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장면이 도발적이다. 여자의 시체는 간신히 끌려나가 산속에 버려진다. 스릴러 혹은 공포 영화의 도입부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첫 장면이다. 범죄 물의 도입부라면 냉혹한 킬러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머저리들이 나오겠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반응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조롭다. 사이코패스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의 반응은 굉장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소설의 줄거리를 통해서 이 소설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사가 휭휭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살을 꿈꾸며 그룹을 이룬다. 첫 장면의 강렬함은 이러한 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천희란 작가는 이러한 종말의 상황을 잘 풀어낸다. 이유 없는 죽음의 시작으로 세계는 초토화되고 만성적인 우울함에 시달린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우울함은 취향이 아니다. 문장과 문단은 묵독해야만 하고 소설 속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반드시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상실의 상태에 있다. 구병모 작가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가였다. 둘의 차이점은 구병모 작가가 SF와 같은 장르 문학에 한 발짝 다가선다면 천희란 작가는 세계관이 줄 수 있는 절망, 우울감을 표상하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자살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외딴 산장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며 흔히 다뤄지는 서사다. 이 소설이 특유의 분위기를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삶과 죽음 중에서 삶을 완전히 차단하는 세계관의 존재다. 삶이 완전히 의미를 잃는 세계 속에서 절망은 더 깊은 절망의 층위에 도달하고 어떠한 대안도 희망도 읽을 수 없는 서사는 완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성의 없이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에 그들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그 이야기에 어떠한 인간적인 면모도 없는 이유는 삶 혹은 희망에 대한 모든 요소를 차단하는 세계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