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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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백수린이랄까. 고풍스러운 표지에 그에 어울리는 아니, 그보다 더한 소설들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를 보고 우아한 문체를 구사한다고 찬사를 보내지만 그러한 문체뿐만 아니라 작가가 구상하는 인물 간의 섬세한 관계가 문체와 시너지를 일으켜 백수린 다움을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인물 관계를 섬세하게 그린 건 <여름의 빌라>, <폭설>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두 소설이 아닌 <고요한 사건>을 선택한 건 초반에 의문스러웠던 도입부가 소설 결말 부분에서 수습되고 전체적인 서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달동네에 이사 온 소녀, 그곳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설정은 우다영 작가의 <얼굴 없는 딸들>과도 비슷한 설정이지만 우다영 작가가 당시에 여성을 향해 자행하던 은밀한 폭력에 초점을 맞췄다면 백수린 작가는 자신의 장기인 지나간 시절에 관한 애상 당시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감정.’이라는 그만의 특징을 그린다. 거의 유일한 친구인 해지와 나중에는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는 남자애인 무호, 그리고 고양이 아저씨. 그들과 함께한 과거는 재개발되는 동네와 함께 그저 흐릿한 기억이 되고 만다. 다른 삶의 궤적이 잠시나마 겹쳤던 순간 백수린은 그런 순간을 너무나도 잘 그린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고양이 아저씨와 고양이를 묻어주는 결말을 상상했지만 그런 상상마저도 배신하고 결말은 눈을 쳐다보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결말의 진수는 마지막 장을 읽은 뒤 첫 장을 다시 펴봐야 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압축적인 수미상관이라니... 멋지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은 욕망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가부장제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은 터부로 취급되었지만 백수린은 그것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예전에도 한 번 읽어 보았던 책일 터인데 몇 년 만에 다시 읽으니 이런 지점에 더 눈에 보인다. <폭설>은 불륜한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편 직장의 외국인 동료와 사랑에 빠져서 어쩌구하는 내용인데. 일단 나는 불륜에 대해서 다루면 어떻게 쓰이든 간에 통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폭력, 살인, 성행위 이야기에 환장하는 종족들이다. 인터넷 뉴스 페이지만 봐서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성적인 것은 좀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상에 뉴스로는 잘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라오는 불륜 썰의 무시무시한 인기를 봤을 때 인간은 불륜썰을 너무 좋아한다.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무튼, 통속적이라면 통속적이지만,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이 소설집의 또다른 표제작이라고 할만하다. 다른 소설들도 여성의 욕망을 그려내지만, 욕망의 체화라고 할만큼 솔직한 이야기도 없었다. 엄마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변화하는 점도 특이하다. 십대 때는 상황에 불행해하다가 징그러워하고 마지막에는 이해 비슷한 것을 하는 것도 그렇다. 주머니에서 아름다운 구슬을 꺼내놓는 것 같은 백수린 작가 특유의 결말도 참 좋았다. 아기를 낳는 주인공은 이제 과거와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되는 순간에 남편에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는다. 이처럼 좋은 결말이라... 한 수 배우게 된달까.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가히 조용한 혁명이라고 칭해도 좋을 것이다. 백수린의 아름답고 단정한 문장에 집중하던 과거의 나는, 몇 년 사이에 백수린이 그려낸 인물들의 욕망에 집중하게 된다. 시간은 독자의 관점마저 변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의 변화가 참 기껍게 느껴진다. 독서의 무궁무진함을 증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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