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옆 불이 켜졌다. 파란 드레스를 입고 찾아온 그녀는 소리 없이 내 곁에 누웠다. 내 앞에 놓인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똑…… 똑…… 한껏 느려진 빗방울 소리는 이제 숨을 세 번 쉬어도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네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들려오는 그것은 묘한 침묵과 떨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목선과 어깨와 그리고 얇은 팔과 허리까지 테를 두른 뒤 손짓을 멈췄다. 그녀가 내게 가까이 와 달콤한 향이 코 밑에까지 다가왔다.
“왜 항상 불을 꺼요?”
그녀가 물었다.
“다시 올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그냥 켜놓고 있으면 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켜놓고 있으면 왠지 달라질 것 같아서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녀가 웃었다.
“언제나 오는 걸 알고 있다면서요. 껐다 키면 눈이 시지 않아요?”
“그리 나쁘지 않아요. 새로운 것 같잖아요, 영화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듯이……. 켜진 데선 기다리는 게 지겨워질 것 같아요.”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가라앉은 속눈썹이 한밤의 침묵을 속삭이고 있었다.
“보여줄 게 있어요.”
나는 일어나 책상 위에 오려놓은 신문 광고를 집고 침대로 돌아왔다. 앉아있는 그녀에게 건넸다. 곧 그녀는 다 읽었는지 나에게 눈을 마주했다.
내가 물었다.
“전에 한번 이 말 꺼냈던 거 기억해요?”
“…….”
그녀는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저 웃고 지나가는 얘기처럼 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었어요.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만해요.”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땐 분명 좋겠다고 했잖아요. 달라진 건 없어요. 그 때 했던 말 그대로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 검은 구름의 바다가 있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모를 불빛에 부서진 물방울이 이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나의 귓전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멍멍한 침묵이 그녀의 입에 걸린 채 창과 나 사이를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말없이 창밖을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뭘 원하는 거예요?”
“당신이요. 당신이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이미 다 알잖아요.”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하네요.”
일순, 나는 말을 잃었다.
“말해 봐요, 마음속에 어떤 게 먼저인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아니면 이미 나라고, 얘기해줬기 때문에요?”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다른 어떤 게 중요하죠? 나라면서요. 말해 봐요. 왜 안다고 생각한 건지.”
“…….”
처음이었다. 그녀가 그녀 스스로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억울함이 치밀었다. 당신은 이러면 안 돼, 당신이 왜 이러는지 말해줘.
“왜인지 말해줄게요.”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창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러지 마요.”
“이러지 마요.”
그녀는 나와 동시에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건 중요치 않잖,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건 중요치 않잖,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혐오스럽도록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귀와 눈과 입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키스를 했다. 아니, 키스 한 줄 알았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파란 드레스자락이 물방울의 그림자를 또르르 흘리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공을 찼다. 헥헥거리던 아이들이 어느덧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갈 즈음엔 여느 때처럼 마지막으로 공을 맞는 아이가 공을 교실에 갖다놓는 규칙이 있었다. 멀리서 엉겁결에 공을 맞은 소년은 또 누가 가까이 있나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저기 도망가고 난 후였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의 술래가 자기가 되었음을 안 소년은 김빠지는 어깨와 걸음으로 수돗가로 가 얼굴을 씻었다. 심통이 나 퉁퉁거리며 공을 튀겨 반에 갖다놓고 학교 본관을 나왔다. 여름이어선지 아직도 햇살은 한가로운 오후인 듯이 홀로 남은 소년에게 샐쭉거리는 것이었다. 그에 소년은 아직 갈 때도 되지 않았는데 애들이 갔다며 모래바닥에 발끝을 찼다.
훅훅 찌는 더위에 후문계단을 올라가자니 지겨웠다. 소년은 계단 옆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의 울창한 그늘아래 잠시 앉기로 마음먹었다. 앉아서 미지근한 바람이 종아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 멀리서 퉁, 퉁, 거리는 공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아래 어딘가로 고개를 돌려다보니 여자아이가 있었다. 머리를 묶은 그녀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벽을 향해 공을 치고 있었다. 듣고만 있고 보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어느새 신발주머니도 놓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 신발주머니가 있나 확인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소년은 꿩이 바로 옆 오솔길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나뭇잎 새에서 내려오는 빛의 그물로 꿩의 깃털은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발길을 돌려 숨죽이고 꿩에게로 갔다. 완벽히 잡을 수 있겠다 싶어 미소 지었을 때 꿩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푸드덕대며 달리는 꿩을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따라 달렸다.
“야!”
소년은 여자애에게 소리쳤다. 여자애는 소년이 꿩을 뒤쫓는 것을 보고는 둘 다 코트가 있는 아래쪽으로 오고 있음을 알았다. 라켓을 바닥에 던지고 여자애도 뛰기 시작했다. 꿩이 달려올 오솔길을 따라 숲을 올라갔다. 꿩은 소년의 눈앞에서 잡힐 듯 그러나 잡히지 않았다. 여자애와 소년이 앞뒤로 거의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꿩은 왼쪽의 숲으로 튀어 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덤불 새로 숨어버렸다.
소년은 숨이 가득 찬 목구멍 너머로 안녕, 이라 말하고는 쭈그려 앉았다. 여자애도 난데없는 소동이 재밌었는지 배시시 웃고는 소년을 보며 서있었다. 소년이 연습 몇 시까지 하냐, 고 묻자 여자애는 7시라 대답했다. 소년은 헤, 지겹겠다며 내색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꿩이 어디로 사라졌나 숲을 둘러다 보았다. 소년도 여자애의 고갯짓을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다.”
“저기 있다.”
멀리서 고개를 우스꽝스레 움츠리는 꿩을 보고 동시에 두 아이가 말했다. 여자애가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빨주노초파남보! 하고는 소년의 팔을 꼬집었다. 동시에 같은 말을 하면 무지개의 일곱 색을 찾을 때까지 꼬집는 놀이었다. 소년은 얼른 찾기 위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하나하나 말했다. 앞의 나뭇잎 위에 있던 무당벌레를 가리키며 빨강, 그 옆 다른 무당벌레는 주황, 그리고 저기 테니스코트 노랑, 여기 또 풀 초록, 그리고……. 에, 잠깐만. 남색은 너 지금 입고 있는 옷, 보라색은 너 신발. 그리고……. 파랑은, 파랑은. 소년은 파랑을 찾지 못해 허둥댔다. 팔 끝이 계속 저려오자 소년은 찾기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도망칠 줄 생각 못했던 여자애는 소년이 두발 나가자 그제야 뒤쫓았다. 히히거리던 소년은 신발주머니를 아무렇게나 쥐고는 후문을 향해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두 장의 이력서를 편지봉투에 봉하고 주소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두컴컴한 주택가에선 아무 소리도 없어 치이익, 하고 타오르는 소리가 깊게 빨 때마다 내 귀에까지 전해졌다. 골목 양쪽에 하나씩 뎅그러니 있는 가로등을 둘러봐도 고양이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고 찬바람만이 굴러다니는 이파리들을 흔드는 것이었다. 담배 끝에서 놀고 있는 빨간 불과 나만이 한겨울에 밖으로 내던져진 채 바람 따라 거친 숨을 쉬었다.
푸른 불로 몸을 감싼 화장터의 환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철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히면 푸른 방울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그리고 그 불꽃에 닿아 발끝이 얼어 손이 굳는다. 뜨거운 피와 차가운 냉기가 섞여 심장이 시원하게 녹는다, 그리고 멎는다.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지도 푸른 불도 손톱이 저려오는 것도 없을지 모르는 것이나 그러나 내가 그 겨울의 불상처럼 혹은 그보다 단단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는지 궁금했다. 너무나 알고 싶었는지 손은 바람에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을 돌리려도 고민은 이미 할대로 한 후라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막연히 계획이라 할 수 없는 계획들뿐이었다. 내일 아침에 가면 사직서를 내고……. 만약 안 되면, 설마 안 되기야 하겠다마는 다시 죄송하다 그러고. 또 되면 뭐를 해야 하나. 슬슬 방이랑 물건들 정리하고. 우습게도 순간 사랑니 부근이 아려옴에 이가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양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양치를 하고 그러고 잠에 들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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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나마 따사롭던 햇살이 식을 대로 식은 한밤이었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택시를 타고 종로를 말했다. 내리자마자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은 밤을 잊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밤을 만드는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며 내려오는 노오란 불빛이 없다면 침울한 밤은 완성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걸었다. 줄줄이 늘어선 빨간 천막 사이를 습관처럼 걸은 후에 옆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고 우동 하나 전 하나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코를 찌르는 화학향이 첫 번으로 맴돌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느이 반에 누구 어머니 돌아가셨대지?”
