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팀 켈러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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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감히 21세기 최고의 소책자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아의 문제'에 대한 복음적인 답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님은 참으로 이 시대가 주목할 만한 목회자이자 선생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수를 현대인에게 적절하게, 그러나 전혀 복음의 희석시키거나 혼란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현대의 질병의 핵심은 너무나도 자기를 의식하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고, 공허하고, 분주한 자아에 있다. 이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존심의 문제를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 길이다. 물론 불교나 도교에서 무아(내가 없음), 초아(초월적 자아) 등을 일찍부터 말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떠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지고 않고도 어떻게 자아를 초월하며, 자아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고전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핵심을 교만(hybris)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문제의 핵심을 '낮은 자존감'으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자아가 너무 교만해서 문제라고 했다면, 현대는 자아가 너무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라고 정반대의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4장 7절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교만하지 말고, 자기 자랑하지 말라."(No pride, no boasting).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분쟁의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칭찬을 의식하지 않으며, 심지어 나 자신도 나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새로운 자아 이해를 가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흥미롭게도 자아에 대하여 이렇게 진단한다. 발이 아프지 않다면, 길을 걸을 때에 발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걸을 때에 발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발이 아프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이 자아에 자꾸 신겅을 쓴다는 것은 '자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자아는 어떤 문제를 가졌는가? 네 가지 문제가 있다.

1. 자아는 공허하다.

2. 자아는 고통스럽다. 마치 빵빵하게 늘어난 풍선처럼, 빵빵하게 불어난 배처럼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3. 자아는 점차로 분주하고 바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주목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비교하는 가운데 우쭐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다.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을 오가는데 이 두 가지는 한 형제이다.

4. 마지막으로, 자아는 상처받기 쉽다. 풍성이 빵빵하게 커져 있으면 터지기 쉽상이듯이, 교만과 우월을 오가는 풍선과 같은 자아는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이처럼 자아는 empty, painful, busy, and fragile하다. 공허하고, 고통스럽고, 공허를 채우기에 분주하고, 상처받기 쉽다.

 

저자는 해답으로 새로운 차원의 해답을 제시한다. 복음적 겸손이다.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며, 주님의 판결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을 의식하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을 재판장에 서는 것으로 비유한다. 우리는 날마다 수없이 자신을 재판장에 세운다: 사람들의 비판과 칭찬, 자기 자신의 성찰과 고민 등. 그러나 저자는 복음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누리는 <무죄 선언>이다. (무죄선언은 로마서의 주제이다.)

 

복음적인 겸손(gospel-humility)은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또는 겸손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적인 겸손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자기 망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마치 발이 건강한 사람은 걸을 때에 발을 의식하지 않듯이, 복음안에서 변화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판에 괴로워하지 않고, 자아가 상처받지 않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떻게 놀라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가? 무신론자, 불교도, 이슬람교는 선행이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무죄선언이 그 사람을 새로운 삶으로 이끈다. In Christianity, the verdict leads to performance. It is not the performance that leads to the verdict.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막1:11) 하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난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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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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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은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과 청년시절에 읽어야 제 맛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하는 개의 심정으로, 문학서적을 손에 잡고는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도 아직 감수성이 실아 있음을 느꼈다. 어쩜, <노인과 바다> 이 책은 지금 더 내게 풍성한 의미를 준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으로(1952년), 이 작품으로 퓨리쳐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등장인물은 노인 산티아고, 소년 마놀린, 그리고 바다와 물고기들과 새들 정도이다. 어쩜,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등장인물로 큰 상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에는 무슨 특별한 것이 있단 말인가. 그저 짧다는 이유로, 유명하다는 이유로, 부담없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문학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이다. 내 마음에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자각이 일어나고, 내 실존이 보였고,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인은 한 물 간 어부가 되었다. 왕년엔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한다. 이것은 한 때 유명했으나 이제는 글을 쓰는 영감이 떨어져서 퇴물이 되어가는 헤밍웨이 자신의 상황이었으리라. 노인은 '큰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바다에 나간다. 소년 마놀린는 이 노인을 '최고의 어부'라고 존경하고 따른다. 노인은 겸양하며 훌륭한 어부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은 분명히 말한다. "최고의 어부는 할아버지예요." "오직 당신 밖에 없어요." (There is only you.) 와~ 이런 말을 해주는 그 누군가가 우리는 필요하다.

