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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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말하고 싶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있으나 듣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현악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명통이다. 공명통은 텅 비어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행복하려면 경청하는 사람을 만나야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이 한 개, 귀가 두 개인 이유를 깊이 묵상해 볼 일이다. '두 번 듣고 한 번 말해야 한다.' 


이청득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 사람을 얻을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오늘날 지혜로운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현악기에 공명통이 있어야 하듯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도 공명통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공명통이란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감정을 내려놓고, 온 몸으로 상대방의 얘기에 집중하고 반응하고 화답해주는 '마음의 공명통'을 말한다. 누군가 경청할 때, 그 대화나 만남은 더욱 깊어지고 통찰력의 샘이 솟아난다. 


들을 聽자는 왕의 귀로 듣고, 열 개의 눈으로 주목하고,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癌자는 하고 싶은 말이 깊은 산속에 둘러싸여 막혀 있으면, 소통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되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청(이토벤)이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장애가 있지만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는 아들 이현을 위해서 바이올린을 손수 제작하고자 한다. 이토벤. 그 이름은 베토벤을 지칭하는 좋은 뜻이긴 하지만 처음에 이토벤은 자기 생각과 일에 쫓겨서 가족과 회사원들의 얘기를 무시하는 귀머거리(듣지 않는 사람)였다. 그는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음을 비우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가 무임으로 자신이 한 때 일했던 악기만드는 회사에 들어가서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법을 배우러 간다. 그가 속한 3팀은 외인구단이다. 재주는 있으나 매우 거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토벤이 '경청의 사역'을 한 다음부터 팀 분위기는 바뀌게 되었고, 결국 회사까지 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경청>은 이야기 식으로 전개된다. 경청을 현악기의 공명통에 비유한 것은 흥미롭다. 경청을 통하여 한 가정이 살아나고, 한 회사가 살아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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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전쟁
딘 셔만 지음, 이상신 옮김 / 예수전도단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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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추천받았을 때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요즘처럼 허접하고 두서 없는 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구나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재미있고 글이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룩한 영역에서싸우지 않으면 세속적인 영역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와 싸우지 않으면 그 대신 사람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97쪽)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 책을 통하여 사탄이 어디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왜 기도가 중요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가 달라졌다.

 

이 책에서 깜짝 놀랐던 부분은 워치만 니의 <죄참행>(Sit, Walk, Stand)라는 책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1.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 우편에 '앉았다.' (하늘 나라 시민권자), 2.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3.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강하게 선다.

 

* 사탄이 활동하는 세 장소는 생각, 마음, 혀이다.

1. 생각의 문에 보초를 세우라. 날마다 양치를 하듯이 생각을 씻어라. 2. 마음의 염려와 두려움은 신앙과 함께 없다. 교만버리고 자신을 낮추어라.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두려움을 버려라. 이것을 기억하라. 총을 엉뚱한 곳에 겨누지 말라.

3. 혀의 권세, 말의 힘을 알지 않는가? 말의 힘을 회복하라. 창조적인데 사용하라.

 

* 영적으로 강해지는

1. 하나님과 열린 대화, 친밀한 대화,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라. #기도

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성경묵상하기

3. 교제는 우리를 강하게 한다. 개방성과 솔직함.

 

신앙이 밋밋해진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중보적인 기도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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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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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는 놀랍게도 뚜껑을 열어보니, 신정론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모두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C.S. 루이스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신학적 논쟁을 원치 않아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본인의 잘못임을 인정하다. 자유의지는 설명이 쉽지 않으며, 창조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창조설화로 본다. 신화란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루이스를 좋아하면서도 이런 면에서 의아해 한다. 나는 루이스의 진솔한 이성적 추론을 재미있기게 읽는다. 루이스는 놀랍게도 개혁교회의 핵심 교리인 전적 타락에 대하여 루이스는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어떻게 믿음의 접촉점이 있느냐 하고 반문한다.

 

창조와 타락, 자유의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다.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에는 악의 잠재성이 있다. 그러나 악이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제2의 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쳐지고, 하나님의 주권은 약화될 소지가 있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고통이 유래함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설명하는 부분이 탁월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한다.자기 자신이어서가 아니라 선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좋은 선이 있었다면, 자신을 포기하고 그것을 사랑했을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다른 최고의 선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그 선을 추구했을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을 얻는 길이다. 씨앗도 살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인간의 타락과 함께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다룬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우리가 얼굴을 알 때까지> 등에서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다루는데,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이해를 정리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그 작업을 해 놓았다. <천국 상상하기: C.S.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규원, 웨인 마틴데일)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즐기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죄인은 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은 돌이키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한다. 아니 스스로 저들은 심판의 길을 택한다. 이 문제는 <지옥과 천국의 이혼>에서도 나타난다. 이 인용문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루이스는 영문학자다. 신화에 전통하다. 그는 어거스틴의 원죄론, 아벨라르의 대속의 만족설이나 보상설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짐짓 소신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매력이 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진술에 있어서, 먼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으로 심판받는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고통의 문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단순히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론, 인간론, 구원론, 그리고 지옥과 천국 등의 주제를 변증적으로 다루는 평신도 신학서적이다. 신학, 영문학, 신화학에 정통한 평신도 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주제가 흥미롭지만, 무겁고 논리적이어서 따라가기 힘들어서 다시 꼭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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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행참 - 앉으라, 행하라, 서라
워치만 니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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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ur position in Christ - "SIT"(Eph. 2:6) 함께 앉았다. 주님의 구원사역의 완성하셨다. "다 이루었다!" "다 지불하셨다!"
  • Our life in the World - "Walk"(Eph. 4: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아버지의 온전하시고 거룩하심을 본받으라, 시간을 아끼라.
  • Our Attitude to the Enemy - "Stand"(Eph.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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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엘리아데 - 종교와 신화 살림지식총서 40
정진홍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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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헝가리 사람이다(?) 그는 문학가로 고국에서 알려져 있고 종교학자이다. 한국의 종교학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엘리아데는 신화, 상상과 인식의 긴장, 새 인간성의 도래, 인간의 변혁을 꿈꾸었다. 모든 제의와 신화는 공간과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역치'라는 말이 있다. 시간을 구분하고(주일, 설날), 공간을 구분하는 (예배) 것을 통해서 거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은 속의 깊이이다. 성현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역사를 가진다. 


신화와 제의는 결국 인간의 삶을 변용하고 새로워지는 것을 추구한다. 달력이란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유래한다. 시간에 지배되지 않고 시간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종교학자는 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종교적인가?를 묻는다. 


그는 신칸트주의자 같다. 트뢸취가 말했듯이 그는 종교적 선험성을 주장하고 있다. 나중에 그는 비판을 받는다. 무슨 설교가나 문학가나 사회 계몽가이지 종교학자로서의 객관적 근거도 없고 학문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사실 학문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해도, 실제로 얼마나 허술하고 현실을 담을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엘리아데는 스스로 종교학자이면서 동시에 문학가이다. 그의 창작활동은 그에게 생명력을 주었고, 삶의 균형을 준 것이다. 


그의 종교학 저술들이 학문적이지 않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문학과 종교, 문화와 종교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종교와 목회,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긴장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종교적이다." "종교성은 인간의 창조성을 말한다." (종교를 인간이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닌 듯한데. 그래 종교가 인간의 투사라고 규정하지는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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