찡그린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다더라. 밝은 놈이었는데. 잘 웃고.”
“힘들겠네. 힘들겄어.”
“임종도 못 지켰대드라. 그 2학년 수학 최선생님 수업시간에 전화가 와서 달려갔는데 이미 늦었대.”
그는 허허, 거리고 쓰게 웃었다.
“이 임종이라는 게 사실,
사실 그렇게 필요한 건 아니야. 그니까 그런 어린 애를 두고 뭐, 본인이야 더더욱 뼈에 사무치겠지만, 일찍 가는…… 일찍 가는 슬픔을 더해주는 셈이지 뭐. 나중에 가면 그 사람이 필요하다 싶을 때, 그니까 마음 깊이 느끼는 게 뭘 거 같냐. 그저 왜 갔어. 왜 그렇게 일찍 갔어. 이거지.”
“…….”
“우리 어무이 돌아가셨을 때, 너도 알겠지만 나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때 입술 파르르 떨면서 가셨는데 나, 울기야 많이 울었다. 근데 그게 나중에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억 속에서 안 잊히는 게 짜증나는 거야. 차라리 밝게, 조금이라도 더 생기 있게 잘 지내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좋겄는데 그게 안 되는 거거든. 자꾸 옆으로옆으로 치우더라. 나중엔 포기하고 지금도, 지금도 떠오르데.”
“……다, 다 커가는 과정이겠지.”
맥없이 대답한 나는 후회했다. 커가는 과정이란 말이 너무나 억울하게 들렸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크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가끔 시간이 사람을 택하는 것인지 사람이 시간을 택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아니, 둘 다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시간이 사람을 택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잔인하다. 나는 그 소년에게 미안해졌다. 커가는 과정이라고만 얘기하며 크는 것을 멈춰주진 못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아이는 커야하는 것이고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거북한 침묵 속에 할 말이 없던 나는 핑계를 두르듯 내뱉었다.
“잘 되겠지. 잘 될 거야. 내가 돕고.”
잔을 들어 부딪쳤다. 플라스틱 잔은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다. 소리보다는 그 속에 출렁이는 액체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비고 차고 비고 차는 것을 본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여느 때 경쾌한 치찰음이 있던 자리에 숙연함이 자리 잡는다. 비고 차고, 비고 찬다. 무색의 액체가 무언가의 과정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넌 아직도 이선생님 꿈 꾸냐?”
“…….”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처음엔 깊게 그리고 얕게 두 번이다.
“한 반년 되었지?”
그릇을 보며 그가 말했다.
“그쯤이다, 아마.”
“잊어야지 않겠냐. 이미 결혼할 때도 지난 지 오래잖아.”
“뭐, 뭐. 때가 되면.”
식은 전을 뒤적였다. 가리는 음식 따윈 들어있지 않으나 그러나 편식을 하는 아이처럼 헤집었다. 뒤적이다가도 생각 없이 전을 찢어 입에 넣었다. 남은 조각엔 따라가지 못한 부추줄기가 삐져나와 있었다.
“이젠 여행도 안 다니나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연기를 마시고 있었다. 여행이란 말을 참 오랜만에 듣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나 자신이 겪은 것이나 그러나 내가 남이 되어 지켜보는 느낌이 있었다. 어린 날의 기억이 그랬다. 네가 어렸을 때, 네가 어렸을 때 말이다. 그 말 속엔 내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이와 더불어 관객이 되는 것이다. 거기엔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길을 잃고 울거나 비염 때문에 코를 훌쩍이는 아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산을 구경하는 나 바다에 소리치는 나 길을 따라 걷고 무거운 짐에 땀 흘리는 내가 보였다. 저만치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 만나고 나서는 간 적 없으니까.”
“그래서 더 가야하는 거 아닌가?”
“글쎄, 기분이 나지 않아서.”
“기분 좋을 때만 가는 건 아니잖아. 생각해봐.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데?”
바다. 바다엘 가고 싶었다.
“바다가 좋겠다.”
“가고 싶었나보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시 한 번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차고 비고 차고 비고 다시 또 찬다. 과정은 점점 흐려졌다. 어느 것이 차는 것인지 어느 것이 비는 것인지 관심이 사라졌다. 그것이 끝났다는 말인 줄 아는 것이나 그러나 계속해서 기울이는 것이었다.
흐트러진 거리엔 쓰레기가 뒹굴었다. 구겨진 전단과 여기저기 떨어진 담배꽁초가 노란 불빛을 받아 그림자를 남겼다. 아까보다 더 찬바람이 불었지만 술기운 탓인지 춥지 않았다. 사거리까지 걸어가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렸다. 비어버린 담배갑을 길가에 버리며 그가 말했다.
“너, 해남으로 가라.”
“꽤 머네.”
“어차피 딱히 갈 데 없으면. 거기 큰 절에 아는 스님 한 분 계신다. 안부 좀 전해줘.”
졸음이 쏟아졌다. 하품이 나와 거리가 물을 머금었다. 가로등 빛이 일렁였다.
“법명이 어떻게 되시는데?”
“범허……. 범허스님이다.”
“절이면, 그냥 가서 자도 되는 거냐?”
“미리 전화 해. 가본 적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이 처음이 되겠지.”
해남이면 땅끝이란 생각이 났다. 구태여 가볼 이유도 없으나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이 그랬듯 어느새 자리 잡았다. 아무 의미도 떠오르지 않는 이 땅의 끝을 곰곰이 생각했다.
“온다, 가라.”
그를 먼저 태우고 곧이어 뒤따라오는 택시를 탔다. 차 안의 따뜻한 공기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쏟아져 오는 졸음에 택시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푹신한 시트에 기대어 늘어지는 잠을 잤다.

소년은 계단 위 돗자리에서 있는 대로 몸을 편 채 축 늘어져있었다. 돗자리 위 알록달록한 그림이 뜨거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아지랑이 일렁였다. 소년은 그 여름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반질반질한 돌계단이 녹을 수 있으면 그러면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도 재밌겠다. 아니, 더우니까 타기 싫다 금세 소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현관문 너머로 설거지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언제나 딸기가 그려진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했다. 등 한가운데 있는 찍찍이를 붙이기 위해 소년에게 오라곤 하고 분홍 고무장갑을 끼우고 하늘거리는 연두색 반팔 치이익…… 이따금씩 깡, 깡……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몇 개인지 셀 수 있었다. 다섯 개 쯤 세고 났을 때 소년은 물소리가 마치 창문너머 들리는 소나기 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렸으면, 소년은 돗자리 가에 있는 난간 쇠봉을 잡았다. 빛이 닿는 바깥쪽은 따스하고 그 반대의 그림자는 차가웠다. 이상한 따스함이었다. 더운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더운데도 소년은 부드러운 쇠의 곡면을 손으로 감쌌다. 후텁지근한 여름날의 더운물 목욕처럼 그러나 이내 소년은 달궈진 쇠에서 손을 살며시 놓는다. 손을 놓고 일어나 앉은 소년은 볼에 맺힌 땀을 닦고 언덕 아래 지하 주차장 쪽을 보았다. 이리저리 좁은 골목 새에서 깡총거리며 뛰던 아이들이 주차장 입구 옆에 모여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소년과 치이익…… 하늘거리는 연두색 반팔이 멀어졌다. 소년은 아이들에게 달려가 주차장 가자, 며 앞장섰다.