 

노인은 홀로 바다에 나갔다. 어떤 이는 바다를 경쟁자, 적대자(스페인어: el mar)로 보지만, 노인은 바다를 애인(스페인어: la mar)으로 본다. 바다에서 나온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바다는 인생을, 우리의 직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이 책은 더욱 흥미로워졌다. 홀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노인은 홀로 대화하고, 군함새와 대화하고, 바다와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다 색깔, 노인의 내면의 심정 등이 재미있다.

 

마침내 큰 물고기를 잡았다! 노인은 3일간이나 이 큰 물고기와 싸움을 한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 순간 순간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면서 3일간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다. 큰 물고기와 대화를 한다. "너를 존중한다. 너를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잡아야 한다." 이 큰 물고기는 작가에게는 글쓰기 소재나 파토스일 것이고, 사업가에게는 대박을 말할 것이고, 개인의 한 인생에서 위대한 업적을 말할 것이다. 그런 '큰 물고기'를 만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설령 큰 물고기가 걸렸다고 해도, 그 큰 물고기와 씨름해서 낚아 올리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는 노인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큰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과정은 현재의 고단한 삶의 긴장을 풀어내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한다.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노인은 마음을 지키고, 생선회를 먹으면서 몸의 건강을 유지하고, 낚시 줄을 붙잡느라고 쥐가 나고 피가 나는 몸을 잘 추스리며 사투를 벌여야 했다. 마침내, 큰 물고기를 잡았다. 큰 물고기는 고깃배보다 더 크다. 18피트(약 6미터). 그렇다. 인간이 이루는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자기 보다 큰 물고기를 잡아올리는 것과 같다. 인간은 위대하다. 노인은 상상도 못한 대어에 희열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이제 쿠바의 하바나 항구로 돌아가야 한다. 인생의 정점이 있으면 내려놀 때가 있다. 큰 물고기를 배에 묶고 가는데 상어들이 피냄새를 맡고 계속 공격해온다. 공격해오는 상어들과 싸움을 또 벌인다. 이제는 잡은 큰 물고기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항구에 돌아왔을 때는 큰 물고기의 머리와 꼬리 그리고 뼈밖에 남지 않았다. 허무하게 큰 물고기를 보존해서 오지 못했다. 그저 이 노인의 영웅적인 이야기만 막연하게 회자될 뿐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재미있던 부분은 바다를 대하는 노인의 태도(인생과 자기 일을 대하는 개인의 자세), 그리고 노인의 독백들, 큰 물고기와 노인의 팽팽한 긴장관계 등이다. 정말 현실은 큰 물고기를 잡은 노인처럼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큰 물고기에 끌려가는 것인지, 큰 물고기를 잡고 가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또 큰 물고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큰 물고기를 잘 지켜서 항구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항구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생이다.

 

나에게 큰 물고기는 무엇일까? 이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결단력, 판단력, 기다림의 인내, 체력, 정신력, 노련한 기술, 지치지 않는 불굴의 용기 등이 필요하리라. 나에게 있어서 그 큰 물고기는 생명, 소명,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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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동서문화사 월드북 33
키에르케고르 지음, 강성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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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기독교 사상사>에서 틸리히는 우리가 읽어야할 키에르케고어의 책 가운데 2권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불안의 개념>(1844)과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다. <불안의 개념>을 읽으면서,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가 얼마나 키에르케고어에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불안의 개념>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한다. 1-2장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논박으로 썼기 때문에 아주 난해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무한한 자유로 인하여 인간은 불안하여 죄를 짓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무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의 개념>은 5장으로 되어 있는데, 다행히 5장은 짧다. 5장에 모든 엑기스가 담겨 있다.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가 아니라, 구원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방법은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불안에는 유한성에 대한 불안과 무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유한성의 불안이 무한성의 불안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다. 유한성의 불안이란, 인간의 의식주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이다. 취직, 결혼, 집이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에 대한 염려이다. 무한성의 불안은, 하나님 앞에서의 불안이다.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에 대한 유한성의 문제보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느냐 하는 '무한성의 불안'이 더 큰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한성의 불안'을 해결한 사람은, '유한성의 불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한성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나? 그것은 우울증 약으로 해결되지 않고, 자살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되는가? 이 불안의 습격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불안은, 그 어떤 대심문관 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샅샅이 찾아낸다. 그 어떤 비밀요원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내면을 뒤져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찾아내어 불안하게 만든다. 그 어떤 판사도 불안 만큼 완전하게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불안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있는 유한성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다시 말해서, 은행의 잔고, 세상의 명예, 육체적인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불안은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다른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썩은 밧줄'로 우리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고발한다.

