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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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지성, 이지성'하며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유행을 몰고오는 책, 소위 베스트셀러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뒤늦게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지성의 인문독서에 대하여 흠을 잡고 싶은 요량으로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아주 당당하고 분명하게 자기 주장을 해 나가는 저자의 자신감과 솔직함에 '대단하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완전한 신뢰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놀라움과 충격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이 사실이다. 그의 다독-필사-사색의 철저한 독서법때문이다. 한편 질문도 생겼다.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토록 많은 책을 읽었을까? "독서하다 죽어라!" 꼭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하나? 논어를 읽기 위해서 사전 책들을 꼭 그렇게 많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맹목적으로(?) 서양철학과 인문고전에 도전할 이유가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와닿은 부분은 그의 인문고전 독서를 하게 된 동기,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좌절감, 인문고전을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게 된 계기 등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았다.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좌절감! 그 좌절감이 인문고전 독서의 시작이 아닐까. 수많은 인류의 천재들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를 절감하고 독서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세종대왕은 '백독백습', 백번 읽고 백번 쓰는 방법으로 고전을 습득했다. 간디는 벤담의 공리주의 책을 친구가 읽어주었을 때, "하나도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네."라며 자신의 이해력의 한계를 고백했던 일화는 독자에게 위안을 준다. 그렇다. 인문고전은 어렵다. 하지만 그 천재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머리를 깨부스는 석공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지성의 고백에 공감한다.


그리고 돌머리를 깨부수면서 인문고전을 읽는 노력이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길이라고 확신있게 말하는 이지성의 말에 많은 위안을 느꼈다. 왜냐하면, 인문고전을 하면 가난하다, 인문고전읽기는 비현실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세상의 편견을 부수어주기 때문이다. 이 책 6장에서 <인문고전을 독파하는 7가지 비결>을 그의 체험을 요약하면서 제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저자는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 돈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를 소위 '인문경영'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3장, 4장에서 최초의 경영학자는 철학자(인문고전 전문가)이다. 현대 경영학의 시조들, 현대 투자의 귀재들은 인문고전의 전문가들이다. 결국 돈의 흐름을 주도하고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인문고전의 기초를 다진 사람들이다. 인문고전의 실력을 다지면, 자본주의 세상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주장을 펼친다. 믿기지 않는다. 눈이 확 트인다! 진정 인문학이 그렇게 실용적이었던가? 진정 인문학을 현실에 접목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이지성의 인문학 이해는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하고 강직한 선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인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는 한낱 편견이었으면 차라리 좋겠다.


인문학교육은 또한 참 교육의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가를 비테의 <인문학교육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카를비테식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봐야겠다. 이지성의 이 책은 여러 책들의 목록을 소개하는 장점이 있다. 독서리듬을 찾고, 독서혁명을 경험하려면 이 책이 좋은 기폭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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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믿음
찰스 콜슨.해롤드 피켓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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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콜슨! 내가 매력을 느낀 몇 안되는 소수의 보수적 기독교인이다. 그는 잘 아는 대로 닉슨대통령의 오른팔이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C.S. 루이스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버금가는 <순전한 믿음>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찰스 콜슨은 평신도 변증가로서 벌코프, C.S. 루이스,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G.K. 체스터튼, 토머스 오덴 등의 신학자들을 탄탄하게 공부하였고, 그의 체험과 확신에서 평신도로서 책을 저술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신학자와 목회자가 줄 수 없는 색다른 신선함이 있다.


소위 포스트모던시대와는 맞지 않는 돈키호테와도 같은 그의 평신도 기독교 변증에 주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얼핏보기에,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상대주의 문화, 복잡하고 다원적인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성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복음,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하여 간결하고 체험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정통신앙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진리다!


