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정신분석
저스틴 A.프랭크 지음, 한승동 옮김 / 교양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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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후세인이 생포된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라크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악의 축(미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을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도 쉬웠건만 미국의 맘에 드는 사회로 재편하는 과정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미군은 후세인의 또 다른 대체물일 뿐, 결코 이라크 민중들을 해방시키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에서의 난국에 대해 미국은 말이 없다. 자국 군인들의 사망소식은 철저히 통제한 체 후세인 아들들의 처참한 주검은 여과 없이 공개하는 잔인함마저 발휘하고 있다. 아니, 잔인함은 이미 전쟁이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후세인 정권을 지원한 건 분명 미국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전쟁의 중심에는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가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미국 사회는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모되고 있는 듯하다. 자국의 정책에 반발하는 모든 세력은 적이 되어버린다. 이란, 북한 등등 지구상엔 그가 공격해야만 하는 악의 축이 너무도 많다. 늘어나는 군비에 반해 가난한 이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가난을 향한, 비백인들을 향한 그리고 비이성애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적의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20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 중 하나이다. 생의 초창기에 행해진 욕구의 불만족이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의 문제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그의 연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숱한 갈등마저도 다룰 수 있는 힘을 인류에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지독히 남근 중심적이며, 모든 문제를 과거에로의 회귀로부터 도출해낸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한 인간이 문제를 지니게 되는 점이 생의 초기, 즉 아이와 가장 먼저 관계를 맺게 되는 어머니, 즉 여성에게 전가되어버리는 그의 연구 결과는 여성들을 가정 안에 가두는 또 다른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연구는 충분히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은 충분히 과학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부시가 오늘날 보이고 있는 행동들을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부터 찾고 있다. 어머니는 아기 부시의 욕구를 해결하는데 실패했으며 그녀의 엄격한 태도는 부시에게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지게끔 하였다. 배가 고플 때 우유를 주는 착한 어머니와 자신의 울음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쁜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꽤나 어린 시절부터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서툰(?) 양육을 보완해줄 아버지의 존재 역시 완벽치 못했다. 자주 집을 비우고 가정 내에서는 말이 없던 아버지는 그에게 하나의 벽이었으며 넘어야만 하는 산맥이었다. 이런 환경에 어린 시절 경험한 여동생의 죽음까지 겹쳐지면서 그의 성격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상심감에 젖어 있는 어머니에게 그는 아무런 만족감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한 과잉행동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과잉행동은 오늘날에는 ADHD, 즉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로 진단,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이와 같은 진단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부시의 이와 같은 문제는 다루어질 수 없었다.
성공적인 아버지의 행보를 뒤따르려는 그의 노력은 실로 강박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는 아버지 보다 뛰어나지 못했으며, 적어도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버지를 대통령직으로부터 끌어내린 클린턴을 짓누르면서 그는 (자신이 판단했을 때) 아버지보다 나은 인물이 되는 첫 걸음을 걸었으며, 아버지의 적 후세인을 생포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보다 낫다는 자기안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난독증, 학습장애, 사디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애가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가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물론 장애는 장애일 뿐, 이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부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시의 지금까지의 행보는 이러한 장애로 인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구상엔 너무도 많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다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부시의 정신분석은 인간(?) 부시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부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전 지구적 문제가 아닐지 싶다. 미국은 이미, 부시가 등장하기 전부터 전 세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국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왔다. 부시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자국 중심주의가 세련되기 포장되지 못한 체 그대로 드러났다는 사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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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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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사상은 서로 다른 관점을 취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나. 경제학사를 통해 살펴보는 경제학은 생각보다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았다. 물론, 경제학에 대해 조금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가끔씩 두 눈을 부릅뜨고 책을 째려봐야 하는 적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런 내용이 이토록 쉽게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에 맞는 좋은 번역을 선보인 역자에게 감사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경제학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그리고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적 흐름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아담 스미스에서부터 공공선택학파의 뷰캐넌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시대적 흐름에 충실하고 있다. 