 

그럼, 이 원수와 같이 철저히 우리의 내면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안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그 방법은 불안을 도피하지 말고, 환영하는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위하여 독배를 마시듯이, 불안을 받아들여라.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시면서 의연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시듯이, 의연하게 불안을 받아들여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의사에게 "자, 준비 되었어요. 잘 해주세요."라고 말하듯이, 불안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불안이 할 일을 다 하도록 자신을 열어두어라.

 

역설적으로, 불안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파멸로 몰아내지만,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된 사람은 불안을 환영한다.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는 사람은, 불안이 우리 내면에서 빼앗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들 - 기쁨, 평안, 감사, 사랑의 능력 등-을 모두 돌려받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의 완전한 제자가 되느냐? 그 불안을 구원의 징검다리로 사용하라.

그 불안 앞에서 우리가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한하신 존재,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어떻게 그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를 바라보라. 불안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만 해결된다. 하나님 안에서 불안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시종꾼이 된다.

 

* 임춘갑, 임규정 등의 번역에, <구원>Salvation의 징검다리로 마지막 줄을 번역했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대속>Atonement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 구원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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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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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성경 옆에 두고 있는 고전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는가를 말이 아닌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발장> 단권으로 된 책을 읽었을 것이다. 흔히 생략하지 않고 읽으면 시간이 많이 들고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만은 축소판이 아닌 다 번역된 것을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레미제라블>은 번역하면 '너 참 불쌍타'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책은 5권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사람이름이 책의 주제이다. 1권 팡틴(코제트의 엄마), 2권 코제트, 3권 마리우스, 4권 생드니, 5권 장발장이다.

 

1권의 첫부분은 <미리엘 신부>이야기가 나온다. 원본으로는 82쪽, 번역본으로는 150쪽 정도나 된다. 미리엘 신부는 바로 장발장이 변모하게될 모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아주 재미있다. 미리엘 신부는 참 인간상,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장발장을 읽을 때, 장발장의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아두자. 마들렌 시장, 윌팀 포슐르방, 르블랑, 위르뱅 파브르 등이다.

 

1권 <팡틴>에는 감동적이고 묵상할 만한 명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1. 은촛대 이야기, 굴뚝소년 이야기: 죄수번호 24601, 장발장이 은혜를 깨닫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장발장을 흉악한 죄인이나 위험한 존재로 보았으나, 미리엘은 장발장을 사람으로, 아니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인정하고 존귀하게 대우해주었다. 우리도 사람들을 볼 때, 나의 편협한 시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보고, 타인을 볼 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을까?

 

2. 미혼모 팡틴이 코제트를 위해서 어떻게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하는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죽기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했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아름다운 머리를 잘라서 딸을 위해서 보내준다든지, 딸에게 필요한 돈을 보내기 위해서 멀쩡하고 건강한 앞니 2개를 빼느라고 갑자기 알아볼 수 없는 늙은 처녀처럼 보이게 되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련하다.