이보다 분명하게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책도 드물다. 강력추천하는 바이다. 나는 찰스 콜슨의 모든 저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일 와닿았던 장은 6장 <하나님의 침공>이었다.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7장은 삼위일체 신앙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8장은 <이것이 믿음이라> 하는 것을 보여준다. 10장은 <이것이 교회다!> 하는 것을 보여준다. 14장 <이것이 정통신앙이 주는 기쁨이다>. 이 장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찰스 콜슨은 '행동주의자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영성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영성가가 존재의 변화와 깊이를 추구한다면, 찰스 콜슨은 믿음에 합당한 행동, 사회봉사,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기 등의 릭 워렌목사류의 행동주의 기독교가 떠오른다. 뭔가 2% 부족함을 느끼는 점도 있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기독교인이다. 좀 지성적인 체 하려고 자신의 소신과 신앙을 팔아버리지 않는다. 


한 지성적인 신학교수와의 대화에서 "찰스 콜슨 선생님은 지성인이니까 설마 성경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죠?"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신학교수님은 성경을 사실 그대로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하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바는 오늘날 많이 배웠다고 하는 신학자와 지성인들이 신학은 배웠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성경의 증언에 무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성경의 증언보다는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선호하는 것이 마치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과도 같다. 성경의 증언보다는 자신의 체험과 이적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인들은 마치 기적을 추구하는 유대인과도 같다. 


<순전한 믿음>은 평신도와 신학도 모두가 읽을 것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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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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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는 진학, 취업, 무한경쟁으로 먹고 살기 바쁘다. 인문학을 공부하라는 것은 옛날얘기나 먼 나라 이야기같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가난하다,' '인문학은 비실용적이다,' '인문학은 어렵고 재미없다,' 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고, 나도 인문학을 공부하지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얼 쇼리스의 이 책의 전제부터 도발적일만하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하면서, "가난한 사람이 인문학을 공부하면 부자가 됩니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용감하게 대답한다. "그렇다. 정신적인 부유함, 생각의 힘을 가지게 된다." 사회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과 지금의 가난을 대처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얼 쇼리스는 '클레멘스 코스'라는 인문학강좌를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놀라운 것은 강사가 일류급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대학생도 아니고, 그저 박사학위소지자도 아닌, 대학의 유능한 교수급으로 강사진을 섭외하고, 강의의 내용도 결코 수준을 낮추지 않고 대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으로 커리큘럼을 준비했다는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실험적이면서도 대단한 발상이다. 결과는 가능성도 보았고, 한계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보다, 이 책을 주제로 지인들과 토론하면서 가난의 문제, 정치의 문제 등에 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은 썩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다소 생소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받은 그 강의의 목차, 강의계획서를 보고 놀랐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시와 소설, 예술 등에 대한 과목의 강의개요는 내가 도전하고 싶고, 읽고 싶은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 피지배층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비밀, 그것은 인문학공부이다.

인문학공부를 통하여 가난의 굴레, 포위되어 있는 삶에서 하나씩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실험정신, 전문성, 박학다식함에 놀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희망을 준다는 사실에 가슴설레였으며, 지금 인문학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그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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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천재가 된 홍대리
이지성.정회일 지음 / 다산라이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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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쇠퇴하는 한국에 독서혁명이라는 폭탄을 던진 사람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이 그의 멘티 정회일과 함께 쓴 책이어서 읽게 되었다. 특이하지 않은가? 독서멘토와 멘티가 함께 만든 책은 어떤 것일까? 그들의 멘토링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홍대리는 경쟁사회에서 낙오될 것 같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그 때 한 친구가 독서를 권해주었다. 내가 그랬듯이 독서가 무슨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그 친구는 독서멘토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였다. 바로 정해일이라는 사람이다. (이는 실제인물인 정회일을 말한다. 아토피라는 신체의 병을 이기고 지금은 영어학원원장이 된 30대 초반의 사람, 독서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독서한다." 이것을 아침에 3번 외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읽다가 좋은 구절은 녹음을 하거나 필사를 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다.

명언집을 읽으며 긍정적인 사고와 통찰을 자극한다. 


처음에는 2권을 읽고 와야 멘토링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33권을 읽고 오게 하였다. 한 달에 10권씩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1년에 100권의 서적을 읽는 것이 목표다.


홍대리는 독서리듬을 만들게 되었고, 짜투리 시간을 독서에 몰입하게 되었다.