주차장 입구는 상쾌한 터널과도 같았다. 갑자기 시원해지는 공기에 아이들은 숨을 한껏 들이쉬며 눅눅한 공기를 마셨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누군가가 와아! 하며 뒤로 달려 나갔다. 아이들은 늦게 나오는 사람이 술래라도 되는 양 마구 뛰어갔다. 빛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다시 더운 여름날로 돌아왔다. 눈부신 햇살 아래 아이들의 흰 이가 빛났다. 새까만 아이들이 젖니가 빠진 입을 크게 벌리고 깔깔거렸다.
히히거리던 소년은 땀을 닦고 집 쪽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누워있던 때 그대로 계단 위의 돗자리 반짝이는 난간이 있었다. 미풍이 불어 돗자리가생이가 한들거렸다. 소년의 목덜미에도 땀방울을 흩뜨리는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아이들이 다시 줄넘기를 시작하고 소년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리고 틀려서 다시 한 개, 두 개, 세 개를 세었을 때 소년은 또 주차장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덟 개, 아홉 개…… 하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소년은 눅눅한 공기 한 가운데 섰다. 처음으로 주차장 안에서 차를 마주 보았다. 차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를 삐빅 소리를 기다리며 그 때를 위해 쉬고 있는 것이었다. 소년은 차가 부럽다 생각했다. 차는 이 시원한 곳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었고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차의 곁에는 또 다른 차가 그 곁에는 또 다른 차가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차는 외로울 일도 없어보였다.
소년은 스멀거리는 어둠 속에서 삐빅 소리를 기다렸다. 들려와도 놀라지 말아야지 그러나 소년은 놀랄 것만 놀라야 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불이 깜빡이면 그러면……. 도망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차를 보고만 있던 것이나 그러나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차 주인이 그를 볼 수 없도록 멀리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리아리 전기가 전해져오는 오줌보를 틀어막으며 소년은 몸을 비틀었다. 기다려야지, 소년은 배에 힘을 주고 가만히 섰다. 왜 이럴 땐 꼭 오줌이 마려운 것인지 궁금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소년은 마침내 지쳐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뜨거운 햇살의 공터로 나가며 소년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이 따라오고 있진 않은지 그러나 여전히 차만 무거운 침묵에 둘러싸여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나갈 때를 스스로 잡지 못해 신호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것이 들려오지 않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목덜미에 스르륵 감기는 눅눅한 공기에 숨 쉬기 힘들었고 노려보는 헤드라이트가 문득 섬뜩했던 것이다. 걸어 나온 소년은 잠잠했던 오줌이 다시 마려워 집으로 뛰어가야 했던 것이다.

향냄새가 났다. 많은 곳을 찾아가 봤지만 여기선 유독 향냄새가 더 풍겼다.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못내 아쉬웠다. 차라리 저 앞에 한 아름 놓아진 국화향이라면 그녀에게 더욱 가까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녀에게선 언제나 달콤한 향기가 그러나 이미 사라졌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국화 한 송이를 놓고 견딜 수 없어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를 뒤로하고 식장 밖으로 나갔다. 맺힌 눈을 비볐다. 그녀 어머니의 붉게 물든 얼굴이 부었는지 울고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나왔다.
그는 찾아온 학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학생들에게 가보라 말하고는 앞에 서서 내 팔을 잡았다. 아래로 떨군 내 얼굴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애들이 본다.”
나도 모르게 거칠게 튀어나왔다.
“그게 말이다! 그게…….”
흠칫 놀랐다. 목구멍 뒤에서 밀려오는 응어리를 참아야했다. 이를 악물고 뛰는 박동을 삼켰다. 한껏 추스르고 말했다.
“참기 힘들다.”
“나가자, 담배 이제 아예 안 태우냐?”
먼저 나가보라 말하고 화장실에 갔다. 창백하고 붉었다. 초췌해진 몰골에 찬물을 문댔다. 거울 속의 나에게 흔적을 남기기 싫어 한참을 문댔다. 휴지로 닦고 거울을 다시 봤다. 그리고 창백하고 붉었다. 감출 수 없음을 깨닫고 힘없이 나왔다. 따스한 밤공기가 부드러웠다. 어슴푸레 가라앉은 밤안개 속에서 드문드문 차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죽기엔 어울리지 않는 날이라 생각 들어 침울해졌다. 그가 건네는 담배를 받아 쥐고 불을 붙였다. 쓴 연기에 어지러웠다.
두 대를 연거푸 태웠다. 먼저 한 대를 피운 그는 쭈그려 앉아 불이 꺼진 꽁초를 바닥에 비비고 있었다. 말없이 바닥을 보던 그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발인이 언제냐.”
“5시.”
“보겠네.”
“…….”
“나도 있으면 좋겠냐.”
“…….”
“들어가자. 5시까지 마시자. 그때까진 취해있어야지.”
그 날, 매캐하고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생에 있어 가장 취했다. 몇 번이나 울음을 참고 화장실로 가야만 했다. 속을 게우거나 혹은 변기 커버를 내린 후에야 칸막이에 기대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풀었다. 추스르는 것도 포기한 채 들여다본 거울 속의 나는 끝없는 어지러움과 연기로 흐려진 눈앞과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와 그에게 꺼낸 꿈에 대한 말과 그리고 또 터진 울음으로 창백하고 붉게 움푹 패인 눈으로 그 날을 기억했다, 추억했다.

그날 밤, 소년은 한밤중에 마룻바닥으로 들어온 달이 너무 밝아 일어나야했다. 포근한 잠 속에서 밝아진 눈꺼풀 언저리에 눈을 떠보니 보름달은 방금 구름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낸 듯 바다처럼 일렁이는 검은 윤곽 속에서 홀로 광채라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하고 있던 것이다. 매혹이라는 것을 아직 모를 시기의 소년은 신비감에 둘러싸여 일어나 달을 보았다. 서서히 달을 잡아먹는 구름을 손으로 밀쳐내기라도 할 듯이 허공을 휘젓던 소년의 손은 이윽고 달이 모두 가려진 뒤 풀죽어 내려앉았다.
소년은 안방 문 앞에 서서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려 고개만을 들이민 채 눈을 말똥히 뜨고 숨죽였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아랫도리가 근지러운 때에 문을 한번 끼익 거려보고는 아무 반응이 없고 나서야 안심하고 제 이불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부모님이 깨실까 걱정되어 화장실을 쓸 수는 없었다. 한밤중 변기가 거칠게 물을 삼키는 소리는 레버를 내리면 당연히 들릴 걸 알면서도 흠칫 놀라는 소년에게 그토록 무서웠던 것이다.
침 넘기는 소리도 방에 들릴까 신경 써가며 살며시 일어난 소년은 발을 동동 구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반바지만을 걸친 채 고양이처럼 문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바로 앞 전봇대에 찌익 갈기고 나서야 소년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샌들 밑창을 타박타박 소리 내어 걸었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꺼진 가로등 틈새로 어둠이 스며든 거리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면 으스스하다고 볼 수 있는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도 가벼운 소년의 발걸음 덕에 외려 경쾌해진 것이었다.
서슴없이 주차장 안으로 들어간 소년은 막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으로 축축한 기둥과 바닥을 더듬으며 끔뻑였다. 짙은 어둠에 익은 눈 속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흰색 차를 찾고 나서야 그 앞에 서서 마주할 수 있었다. 소년은 차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온 거니.”
차가 물었을 때 소년은 발끝으로 눈을 떨구며 바닥의 먼지를 쓱쓱 긁는 것이었다. 자신이 왜 왔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년은 낮에 차를 보던 일을 끝내러 온 것이라 결론지었다. 그런데 소년은 알지 못했다. 왜 차를 마주봐야 하는지 그게 중간에 끝났다고 해서 소년에게 의미가 있긴 한 건지를 몰랐다. 그저 왔을 뿐이었고 소년은 자신이 귀찮게 만든 차에게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소년과 차가 그렇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각자 머문 제자리에서 사각사각 대는 소음만을 내고 있을 때 어둠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하나도 안 귀찮아.”
