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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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지라.... 리뷰를 쓰려다 '바라데기'의 작가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저자의 '할매'는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보통의 소설들이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한다면, 이 작품은 출발부터가 사람 이전의 세계이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남하해서, 어느 겨울 죽으면서 떨어뜨린 씨앗.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바람과 비와 흙과 벌레들의 도움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천천히 자라서 600년 거목이 되는 것! 이걸 소설의 기원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선했다. 


저자는 아예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몇몇 장면을 길게 끌고 간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내가 책을 잘 못 알고 있었던 건가 의아하기도 했고, 익숙치 않는 전개에 잠시 정신이 표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시도 자체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 사고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도 세계는 움직였고, 생명은 생겼다가 사라졌고, 시간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풀어나간 것이지. 저자의 노련함이 보이는 부분인 것 같았다. 생명의 시간 자체를 문학적 재료로 삼아 풀어나가는 것이, 예술가의 풀어내림 같았달까? 


이야기는 하제마을로 이어진다. 팽나무, 즉 '할매'는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지나간 모든 인간사를 다 보고 듣는다. 농민들의 싸움, 동학의 피비린내, 일본 식민지배, 전쟁과 현대화, 간척사업, 미군기지 논란... 이 모든 것이 나무의 시선에서 펼쳐지는데, 이 부분이 새롭게 느껴졌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인간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따라가는데, 나무의 시선으로 보니 모든 인간은 그저 한때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것이, 그러면서도 그 한때의 삶이 눈부시게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좋았던 건, 이 소설이 자연 예찬이나 생태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 감각과 사회 분석,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나무가 본 인간들의 욕망, 사랑, 폭력, 생존의 몸부림은 너무나 생생하다. 이것이 생태주의 소설이 아닌 사회적 소설임을 나타내는 지점이리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을 빌려 기술되다보니 문장 자체도 시간의 호흡이 길고 느긋한 측면이 있는데, 그 느긋함이 장중한 나이테 켜켜이 쌓인 느낌이 든다. 때로 어떤 문장들은 바람이 스쳐가듯 가볍게 흘러가기도 한다. 이 리듬을 따라가는 것도 묘한 재미가 있어 낭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시대의 폭풍을 견딘 나무를 바라보며 인간이란 존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저자에게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과거로부터 이어져 미래로 향하는 현재에서 지금의 인간 세대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결정된다는 메시지가 스며져 있는 것 같았다.  


#창비가제본리뷰 #광고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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