정말로 짜투리시간의 위력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5분, 10분 독서가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인터넷 중독이나 멍하니 TV보는 1-2시간을 독서에 투자한다. 책을 마스터하는 기쁨이 늘어난다.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독서리듬을 형성하게 된다.

100권의 책을 읽으면 한 분야에 박사요, 전문가가 된다. 그 분야에 책도 쓸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홍대리는 새로 부임한 사장이 '독서경영'을 표방하면서, 회사에서 동영상강의를 통해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라이벌인 이필립과 유나영(?) 등도 이전에는 소원한 경쟁관계에서 이제는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되어간다. 평범한 홍대리가 강의까지 하다니 대단한 부분이다.


새로 부임한 사장의 독서경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읽은 책을 서평을 쓰게 해오도록 한다. '원북 원페이지' 서평법이다. 실제로 읽은 책을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의 <독자서평>를 쓰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다고 본다. 독서 멘토 정해일은 홍대리에게 더 이상 전수해줄 것이 없다며, 자신의 스승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바로 이지성을 가르키는 것이다. 새로운 독서멘토는 1년에 365권의 책을 읽을 것을 도전한다. 일주일에 2권 읽는데서, 이제는 하루에 한 권씩 읽을 것을 도전하는 것이다. (미국에 독서광이신 강준민목사를 떠올리는 대목이었다. 그의 목회는 어찌보면 '독서목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서생활에 대하여 오늘날 익숙한 이야기로 접근한 것이 맘에 들고 탁월하다.

그러나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난 속독을 하듯 1시간 남짓에 다 읽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독서하는 요령>이랄까 힌트랄까 그 부분을 염두하면서 빨리 읽어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이 책에서 아쉬웠던 책소개나 책에 대한 다양한 통찰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정회일의 멘토어이자 대한민국의 인문학 독서열풍을 일으킨다는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집어서 읽기 시작했다. # 서평을 쓰고 나서 오늘은 책 10여권을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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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 현대인이 잃어버린 안식의 참 의미를 말하다
아브라함 J. 헤셸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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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헤셀의 작품이다. 그는 마틴 부버의 제자이다. 글이 간결하다. 심오한 진리를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 10장으로 이루어졌다. 200쪽도 안되는 작은 분량속에 어떻게 이토록 심오한 시간과 공간과의 관계, 곧 안식일과 삶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끝부분으로 갈수록 감탄, '아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먼저 써야할지 모르겠다. 십계명얘기부터해보자.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라(아내, 물건, 생명 등) 그러나 너희는 안식일을 탐내라.> 이것이 십계명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탐낼 수 있는 것은 공간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시간안에 있는 영원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가고 변하는 것으로 아는데, 정작은 공간이 시간속에서 흘러가고 변하는 것이다. 공간은 소유하는 것이며, 시간은 공유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차지하는 공간은 있으나, 시간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안에 있는 영원성을 봐야 한다.


유대교와 성지를 연구한 이주섭박사가 유대의 율법주의 등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유대교의 탁월한 매력은 그들의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다. 안식일은 6일간을 거룩하게 하고 삶을 거룩하게 한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날이며,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일들(분노, 시기, 질투, 교만, 욕심, 경쟁, 근심, 걱정, 슬픔)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쉬는 날이며, 하나님이 일하는 날이다. 


창세기에 6일 동안의 창조들은 '좋았지만'(good), 7일째의 안식일은 '거룩하게 하셨다.'(holy) 창세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는 오로지 안식일에만 사용되었다. 6일은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고, 7일째는 안식한다. 안식은 세상 삶의 수단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목적이다. 하나님은 7일째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안식, 쉼, 평화'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일이 없이는, 쉼(영혼의 소생함)이 없이는 나머지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준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


* 참고로 이 책은 '안식'에 대하여 현대 영성가들이 논하는 것의 원조이다. 헨리 나우엔, 미르바 던, 유진 피터슨 등의 안식에 관한 이해를 보라, 그 모든 원천과 영감이 아브라함 헤셀의 이 책 <안식>속에 들어있다. 정말 탁월하고 놀라운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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