각 경제학자들의 탄생과 가정 교육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다룬 후, 그들이 주창(?)한 경제학의 특징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경제학에서 다루고 있는 광범위한 용어를 자세한 예와 함께 이해하기 쉽도록 서술해놓았기 때문에 경제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각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에 대한 설명은 그 이론 다음에 왜 특정 이론이 도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제목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저자는 살아있는 경제학을 우리에게 선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각각의 사상이 그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력뿐만 아니라 현재에 가지는 의의까지 읽고 있노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정책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느 이론이나 그러하겠지만 경제학 역시도 특정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동시에 그 시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결코 죽은 이론으로만 머무를 수는 없는 학문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긴 하겠지만, 특히 경제학은 익숙치 않은 용어와 그래프만으로도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딱딱함 아닌 유쾌함으로 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난 참 행운아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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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갈무리 신서 32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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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학문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변혁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실천이라 부른다. 마르크시즘은 항상 그 실천의 흐름에 앞장서왔다.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마르크시즘은 그 생명력을 잃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면 여전히 이 사회를 바라보는 가장 뚜렷한 통찰력을 지닌 학문(?)으로서 나는 마르크시즘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이들이 그럴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학문적 사조 속에서 탄생한 책이 아닌가 싶다. 기존의 마르크시즘이 가지고 있던 한계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유일한 희망으로 존재하는 마르크시즘으로 다시금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저자의 발자취는 어떻게 보면 다소 모순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 주장으로 혹은 울며 겨자먹기로 되돌아섰다면 이 책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이라고 하는 화두를 통해 저자는 마르크시즘에 전혀 다른 색채를 입힌다. 노동자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세상이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부정함으로써 그는 마르크시즘을 배신한 듯 했다. 하지만 그에게 국가권력의 쟁취는 권력을 통한 또 다른 지배를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그것은 권력의 재생산일 뿐 해방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푸코의 사상을 바라보며 그 안에 해방의 가능성이 존재치 않음을 비판할 수 있었고, 안토니오 네그리의 한계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지배력 아닌 지향력을 꿈꾸며, 국가 권력을 장악치 않고 세계를 변혁하라고 외치는 저자. 그의 외침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전진했던 멕시코 사파티스타들은 국가 체제의 전복을 이야기하지 않았노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것은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분명 해방감을 맛보았다. 동시에 저자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망각하고 간과했던 물신주의를 다시금 마르크시즘의 핵심으로 복원했다. 계급 아닌 물신주의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야기했듯 단선적이고도 쉽지만은 않은 싸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주체는 결코 '그들'이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
그에게 국가는 타도의 대상일 수 없었다. 존재치 않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은 결국 우리 자신을 무너뜨릴 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수많은 기존 좌파들이 이야기했듯이 타도해야만 하는 실체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권력이 세상을 변혁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며, 더 나아가 권력의 쟁취 없이도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주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제 3자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집단적 번역 작업이라는 지금까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방법을 거쳐 우리 곁에 나타난 이 책은 어쩌면 그로 인해 풍부한 저자의 생각이 더욱 깊이 있게 번역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1년 넘게 교류하며 이 책을 탄생시킨 모든 이들에게 깊이 감사하며, 변혁을 부르짖는 어설픈 좌파인 나의 부족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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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갈무리 신서 32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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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학문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변혁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실천이라 부른다. 마르크시즘은 항상 그 실천의 흐름에 앞장서왔다.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마르크시즘은 그 생명력을 잃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면 여전히 이 사회를 바라보는 가장 뚜렷한 통찰력을 지닌 학문(?)으로서 나는 마르크시즘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이들이 그럴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학문적 사조 속에서 탄생한 책이 아닌가 싶다. 기존의 마르크시즘이 가지고 있던 한계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유일한 희망으로 존재하는 마르크시즘으로 다시금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저자의 발자취는 어떻게 보면 다소 모순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 주장으로 혹은 울며 겨자먹기로 되돌아섰다면 이 책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이라고 하는 화두를 통해 저자는 마르크시즘에 전혀 다른 색채를 입힌다. 