소년은 불쑥 나타난 어둠에 놀랐다. 소리 없이 미소 짓는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나 소년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여느 아이가 그렇듯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스레 피해야 할 것만 같이 느껴져 두려웠던 것이다.
“올 줄 알았던 거 있지.”
소년은 부드럽게 그의 손을 감싸는 그녀의 손길에 내빼지 못하고 가만히 섰다. 스스로의 검은 윤곽 속에서 그녀의 두 눈은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마주한 소년은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고여 버린 침을 꼴깍 삼키고는 행여나 그 소리가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고심에 빠졌다. 그녀가 짜증이 나서 여기에 가둬버린다면 그러면 부끄럽게도 울음보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소년은 생각만 해도 코끝이 아려 눈을 떨군 채 하품하는 척을 했다. 손을 보니 그녀의 고운 손이 여전히 포근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재차 손등을 쓰다듬고 손가락 사이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은 가늘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전해졌는지 소년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닿은 후로 아무 말 못하고 그렇게 서있던 소년은 이대로는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아 긴장한 손짓으로, 살며시 그러나 급하게 손을 내빼고는 멋쩍게 하품해서 맺힌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손을 내리다 말고 그길로 돌아서 달려 나갔다. 그녀는 히힛거리며 아이처럼 웃었으나 따라오진 않았다. 소년은 출구로 나와서도 계속해서 뛰었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 꼭대기에서야 겨우 멈추고 차오른 숨을 골랐다.
다시 아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고개만 들이민 채 더운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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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
 
합장하고 절을 했다. 온화한 미소의 불상이 난롯불 너머 부드럽게 빛났다. 지그시 감은 눈부터 입가의 곡선, 자연스럽게 편 손가락까지 시선의 테를 그렸다. 불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올려 볼 때마다 불이 흔들리며 그 위에 그림자를 남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불상의 금빛도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절을 마치고 가만히 섰을 때 그때서야 빛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움직였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바람보다 찬 불상이라도 조금은 떨어야 할 것만 같은 겨울이었다.
스님은 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이어 세게 터지는 징소리는 나무의 잠을 깨워줄 것이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먼 새벽임에 시린 맨발과 흘러나오는 입김이 적응치 못하고 안달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나는 거기 가만히 서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으며 외려 이렇지 않은 날이 이상하게 보이리만치 서있었다. 마지막 징소리가 남아 나무기둥이 웅웅거렸다. 사뿐한 발소리에 이어 절을 하는 세 번 가사가 바스락거리고는 목탁이 맑게 울렸다. 스님의 쉰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이 일순 일었다. 산사를 홀로 지키는 목소리는 내게 이유 없이 구슬픈 것이다.
목탁소리에 맞춰 절을 하고 합장하고 절을 하고 다시 합장하고 멈추어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갑시다.”
는 스님의 말씀에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왔다. 발이 시려 급하게 신발을 신고 방에 들었다. 방에서도 스님의 염불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떤 절의 수도승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끊이지 않고 말을 한다. 그들 중 누구도 한마디 않고 조용해지는 순간 세상은 멸망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스님이 홀로 지키기 이전의 스님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일어나 염불을 외웠을 것이고 그 이전의 스님도 이 절을 세운 누군가도 원래 있던 곳에서 그렇게 염불을……. 나는 장구한 역사가 흘러들어온 곳이 지금의 외로운 순간임에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다시 잠이 들어 밖의 참새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날이 새어 창호지는 이미 흰 막이 되어있었다. 공양시간이 다 되었기에 들려오는 선생님, 선생님. 소리를 듣고 옆으로 넘어갔다. 밥과 김, 김치뿐인 조촐한 공양이다.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짐을 챙겼다. 세 번의 절과 합장을 하려 대웅전으로 향했다.
지난번 머무른 절의 범허스님께선 말씀하셨다.
“불가에선 환생을 믿죠?”
“불가에서 말하는 환생이란……. 세상엔, 속세엔 이리저리 아귀 싸움이 많아. 이데올로기, 돈……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은가, 그건 아닌 법이라.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느냐.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느냐. 그건 아닌 법이라……. 인간이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에 행하는 일엔 문제가 따르기 나름이라. 그래서 환생이란…… 인간을 초월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라.”
작은 체구의 스님은 말주변이 없었다. 말보다는 웃는 편을 택했는지 양 볼에 주름이 괴어있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오래된 미소는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스님은 말을 잘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부처께 절을 드리며 마음을 비우는 게야…….”
꺼진 난로 곁의 불상은 차가워 보였다. 손을 대면 부드러운 곡면너머로 한기가 전해져 오지 않을까. 다시금 천년을 생각했다. 내가 이 절을 떠나도 스님은 계속해서 염불을 외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래왔든 지난 천년에 거기 있던 스님들이 그리고 이 후의 스님들도 염불을 욀 것이고 그 후의 스님도, 때가되어 이 절이 사라지면 어느 곳에서 다시…… 아니, 절을 하는 순간만은 마음을 비우는 거다, 경외마저 비우는 것이다, 나는 노력했다.
산사를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고 있었다기보다는 흔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눈앞을 가득 메운 눈은 천천히, 고요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바람이 눈을 흔들 뿐이다.

비가 내렸나보다. 물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아직 어두운 밤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꽤나 거친 숨이 다시 나갔다. 입에선 쓴맛이 났다. 양치를 하지 않고 잠들었나. 일어나야겠지, 하면서 그냥 누워있었다. 눈 뜬 채로 어둠을 구경했다. 곧 눈이 어둠에 익었다. 누워있는 침대, 책상, 벽에 붙은 앨범커버. 무엇하나 없어지거나 생긴다 해도 얼마간 못 알아챌 익숙함이었다. 어둠 속에서 볼 땐 이것들이 지루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뀌는 것이 없어도 새롭다. 매 초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까지 간 뒤 양치를 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시계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망설이다 스위치 밑의 손목시계를 찾았다. 2시 15분.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염불이나 드려볼까……. 신자도 아닌 주제에 너무 장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잎이 진 후의 교정을 거닐었다. 나는 온통 갈빛으로 물든 거리가 좋아 발걸음 따라 부서지는 나뭇잎의 경쾌한 소리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 것이었다. 사라락, 사라락, 무엇보다도 그 소리, 낙엽의 소리엔 기다림이 배어있었다. 겨울, 황혼, 그 혹은 그녀. 기다리지 않아도 낙엽소리가 들리면 기다리는, 기다려야할 것만 같아진다.
이대로 눈도 비도 한참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눈도 소리가 나는 것이나 그러나 그것은 기다림의 소리가 아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바로 보며 헤쳐 나가는 소리인 것이었다.
멀리 운동장 골대 쪽을 보니 아직 집에 가지 않고 공을 차는 아이들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아이들이 입은 하얀 티가 펄럭였다. 방금 골이 들어갔는지 왁자지껄했다.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뒤에서 기다리던 낙엽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걸었다. 아까보다 더 천천히 걸었고 부드러운 낙엽소리는 가까워졌다.
“보충이 끝났나 봐요?”
그녀가 내 물음에 반문했다.
“여지껏 기다린 거예요?”
“뭐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나는 얼버무렸다. 그녀가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우린 말없이 걸었다. 사라락, 사라락, 가을의 소리는 멎지 않았다. 내가 아직 기다리는 그녀의 또 다른 웃음, 황혼. 해질녘의 노을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줄기를 뿜어내며 눈에 스몄다.
문득, 내가 말했다.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꾸네요.”
“무슨 꿈이요?”
“글쎄 현실의 꿈이라 해야 하나.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그녀는 웃었다.
“항상 침대에서 일어나요. 매우 뻐근하고, 답답하고. 입 안도 쓰고. 신기하게도 모든 게 진짜 같더라고요. 불을 켜면 눈도 시고.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한. 그런 꿈이요.”
“다시 잠드나요?”
“그렇긴 해요. 그런데……. 누가 불을 켜서 일어나죠.”
