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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붕대 감기>는 고등학생 때 만나 사십 대인 지금까지 붕대처럼 감아진 상태로, 그래서 언제 풀릴지 모르는 관계를 이어오는 진경과 세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관계가 그려지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우리’라는 말의 무게에 대하여 재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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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세연, 윤슬, 효령, 형은, 채이, 경혜, 은정, 지현, 혜미 등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목소리 중에서도 나는 짧지만 울림이 있었던 지현의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지현의 혜미의 미용실에서 일하는 헤어 디자이너로, 아들이 쓰러져 의식불명인 상태의 손님 은정의 이야기를 혜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지현은 언젠가 은정과 은정의 아들이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왔을 때, 은정의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도 아무런 수습을 하지 않는 은정을 혼자 욕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는 미용실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서 은정은 미용실에 들렀고, 지현은 은정의 이야기를 알게 되며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참회한다.
또 지현은 가정 안에서는 부모님께 오빠와 차별을 받고, 친구의 입장에서는 불법촬영 피해자인 친구 미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 죄책감을 느껴 집회에 나가고 운동에 동참하면서도, 동시에 탈코르셋 운동과 자신의 직업이 꾸밈노동인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사실 지현의 고민들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현의 목소리가, 목소리에 담긴 고민들이 나의 현재와 비슷해서 울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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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파를 나누어 논쟁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향하는 목표가 달라서 멀어진 사이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책은 어떤 상황인가, 라는 현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라는 미래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어 좋았다. 특히, 이 책은 사회 속 개인을 주시하는 소설이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이야기를 다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 아니 사이라기보다는 틈에 집중한 소설 같았다. 두 사람 이상의 관계성, 관계 사이에 벌어진 틈에 주목하는데, 이 모든 것이 페미니즘으로, 연대로 묶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특히 같은 세대의 여성들의 틈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의 여성들의 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서 넓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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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라는 말을 좋아했었다. 어떤 공동체에, 집단에 소속된 것 같은 그 느낌과 누군가의 경계 안에 속해있다는 친밀함이 다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라는 호명이 누군가에게 구분 짓기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그 해석이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심했지만, 여전히 친한 사람들의 이름 앞에는 ‘우리’라는 말이 자주 자리하곤 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전화번호부에 있는 ‘우리’라는 말을 모조리 지웠다. 한없이 다정했던 단어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져서였다. 여전히 ‘우리’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자주 사용하진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럼에도 ‘우리’라는 말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붕대처럼 서로의 아픈 마음을 감싸는 아량이 생기는 그날까지 소설 속의 많은 문장들을, 메시지를 새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