노동자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세상이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부정함으로써 그는 마르크시즘을 배신한 듯 했다. 하지만 그에게 국가권력의 쟁취는 권력을 통한 또 다른 지배를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그것은 권력의 재생산일 뿐 해방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푸코의 사상을 바라보며 그 안에 해방의 가능성이 존재치 않음을 비판할 수 있었고, 안토니오 네그리의 한계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지배력 아닌 지향력을 꿈꾸며, 국가 권력을 장악치 않고 세계를 변혁하라고 외치는 저자. 그의 외침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전진했던 멕시코 사파티스타들은 국가 체제의 전복을 이야기하지 않았노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것은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분명 해방감을 맛보았다. 동시에 저자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망각하고 간과했던 물신주의를 다시금 마르크시즘의 핵심으로 복원했다. 계급 아닌 물신주의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야기했듯 단선적이고도 쉽지만은 않은 싸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주체는 결코 '그들'이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
그에게 국가는 타도의 대상일 수 없었다. 존재치 않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은 결국 우리 자신을 무너뜨릴 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수많은 기존 좌파들이 이야기했듯이 타도해야만 하는 실체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권력이 세상을 변혁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며, 더 나아가 권력의 쟁취 없이도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주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제 3자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집단적 번역 작업이라는 지금까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방법을 거쳐 우리 곁에 나타난 이 책은 어쩌면 그로 인해 풍부한 저자의 생각이 더욱 깊이 있게 번역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1년 넘게 교류하며 이 책을 탄생시킨 모든 이들에게 깊이 감사하며, 변혁을 부르짖는 어설픈 좌파인 나의 부족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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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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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중에는 팀 프로젝트가 참으로 많았었다. 보통은 함께 수강하는 동기들과 한 팀을 이루곤 했지만, 가끔씩은 교수님께서 일괄적으로 팀을 만들어주시기도 하셨다. 가끔씩은 새내기들과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겪었던 고충은 다름 아닌 레포트의 형식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어쩌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명시적으로 어떠한 합의도 하지 않은 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각자 부분별로 분담을 해서 자료를 조사하고 작성하고, 레포트를 작성한 후 마지막에 한 명이 통합하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많은 어려움들이 따르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괴로운 것은 다름 아닌 일괄성의 결여였다. 각자가 매긴 번호가 다르고, 각자의 문체가 다르고(심지어 레포트를 구어체로 써내는 사람도 있었다.), 참고문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인터넷 뒤지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자료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 이들도 있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기본이 없었다. 레포트를 처음 쓰던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은 나에게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레포트는 이렇게 쓰는 거다 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서관에 있는 논문들을 몇 개 접해보면서, 그렇게 하나하나 스스로 갖추어 나갔을 뿐이다. 졸업하기 전에 이 책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레포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논문 쓰는 기본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실정은 다르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대부분의 것들은 유럽적인 요소가 짙다. 나로서는 저자가 예를 들었던 수많은 참고사항들이 너무도 낯설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논문 잘 쓰는 방법에 눈 뜨고 싶은 것이지 유럽의 수많은 자료들을 검색하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단순한 방법론에 그치고 있지 않은 저자의 열정이다. 많은 이들이 물리적, 시간적 문제들을 들면서 정당방어를 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없어서, 집근처에 도서관이 없어서 등등. 하지만 저자는 그런 핑계들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인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그가 작성한 수많은 목록들은 읽는 이에게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인용카드와 연결카드, 독서카드까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지만 오랜 시간을 들인만큼 그의 카드들은 논문 작성을 위한 모든 기초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셀수 없이 많은 언어들에 익숙하며, 오랜 학문 경험은 그에게 자료정리 면에 있어서의 우위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게으름을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실력이 부족했음과 동시에 열정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학의 경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으레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 마냥 여겨지기 때문에 학문적 열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시험기간에 그저 밤샘 반짝 공부가 존재할 뿐이니 스스로 논문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학위논문들을 뒤적이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동시에 그는 실질적인 논문 작성법까지 이야기한다. 각주와 참고문헌을 다는 법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늘 헤깔리는 법이다. 예전같았으면 각주 하나 첨가하기 위해 일일이 원고를 다시 작성해야 했지만,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하는 요즘 시대에는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 예전과 같은 어려움으로부턴 탈피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초가 되는 형식을 알고 그 형식에 알맞은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물론 내용면에 있어서의 독창성, 훌륭함도 중요하겠지만, 어떠한 형식도 갖추어지지 않은 논문 속에 담긴 독창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필할 수 없는 죽은 진리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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