“누군지 봤어요?”
나는 웃었다.
“걸읍시다.”
“…….”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교문에 가까워졌다.
“그럼 어떤 느낌이에요, 자각몽을 꾸면? 하늘도 날 수 있거나 보고 싶은 사람,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나요?”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라 그런 게 안 되는 것 같아요. 노력한다면야 만들 수 있겠죠. 그런데, 아까 말했잖아요.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고. 그냥 그대로가 좋아서 노력하고 싶지 않아요. 뜬금없이 하늘을 난다거나 하면, 현실이 아닌 게 돼버리잖아요.”
그녀가 웃었다.
“이미 현실이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나 같으면 이것저것 해볼 것 같아요. 하늘도 날고 물 위도 걸어볼 수 있고…….”
반짝이는 그녀의 눈 속에 투명한 하늘빛이 보였다. 나는 그 일순의 생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거기엔 아이들의 그것이 있던 것이다.
“다음에 한 번 해봐야겠네요. 무척 궁금해 하는 것 같은데.”
사랑스러움에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이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신다고 했다. 약속했던 저녁이 이렇게 떠나자 못내 아쉬웠다. 기다리며 어깨를 감쌌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멀리서 부른다면, 수화기 너머, 오랜만에 수화기 너머 듣는 목소리가 있다면 스쳐지나가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었다. 떨어지고 싶진 않으나 그러나 만약 그녀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는다면 무엇보다도 이 달콤한 향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었다.
기댄 그녀가 말했다.
“무슨 옷을 입고 있었어요?”
“뭐가요?”
“꿈속에서요.”
“파란색이요. 첫날이었을 거예요, 아마. 예뻐 보여서 파란색을 입으라 말하고 싶었는데, 뭐 이미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이브닝드레스 같은 거였어요. 평소에 입긴 무리가 있죠.”
버스가 오고 손을 놓았다. 뒤쪽에 앉은 그녀에게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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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마주할 때
 
명절이 되면서부터 2공단 옆 시장아파트에선 모든 것이 하나 둘씩 사라져간다. 그곳 골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누우면 그림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눅눅한 새벽 야간조의 질척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어 술에 찌든 아침을 깨부수던 싸움소리가 잦아간다. 텅 빈 2교대, 다시 야간조의 발걸음 대신 타닥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주소를 잘못 찾은 배달부의 외침이 몇 번 지나고 나면 물그죽죽한 밤이 찾아온다. 별이 있어야할 곳에 검은 연기만이 울먹이면 마침내 온 것이다. 삶을 찾아왔다가 도리어 죽음만 안고 가는 희멀건 얼굴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과정이었다. 빈 소리의 문틈을 거니는 죽음의 그림자는 칙, 칙, 거리며 발을 끌었다. 나는 이제껏 죽음의 소리다 믿던 것들이 그러나 차라리 삶이었음에 죽음은 어떨까 생각되어 부르르 떨고 만 것이다. 시선은 온통 벽의 낙서에 집중되었다. 지우려했던지 살짝 긁은 곳엔 벽지가 까져있었다. 벽이 벌거벗은 곳에 스민 곰팡이는 날이 어둑해질수록 더욱 커보였다.
‘돼지새끼 설날’
전날까지도 망설이던 그의 소리가 자리를 비웠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잠바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열자마자 매캐한 굴뚝냄새가 코를 찔렀다. 추운 탓에 배에 힘을 주고 몸을 움츠려야 했다.
둘러싼 계단의 한가운데, 이 빠진 그릇처럼 더러운 화단에 내려가 담뱃불을 붙였다. 매서운 칼바람은 움푹 팬 골을 일부러 찾아왔는지 마당에서 돌고 있었다. 이를 바득이며 나는 돼지새끼를 찾았다. 밖에 나와 있진 않았으나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내일이면 시작인 것이었다. 침을 늘여 담배를 죽이고 화단에 던졌다. 다시 올라간 방 안에선 냉돌이 시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돼지새끼의 방문을 두드렸다. 탕탕거리는 신음이 마당에 울렸다. 잠긴 문을 열고 짧은 머리를 디민 돼지새끼의 눈은 아직껏 부스스했다.
“더 잘 거냐.”
“지금 몇 신데.”
나는 말없이 그의 찢어진 눈을 보며 내버려 둘까 고민했다.
“이렇게 일찍 나갈 필요 없잖아.”
“쭉 둘러봐야 돼. 사람 있나 살펴야 할 것 아냐.”
“들어와 봐.”
현관에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담배연기에 찌든 녀석의 방은 내 방보다 좁아보였다. 그가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넘어 침대에 풀썩이며 앉았다. 안은 먼지로 가득 찼다. 굴러다니는 콜라병을 집어 마시며 그가 말했다.
“몇 시쯤 오지?”
“그 여자가 밥 주는 걸 봤을 때가 점심이니까 아마…… 1시쯤이면 올 거다.”
“어떻게 해, 마당에서 잡는 수밖에 없어? 아님 어디로 오는지 봤어?”
“교대 시간 바뀐 이후론 본 적 없어.”
“나도 본 적 없는데.”
“마당에서 잡아. 둘이서 개새끼 하나 그냥 잡을 수 있어.”
그는 끄덕이며 하품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쓰게 한 모금 했다.
“내가 일층 볼 테니까 네가 이층 봐. 오면서 봤는데 3층엔 없어.”
“알았어. 근데 만약, 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 막, 감옥 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
“하라면 해. 이제 와서 딴소리 말자고 했지. 똥갠데 누가 신고하겠냐.”
돼지새끼는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나는 그의 뒤룩뒤룩 살찐 몸뚱이가 아무것이나 주워 입는 폼이 역겨워 철문을 열었다. 비가 올 듯 하늘은 우중충했다. 네모난 구멍너머 구름이 울고 있었다.
그 여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매일 새벽 짙은 화장을 하고 옆 건물로 가는 3층 통로를 이용한다. 또각거리는 구두는 월요일에는 가벼운 소리를 냈고 금요일에는 무거운 소리를 냈다. 단 하루도 구두의 울림은 쉬는 날이 없었다. 그것이 잠든 눈꺼풀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면 나는 눈을 떴다. 살며시 문을 열고 발목의 힘줄을 보았다. 매끄러운 그녀의 살결은 뱃속에서 발길질하는 아이처럼 꿈틀거렸다. 짙은 화장품 향기가 나지 않을 때면 더 이상 그녀의 구두 뒤축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이날,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그림자가 문틈을 거닐기까지 기다리며 잠을 청한 것이다.
“야!”
돼지새끼가 뒤에서 소리쳤다.
“안 들려? 지금 빠따 들고 나가야 하냐고.”
나는 잠시 아니, 한마디를 잊어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들고 나오지 마.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돼지새끼가 문을 닫고 잠갔다. 저쪽으로 가라 손짓하고는 반대로 걸었다. 복도, 계단, 마당 어디에서도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줄줄이 늘어선 철문을 지나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심장만 가슴팍을 부여잡도록 쿵쿵거릴 뿐 정신이 바로 서지 못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든 것이었다.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야했으나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었다.
마당까지 내려와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돼지새끼는 아직 2층 난간을 드문드문 잡으며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았다. 불을 붙이고 입에 갖다 대었다.
그때, 나는 녀석과 마주했다.
‘도망가.’
푹 꺼진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지난 밤 비를 맞았는지 더러운 회색 털이 북실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엉망으로 나부끼는 것이었다.
‘도망가.’
녀석의 눈은 검은 구멍 같았다.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그렇게 들고 서있었다. 들이 쉴 수 없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도망가, 얼른.’
돼지새끼에게 소리쳤다.
“야!”
고개를 돌리니 눈이 휘둥그레져 내 쪽을 보는 것이었다.
“내려와!”
고함에 놀란 녀석이 시장 쪽 통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를 절뚝이며 발발 기는 것이 잡힐듯했다. 나는 따라 달렸다. 화단을 빙 돌아 달려가고 그리고 돼지새끼는 통로서 가까운 계단으로 뛰었다. 거의 동시에 돼지새끼와 내가 통로 앞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문을 빠져나갔다. 숨이 찼다. 숨이 찬만큼 열이 받았다.
