평에 진지하게 응답하고자 하는 신정통주의의 공헌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는 칼 바르트의 성서관을 흥미롭게 읽었다.  

<계시론>부분에서 "왜 성서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다루고 있다.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든 부인하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원본이 아닌)에서 나타난 모순과 오류 등,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신학적이고 합리적인 진솔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관에 대하여 고민하는 분들에게 매우 명쾌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그리고 성서관은 한국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고민과 분명한 입장을 견지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정론>에서 로마서 9-11장의 해석을 통하여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에 반대하는 근거를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의 후기 예정론은 입장이 다르다. 그의 예정론 전반이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을 '성서해석'을 통하여 논증하고 있는 부분이 주목할 만하다. 즉 모든 주장의 근거를 성경의 권위에서 찾고자 하고 있는 부분이 주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같지만, 현대의 많은 신학이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기에 결코 당연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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