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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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일본 패망 이후, 미 군정이 들어온 시대에 저명한 윤 박 교수가 살해된다. 범인은 마리화나에 취한 미군으로, 미군 내부에서는 친정권 인사인 윤박교수를 살해한 미군에 대한 이미지 실추를 고려해 세 명의 무고한 여성 용의자들에게 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 종로경찰서에서 검안의로 일하고 있으며, 비밀리에 ‘세 개의 달’이라는 이름의 탐정 일을 병행하고 있는 가성과 가성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부 기자 출신의 운서는 윤 박교수 살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 윤박 교수가 살해된 날, 살해된 장소에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목격된 세 명의 무고한 여성을 위해서. ‘모던조선’의 편집자인 선주혜와 한때는 식모였고, 술집 여성이었으며, 지금은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윤선자와 윤박 교수의 조교이자 신인소설가인 ‘현초의’까지. 그렇게 세 여성의 관계를 추적해 나가며, 가성과 운서는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윤 박 교수에게 잠자리를 요구받았던 ‘선주혜’와 술집 여성이었던 과거를 빌미로 협박을 받아 지속적인 성관계를 요구받았던 ‘윤선자’, 자신의 작업물과 생각까지 모조리 윤박교수에게 강탈당했던 ‘현초의’. 그리고, 그 모든 협박과 강탈적 요구가 이어지던 호텔 포엠의 사장 에리카까지. 태양이 오로지 혼자만 빛을 발하며, 주위 모든 것을 뜨겁게 태우는 시간이 지나고, 넉넉한 마음으로 태양의 빛을 반사해 끊임없이 우리의 주위를 도는 달의 시간. 모든 것을 창조했지만, 마귀가 되어버린 마고들의 사랑이야기는 조금은 더디고, 무용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어진 마음의 연쇄가 오래 기억되며 낙관하는 미래로 나아간다.
🔖여기가 뭐라고 사람을 금지해? 이러다 어린애도, 노인도, 개도 다 금지당하는 황당한 세상이 오겠어. -91쪽
🔖저렇게 빛나는 태양도 수많은 별 중 하나인 것 처럼, 우리 또한 우주에 흩어진 많은 것 중 하나이겠지만 달은 지구의 주위만 도는 것처럼, 그래도 나에게 유일한 지구는, 유일한 달은 너, 운서라고 말이다. -88쪽
🔖하지만 저 꽃은 언젠가 다시 피어나고 이 빛이 사라지면 나는 너에게 가리라. 어디선가 떠오른 낮달이 가성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187쪽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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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에서는 셜록이 사라진 세계에서 기록과 기억을 이어나가는 왓슨들의 이야기를 한다. ‘마고’에서는 가성이라는 인물이 추리를 하는 셜록의 이야기로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하지만 마고의 추리는 범인과 살해 동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아니다. 관계 속에 숨겨진 사랑과 낙관을 추리한다. 작가인 한정현의 세계 속에는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고 연대하게 되는 관계가 반드시 등장한다. 한주와 유키노, 설영과 신바, 가성과 운서, 에리카와 초희.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고 연대하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만들어 낸 듯 하지만 실은 외롭지 않게 살아가라는 운명의 장치가 아닐까? 인간에게는 외롭지 않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 어떤 사회, 법률, 신념, 가치, 이익도 사람의 위에 설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자꾸만 외롭게 만드는 모든 것에 벗어나 그저 낙관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환대할 때 낙관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한정현 작가의 소설 속 세계는 과거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는 낙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한정현의 세계에는 그 누구도 잊히지 않는다.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외롭지 않게 기억되고 기록된다. 그리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역사가 어떻게 현재와 이어지는가 하는 의문은 한정현의 소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기억하고, 낙관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가성으로, 운서로, 에리카로, 초희로, 송화로 현재를 살아간다. 역사는 기억됨으로써 현재와 이어지고, 낙관함으로써 희망으로 나아간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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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작가님의 책 중 가장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추천해준다면? 이라는 질문이 나에게 온다면 처음 입문작은 ‘마고’로 하시라 추천하고 싶다. 연대하는 인물들, 소외된 사람들, 희미해진 역사에 빛을 비추는 기록물로서의 가치, 낙관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재미와 감동까지. 뭐하나 놓치지 않은 훌륭한 작품이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한정현 작가님 적게 일하고 많이 버셨으면 좋겠는데, 한편으로는 많이 일하셔야 내가 행복할 것 같은 역설로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한다. 대신 작가님 일하시는 동안 많이 버실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현대문학으로부터 서포터즈 자격으로 ‘마고’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