‘씨발, 씨발!’
땀으로 뒤범벅이 된 돼지새끼의 이마가 번들거렸다. 멀뚱거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꼴이 보기 싫어 철문을 발로 차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뻐근한 무릎을 끌고 3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앞으로 어떡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그게 다시 올라올까, 올라오면, 다가가도 가만있을까, 다시 마주치면, 다시 마주치면, 문부터 막는 거야, 문부터, 아니 그 여자한테 한번 말해볼까, 미쳤다고 하려나, 미쳤다고 할 거야 분명, 발로 차거나 뺨을 때리거나, 울지도, 울지도,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거다, 나랑 돼지새끼 둘이서 잡는 거야, 둘이서 나눠먹고 그러면,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끝나는 거야.
여름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봄바람이 일렁이는 여름이었다. 움튼 덩굴은 화단의 더러움을 감췄다. 때때로, 아주 드물게 풀벌레가 날아다닐 때면 살아 움직였다. 여자는 옆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포근하게 튀는 물방울이 반짝였다. 하늘색 원피스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아스라이 살랑였던 것을 기억한다. 자락 아래로 드러났던 발목이 희었던 것을 기억한다. 햇살은 그렇게 그늘을 드리우며 그녀를 비췄다.
여자는 손을 씻고 바구니 하나를 들고 나왔다. 저만치 있던 녀석은 절룩거리며 기어갔다. 바구니를 내려놓으면 먹기 시작했다. 움츠러든 그대로 숙인 모가지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골방에서 창문 틈새로 그러나 더 활짝 열어 그러나 마침내는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한여름이 되어서는 뜨거웠다. 빛이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짝 떼어 서있던 나는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벽과도 같았다. 담장을 넘은 나는 말라비틀어져 간 것이다.
오후조로 배정받은 가을이 되어서야 나는 나의 골방으로 돌아왔다. 잠시나마 그림자가 그만큼 기울 때가 되면 뜬금없이 눈이 시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돼지새끼가 보초를 서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서기엔 날이 너무 추워.”
“아까처럼 그 시간 외에 오면 어떡하려고.”
서긴 해야 할 것이나 그러나 방 안에서 설 수도 없었다. 돼지새끼와 내 방은 모두 2, 3층이어서 마당과 통로가 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 여자네 방으로 간다.”
돼지새끼의 표정이 굳었다. 조용해진 그의 숨소리가 진심이냐며 묻고 있었다.
“그 여자네 방으로 가야돼. 통로 바로 옆이니 그 새끼가 지나간 다음에 슬며시 나와서 막아버리면 돼.”
“야, 근데 이건. 이건 아니잖아. 똥개 하나 잡는 건 죄가 아니라 쳐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다른 거 생각하자, 차라리 덫을 만들던가. 난 그건 불안해.”
심장이 뛴다.
“잔뜩 겁먹었으니까 덫 같은 건 쓸모없어. 그 여자네로 간다. 아무것도 안 건들면 문제없을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에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피가 쏠렸다. 조각난 말들이 핏줄을 타고 관자놀이부터 걸쭉하게 꿀럭였다.
“다시 돌아오면 어쩔 건데. 난 불안하다고. 이건 아냐, 제발 다른 거 생각하자.”
돼지새끼의 이야기는 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호흡이 가빠 일어났다. 박동이 발소리와 겹쳐 쿵, 쿵, 소리를 냈다. 문을 나섰다 다시 들어와 신발장을 뒤져 철사를 꺼냈다.
그 여자의 방 앞은 하얀색이다. 칠이 벗겨진 나무의 결 사이로 갈색이 돌아다녔다. 하얀 바탕 안에서 갈색은 춤추고 그리고 튀어나온 ‘101’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숫자와 마주하며 차가운 쇠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흔들었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철사를 구부려 조심스럽게 쇠가 달각이는 소리를 들었다. 찰칵, 돌려 열었다. 돌이킬 수 없게 활짝 열고 들어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 여자의 향기가 그리고 달콤하고 아늑함에 멈춰 섰다. 불거지던 핏줄이 가라앉고 숨이 멎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래서, 파업은 한답디까.”
지난겨울이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야간관리소장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아 라인조장에게 물었다. 간혹 전등이 나간 사무실 문을 나설 때면 어둠 속에서 흙빛 얼굴을 들고 나와 껄떡대는 것이었다. 근무이상 점검을 할 때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누렇게 뜬 눈두덩의 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라인조장은 내 말을 듣더니 씨익 웃었다. 까만 그의 얼굴이 누런 이를 다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다음 주다, 아마 계속 이런 식이면.”
“처음부터 그렇게 나갈 거랍니까?”
“그렇게라니.”
“철야로 갈 거냐고요.”
“인원도 많으니 할 만해. 우리와 3조는 다음 주고 2, 4조는 그 다음, 그렇지.”
“……알겠습니다.”
“전기 끊을지도 모르니 두꺼운 옷감은 죄다 챙겨오라고.”
대꾸하고 나왔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딱히 누군가 무엇이 문제랄 것은 없었다. 몸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손짓이 지나갈 뿐이었던 것 그러나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천장에서 드릴을 끌어내릴 때 허공이 이렇게나 길었나 싶은 것이었다. 닿는다기보다 휘저으며 어긋나 있었다. 작업라인에 떨어진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서도 비어있는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다.
무슨 하루인지를 보내고 골방으로 향하는 길에 반장이 앞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며칠 전서부터 그의 걸음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도 말없이 뒤따랐다. 옷에 서리 앉도록 추운 골목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가로등이 내리까는 누런 기둥 서너 개 뒤떨어져 걸었다. 나는 숨죽여 그의 검은 뒷모습을 걷고 그리고 시장계단을 올라 그는 101호 앞에 멈춰서 문을 두드리고 그리고 숨어 보다가 그가 들어가면 슬며시 ‘101’에 다가가 귀를 바짝 대는 것이었다. 이어 여자의 신음이 들린다.
나는 부릅뜨고 숨이 막혀 쉬지를 못해 그러나 조금씩 새어나오고 그러나 마침내는 그녀의 신음에 맞춰 숨을 쉬었다. 처음엔 얕고 얕다가 점점 차오르고 짐승의 비명처럼 꺽꺽 내지르는……. 그녀가 한 번씩 내지를 때마다 나의 숨은 들어가고, 내려갔다. 물 깊숙한 곳에서 억지로 꼴깍이며 목구멍을 넘기듯 숨을 마셨다. 마지막은 살짝 간격을 두고 부드럽게 가라앉는 한숨이었다. 항상 마지막 순간이 맞지 않았다. 나는 그 간격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그녀보다 조금 늦게 푹 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섰다.
벌컥거리며 그의 구두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빠르다. 허우적대던 나는 빨리 자리를 뜨기 위해 도망을 뛰듯이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는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어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대답이 늦기에 난 또 다른 사람일 줄 헷갈렸잖아. 맞다. 자네 여기 살았었지?”
그의 목소리가 거추장스럽게 흔들렸다.
“예, 무슨 일로.”
“여기 아가씨가 나랑 어찌해서 아는 사인데 요즘 여기 산대더라고. 아까 간만에 연락이 왔었어. 잠깐 와본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아는 사이야?”
“아뇨. 딱히 본 적도 없었어요.”
“아, 그런가? 뭐 그럼 다음에 인사라도 하면은.”
까만 얼굴의 이빨이 씨익 웃었다.
“난 그럼 한 대 피우고 들어갈 테니 가봐.”
방에 들어가서도 불을 켜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들여다본 눈꺼풀 너머에는 그녀의 뱃속에서 꼬물거릴 아이의 손가락이 있었다. 나는 바스락거리다 다시 나가 ‘101’과 노려보고 문을 두드리려다 부수려다 골방으로 돌아와서는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상상에 목구멍이 치밀어 바닥이 시린 줄도 몰랐다.
