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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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이다. 여기에서 '노인'이라는 단어는 단어 그대로 '늙은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를 의미하며, 더이상 현실은 지혜로운 노인이 가진 세계관처럼 평화롭고 예측가능하게 흘러가지 않는 변화된 세상의 이치를 담담하게 표현한다. 2005년 코맥 매카시의 동명의 원작과 2007년 이를 영화화한 코엔형제의 동명의 영화에서는 폭력과 살인이라는 극단적 비합법성 도구를 통해 이러한 비예측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젊은의 나라'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하지만,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이미 '젊음의 나라'속에는 '젊은이' 보다는 '노인'이 많은 나라이고, '노인'들의 영향력 또한 무조건적으로 무시 되지는 않는 공간이다. 작가는 '젊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우리는 다르게 불리운다. 그리고, 그 호칭은 누군가를 [특정하여 지칭하는 수단] 뿐 아니라, [능력을 대변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젊은이'보다 '노인'이 많은 나라. 사회 구성원 중 주류가 누구인지, 어떤 세대인지에 따라서 사회는 많은 것이 달라짐을 보여 준다.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이 많은 나라에서 그 '노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금을 부담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젊음'의 시절에 지금의 '젊은이'들이 터를 잡을 수 있도록 노동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알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젊음은 돌고 돈다. 그리고, '생물학적인 젊음'은 노화 될 지 언정 '인지적인 젊음(마음만은 젊은이라고!)'은 영원하다. 아마 작가는 어떤 의미로든 젊음이 있는(있어야 하는) 나라를 얘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빠르게 변화하는 적자생존/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뒤쳐짐없이 조화롭고 활기차게 살기 위해서는 '젊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갈수록 침체되고 살기 팍팍해지는 미래에 우리 모두가 현명하게 살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다만, 세대간, 빈부격차, 다문화가정 등 현대사회에 만연한 갈등 들에 대한 조금 더 깊이있는 이해와 담론들을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과 혹은 너무 많은 갈등을 한번에 버무리려다 뭔가 주워담지 못한 듯한 찝찝함이 아쉽다. 어쨌든 손원평 작가님의 소설을 미리 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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