 

3. 1권에서 뽑을 만한 명장면은 샹마티 사건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을 잡으려고 마들렌 시장을 의심하고 있을 때, 장발장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사람은 샹마티라는 사람이다. 같이 감옥에서 죄수생활을 했다는 3명의 증인들도 이미 샹마티를 장발장이 맞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들렌 시장은 가만히만 있으면, 자기 대신 감옥에 갈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마들렌 시장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애매한 사람이 대신에 감옥에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를 합리화한다. 샹마티라는 사람은 어짜피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니다. 그런데 마들렌 시장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중단될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 관한 묘사가 원본으로 50쪽씩이나, 번역본으로 80쪽 이상이나 기술하고 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생생한지. 양심과 영혼을 쉽게 팔아버리는 이 시대에 참다운 삶,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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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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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문체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수없이 문장을 교정하는 글쓰기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문체를 hard boiled하드 보일드 - 즉, 깊이 우려내어서 액기스만을 기록하는 방법- 문체라고 한다. 헤밍웨이의 글을 늘 읽고 싶었다. 헤밍웨이는 실존주의 문학가이다. 1929년에 발표한 <무기여 잘 있거라>는 헤밍웨이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말이 맞다. 배경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지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인 설명은 일체 배제한다. 단지 전쟁이 벌어졌을 뿐이고, 왜 싸우는지 모르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분명한 것은 전쟁을 본인들이 일으키지 않았는데, 그 벌어진 전쟁에서 전우를 읽고 몸에 부상을 당하는 등 불합리하고 부조리함을 경험한다. 헤밍웨이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대한 묘사, 사람들의 일상의 이야기, 사랑이야기 등 <거대 담론>에서 잃어버린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미국인 장교 헨리는 이탈리아에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하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군인이 되었다. 앰블런스 운전을 한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밀란으로 호송되어 병원에서 영국인 간호사 캐서린 버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전에 헨리는 삶의 무의미를 느끼고 알콜중독과 여성편력에 빠졌던 사람이었으나, 사랑을 하면서 삶의 의미, 책임과 결단, 헌신을 알게 된다. 전쟁중에 병실에서, 또는 집이 아닌 호텔에서 나누는 헨리와 캐서린 간의 사랑의 대화는 참으로 평화롭고 달콤하다. 특히 스위스로 도주하여서 호텔에서 신혼을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전쟁의 고통이나 고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쫒느니라."

 

사랑은 질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고 확증해주는 그런 대화이다. 버클리는 헨리에게 질문한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 적 있나요?" "다른 여자와 잠잔 적이 있나요?"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 적이 있나요?"

헨리는  모두 "없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거짓말지이요?"라는 질문에 "그래요."라고 인정한다. 버클리는 계속 거짓말을 해달라고 캐서린은 요청한다.

"나 말고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계속해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헨리) "당신은 사랑스러워" (캐서린) "별로 잖아요."

(헨리) "아니야 사랑스러워." (캐서린) "이제 저는 더 이상 제가 아니예요. 당신이 원하는 게 저도 원하는 거예요.(저를 가지세요.)" 감미로운 대화가 이어진다.

 

헤밍웨이는 전쟁의 무상함에 초점을 두면서도,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전쟁이라는 삶의 현실이 주어진다. 그 속에서 헨리와 캐서린은 사랑을 통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나가야만 한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현실을 탓하며 보낼 수는 없다. 헨리와 캐서린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탈영한 헨리는 11월의 추운 태풍이 몰아치는 날, 호텔에서 배를 타고 도주하여 스위스로 도주한다. 임신한 캐서린과 단 둘이 밤새 노를 저어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둘은 마냥 행복했다. 비를 동반한 태풍이 친다는 것은 하나의 암시였다. 스위스에서 행복한 일상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출산할 때가 되어 제왕절개를 하다가 캐서린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을 줄 알았다면, 몇 글자라도 편지를 남겨두었을 걸' 아쉬워하면서 캐서린은 죽는다. 헨리는 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전쟁도, 죽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소설에서 삶은 무엇인가? 종교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들을 하고 있다. 단순한 내용을 곱씹어 볼수록, 우리의 삶의 실존은 <전쟁>과 같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삶의 부조리앞에서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일상의 생활의 즐거움과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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