돼지새끼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창백한 하늘색 벽지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침대와 싱크대가 보이고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푸른색 노트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들고 펼쳐있는 페이지를 보았다. 예쁜 글씨지만 감정이 휘몰렸는지 흔들리며 씌어 있었다.
‘생각해둔 세 가지 결말이 있었다. 두 가지는 행복하고 다른 하나는 슬플 거라 여겼다. 그런데 모두 아니었다. 다 같았다. 어쩌면 믿고 있던 첫 번째 마저, 그러니까 그저 생각인데 첫 번째도 슬플 것 같다. 끝날 수밖에 없으면 뒤돌아볼 때 아무 생각도.’
돼지새끼가 건들지 말자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흘끗거리고 노트를 다시 원래 있던 대로 내려놓았다. 멋쩍은 듯 말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 닫아. 다른 사람 없었지?”
“어. 근데 진짜 불안한데…….”
“괜찮아. 그 여자 오면,”
‘후려쳐.’
“그 여자 오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돼지새끼에게 잠시 밖을 보고 있으라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손을 씻고 얼굴을 문질렀다.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의 내가 보이고 그리고 마주했다. 간밤의 추위로 굳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게 꼭 녀석 같았다. 휴지를 말아 머리에 문질렀다. 보기 싫어 박박 문질렀다.
그녀가 매일아침 이 거울을 본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세수를 할 것이고 그리고 향기로운 비누로 손을 씻고 그리고 머리를 감고 그러나 너무 바쁜 때는 여기서 화장을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이목구비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데도 표정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의 피부색이나 눈의 깊이, 혹은 드리운 그림자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다른 것으로 찾아야할 것이나 그러나 나는 그게 두려웠다. 웃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웃었었다.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야간조 때는 일을 마치고 골방의 일부가 되어 잠을 잤다. 스멀거리는 숨소리에 끈적해진 방바닥은 내 무거운 머리통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견디지 못했으나 그러나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박차고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 때 그녀와 처음 마주쳤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같았다. 그녀는 손을 씻고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단지 몇 분, 내가 마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다를 게 없었다. 바구니를 들고 나오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살짝 웃었다.
나는 이후 그 시간 마당에 나간 적이 없다.
돼지새끼와 함께 4시간씩 번갈아가며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버틸 때가 되고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락이는 소음너머로 간혹 긋고 내려오는 빗방울이 있었다. 자욱한 안개에 내리까는 다른 빗방울과 달리 급하게 들이받는 것이었다. 창문 가까이서 내릴 때면 통, 통, 소리를 내며 튀었다. 숨을 쉴 때, 나는 그 소리에 맞추려 애를 썼다.
파업을 시작하고 전경버스가 몇 대 들어서더니 포위망을 만들었다. 공장 측에선 목이 쉬도록 함성을 터뜨렸다. 격해지면 구호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게 일그러졌다. 이따금 인원 모두가 밀물처럼 몰려나가 각목으로 헤드라이트를 박살내고 멍 하나씩을 안고 왔다. 셔터를 반쯤 내린 공장 앞에서 진을 치고 보란 듯이 붕대를 감았다.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앉아있으면 아무는 것보다 부르터서 터지는 상처가 더 많은 것이었다. 또 한 번의 바람으로 상처에서 피가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조장이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 나는 돼지새끼가 가방을 뒤지는 것을 보았다.
“뭐 하십니까, 지금.”
돼지새끼의 허연 얼굴이 붉어지더니 말을 더듬었다.
“아, 제 가, 가방에서 뭣 좀 찾으려고요.”
“장난하십니까?”
열이 올랐다. 턱 주변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지금 손 대고 있는 게 제 거 아니냐고요.”
돼지새끼는 놀라 눈을 굴리더니 뛰기 시작하고 그리고 욕을 내지르며 따라 달린 나는 어렵잖게 잡아 얼굴을 몇 대 갈겼다. 바닥에 엎어져버린 돼지새끼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일어나.”
돼지새끼는 코를 훔치며 일어났다. 숨이 가쁜지 헉헉대었다. 눈을 똑바로 못 뜨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뭐 훔쳤냐.”
“어, 없습니다. 때마침 들어오셔서…….”
“너 어디 살아.”
“시장아파트요.”
거짓이냐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2층에 산다했다.
“다음에 또 뭐 없어졌단 얘기 나오면 너 집까지 찾아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돼지새끼는 고개를 수그려가며 사과했다. 나는 말없이 상자를 챙겨서 나갔다. 밖에선 작은 무리가 전경과 다툼을 벌이며 욕질이 튀고 있었다. 시리도록 찬 공기가 사방으로 깨지는 것이었다.
파업은 두 주 정도 지나 타결로 일단락을 맺었다. 다시 생산라인이 가동되고 드릴이 내려왔다. 별 다른 게 없었다. 도중엔 소화기 분말냄새에 코가 매웠고 전과 후엔 굴뚝냄새가 진동을 했다. 서로 다른 가스들이 자리를 비우고 메운 것밖에 없었다. 물건이 없어졌단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파업기간 중에도 그와 껄끄러운 스침이 있었으나 인사하지 않았다. 철야가 끝나고 아파트서 봤을 때에야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몇 번 공장에 같이 출근하고 나서는 지금의 사이가 되었다.
돼지새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개소리라 했다.
봄이면 파릇하게 뿜어져 나오는 밭 옆에서 개를 사육했다고 한다. 거기엔 스물 남짓까지만도 먹을 것이 없어 깡말랐던 그가 있었다. 그리고 기억도 못할 아주 어릴 때부터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의 개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나고 자라 어디에 쓰이는지 새로 들어오는 개들은 어디서 데려오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무서웠다. 퍼런 천막 옆을 지나갈 때면, 특히 밤이면 어둠 속에서 눈만 번뜩이는 수십의 개들이 짖어댔다. 빠릿한 걸음으로 지나가도 계속해서 소리가 따라오는 것만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귀를 물어뜯기는 느낌인 것이었다.
카랑이며 높게 물어뜯는 것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츰 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쯤 익숙해진 것이나 그러나 이빨만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은 항상 방 안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털이 곤두서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흰자위가 없는 개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 마리, 딱 한 마리가 그의 머릿속에선 떠돌았다. 개들의 철창 속에 그리고 거기다 두꺼운 판자로 가둬놓은 놈이 있었다. 놈은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고 작은 틈으로 철창 너머를 노렸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녀석이 아닌 놈만이 으르렁대고 있던 것이다. 간혹 퍼렇게 번득이는 눈동자 밑에는 보이지 않아도 드러난 송곳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번은, 돼지새끼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얘들은 누가 사간대요?”
그의 아버지는 초점 없는 눈처럼 말수가 적었다. 언제나 흐릿한 눈동자로 목줄을 끌고 거슬리는 개가 있으면 후드려팼다. 개들은 맞을 때마다 소리를 내고 그리고 귀청에는 맞는 소리도 들려왔다. 돼지새끼는 어렸을 적 그 광경을 따라다니며 몽둥이가 휘둘릴 때마다 눈을 끔뻑였다.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고분고분해진 개들이 힘도 주지 않고 목줄을 따라갔다. 한 때 잠잠해지는 놈들을 보는 맛에 우히거리며 따라다니던 돼지새끼는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그것과 같다는 것을 느껴 그만두게 되고 그리고 그때부터 괴로워졌다. 나가다 우연히 보기라도 하는 날엔 목덜미에서부터 식은땀이 타고 흐르는 것이었다. 맞는 소리에 질끔이고 눈을 감으면 개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오로지 딱, 딱 소리만 들려와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이었다. 개가 맞는 것이다 개가 맞는 것이다 되뇌려도 눈은 감기고 그리고 개의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도 말을 꺼내기가 그토록 힘들었다. 물음에는 어쩌면 예상했듯 침묵만이 따랐다. 그의 아버지는 눈앞에서 버티고 있는 한 마리를 땅에서 떼어낼 뿐이었다.
개의 발버둥과 사람의 침묵 사이에 서있던 돼지새끼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문득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예전보다 더 흐려졌다고 느꼈다. 돼지새끼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나 그러나 감겨오는 두려움에 아버지가 무어라 말하는지도 듣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 빠른 걸음으로 내달았다. 그의 눈빛이 평소에도 그런지 자신을 볼 때 유독인지 돼지새끼의 목덜미에는 어김없이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돼지새끼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개를 사가는 사람들은 개일지도 몰라.”
그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히죽거렸다.
돼지새끼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대답해줄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친구 집에서 잠시 여름방학을 보내는 동안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집터엔 개들의 시체가 검은 뼈를 드러낸 채 수북이 쌓여있었고 시체안치소 약도가 그을린 문짝에 붙어있었다. 폭발한 것도 개들에까지 불지를 이웃도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이후 그는 삼촌의 집에서 지냈다. 형편은 다를 것 없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처먹었다. 눈에 보이는 족족 쓸어 담아서 지금의 살찐 돼지새끼가 되었다. 그렇게 한번 바뀐 체질은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 겁나는지 곤두세우던 돼지새끼는 앉아서 졸았다. 바람이 심해져 창을 흔드는 소리에 움찔 깨고는 나를 보는 것이었다. 멋쩍게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말을 고르는 빛이 역력했다.
“나 잘 때 무슨 일 있거나 하진 않았지?”
“안 지나갔어. 아무도 없었고.”
“아니, 내가 막 소리 지른다든가…….”
창밖에선 거세진 빗발이 눈앞을 흔들고 있었다. 네모난 구멍 속으로 빨려드는 물보라는 드나들 곳 없는 빛을 가리우는 것이었다. 나는 검어지는 저 건물 속 묘한 끌림에 그러나 녀석이 지나가는 것을 못 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 일 전혀 없었다.”
“다행이네.”
돼지새끼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입을 다물었다. 창을 넘어 전해오는 먹먹한 빗소리에 그가 코를 킁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크게 말해.”
돼지새끼는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비 때문에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하라고. 잘 때 소리 지른다며.”
“아. 사실 아버지가 그랬어. 근데 나도 똑같다고 그러더라고. 자주 있는 것은 아냐. 가끔씩 일어나 앉아서 중얼거린다거나 누워 자다 소리 지른대. 근데 그게 아! 이러고 크다는 거야.”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잠버릇도 원래 따라가나?”
“아니 그런 건 아닐걸. 나도 언제부터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 삼촌네 지내면서 처음 알았어. 숙모년이 놀라서 벌컥 열고는 너 뭐하는 거냐고, 일부러 그런 거냐고 하더라. 뭐 한 것도 없는데. 꼭지가 돌아서 확 나가버릴까 하다가 뭐 좋으라고 내가 나가냐 싶어 뒤집어쓰고 누웠지.”
나도 웃음이 터졌다. 통쾌한 것은 좋은 것이었다.
“나중에 뭐더라, 싶다가 아, 아버지랑 같나보더라고.”
쓰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의 얼굴에는 땀이 얼룩져있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송골송골 맺혀 매끈해진 것이었다. 넙대대한 이마 위로 빗방울에 가린 달빛이 긋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돼지새끼는 손을 올려 땀을 닦았다. 그리고 웃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누가 그랬듯, 불 지른 사람이 사라진다고 불이 꺼지진 않는단 말이 그러나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그랬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돼지새끼의 눈이 더욱 쳐졌다.
“아마 내가 어렸을 때 처음 봤을 거야, 물론 그 이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 꽤 조그말 때였는데. 나도 갑자기 문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와 봤더니 아버지는 주무시고 아무도 없더라고. 그 때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뭐라 생각했는데.”
“왜 그 판자때기로 가둬놓은 놈 있잖아, 내가 말한 적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그놈이랑 꿈에서 싸우고 있구나 생각했지.”
“누가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글쎄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릴 땐 물론 그놈 흰자 없는 눈동자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다 싶었기도. 지금 보면 아버지가 이겼을 것 같기도 하고……. 맞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어. 어차피 개나 아버지나 둘 다 무서웠걸랑. 딱히 이겼다고 해서 누구든 나보고 기분 좋다고 할 것 같지 않았어. 끝나고 그 피 흘리는 게 나를 본다고 생각해봐.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알아?”
이번엔 배까지 잡고 쌕쌕대는 숨소리를 재껴내는 것이었다. 말없이 보던 내겐 불에 관한 얘기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삼켰던 말의 죄의식을 따라 그리고 침묵이 자리 잡았다.
돼지새끼는 다시 잠에 들 생각이 없는지 서성이는 것이었다. 바지를 들춰내는 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찬장 따위를 열어 뒤지는 행동거지가 거슬렸으나 그러나 궁금한 것이었다. 여타 볼만한 것도 챙길 것도 없자 조금 풀이 죽은 돼지새끼는 이전의 파란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거 봐, 일긴가?”
그리 생각던 터라 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읽어나갔다.
“첫 장이다.
언니가 말하길 쓰는 게 일에 좋다고 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얼마나 써야 할지…….
재미없는 내용이고. 그림, 그림. 오늘은 A가 나를 찾아왔다.”
스치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난겨울일 것이다 지난겨울일 것이다.
“A가 누구지, 너냐?”
눈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재미없다. 원래 자리 펴서 놔.”
돼지새끼는 입을 닫고 그러나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시인가 봐. 그 여자가 직접 쓴 건가?”
희미하게 웃더니 쥔 채로 갖다 주었다. 말대로 시가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날이었다
돌담 모퉁이에 박혀 최대한
돌처럼
몸을 비틀었다
검은 돌의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많은 이가 지나갔다
바라건대는
아무것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입을 닫고
보도에 벌어진 볕이 아물 때
까지 섰다 절대 아무도
길가의 모든 것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옮겨 적기라도 한 것처럼 고친 것 없는 또박또박한 글씨였다. 나는 원래 펼쳐져 있던 곳을 찾아 내려놓았다. 돼지새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별말 없는 시간만이 간밤의 피로 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혹은 앞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여자는, 여자는 지금 어딘가에서 정확히 누군가의 침대에서 잠을 그러나 아마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노트만 봐서는 조장뿐이었는지 다른 누구 나인지 여자가, 그 여자가 문 앞의 나를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가 그 무엇 때문에 연해지는 빗소리에도 맞춰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잡으려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점점 방울이 걷히더니 이내 새벽이 되었다. 남아있는 안개와 연기와 그리고 우중충한 구름아래 녀석이 기어갔다. 돼지새끼에게 낮게 말했다.
“조용히 나가서 통로 막아.”
돼지새끼가 통로 앞에 서고 나는 방망이를 꽉 쥐었다. 같이 숨을 쉬어줄 빗방울이 필요했으나 그러나 비는 그치고 방망이만을 부러뜨릴 듯이 쥐었다. 손바닥이 아려왔다. 멈추지 못했다.
‘가야 돼.’
녀석에게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밖으로 나왔다. 돼지새끼가 있을 통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돼지새끼는, 돼지새끼는?
그의 머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이고 경비일 것이 그러나 다시 녀석을 돌아봤다. 통로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고 곧바로 향했다. 걸음이 빨라지고 이내 달리고 냅다 후려쳤다. 빗나가면서 땅바닥을 때리고 말았다. 손이 아려 이를 악물었다.
‘후려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녀석은 낑낑대며 도망 가려했다. 나는 숨을 다시 크게 들이쉬고 내리찍었다. 맞았다, 머리에 맞았다. 발로 차고 따라 달려 등가죽을 집었다. 녀석의 검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움푹 파인 구멍 같았다.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리 내지 못하게 목을 잡았다. 방망이도 내동댕이치고 그 여자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얼른 창밖을 내다보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마당과 그 모든 곳 건물 안엔 아무도 없던 것이다. 나는 녀석을 들어 올려 마주 보았다. 퀭한 눈이 까무러치지도 않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뛰는 가슴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 나온 것이다.
“푸힛, 푸히히히히, 후히히…….”
바람이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전혀, 녀석과 나는 친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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