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옆 불이 켜졌다. 파란 드레스를 입고 찾아온 그녀는 소리 없이 내 곁에 누웠다. 내 앞에 놓인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똑…… 똑…… 한껏 느려진 빗방울 소리는 이제 숨을 세 번 쉬어도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네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들려오는 그것은 묘한 침묵과 떨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목선과 어깨와 그리고 얇은 팔과 허리까지 테를 두른 뒤 손짓을 멈췄다. 그녀가 내게 가까이 와 달콤한 향이 코 밑에까지 다가왔다.
“왜 항상 불을 꺼요?”
그녀가 물었다.
“다시 올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그냥 켜놓고 있으면 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켜놓고 있으면 왠지 달라질 것 같아서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녀가 웃었다.
“언제나 오는 걸 알고 있다면서요. 껐다 키면 눈이 시지 않아요?”
“그리 나쁘지 않아요. 새로운 것 같잖아요, 영화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듯이……. 켜진 데선 기다리는 게 지겨워질 것 같아요.”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가라앉은 속눈썹이 한밤의 침묵을 속삭이고 있었다.
“보여줄 게 있어요.”
나는 일어나 책상 위에 오려놓은 신문 광고를 집고 침대로 돌아왔다. 앉아있는 그녀에게 건넸다. 곧 그녀는 다 읽었는지 나에게 눈을 마주했다.
내가 물었다.
“전에 한번 이 말 꺼냈던 거 기억해요?”
“…….”
그녀는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저 웃고 지나가는 얘기처럼 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었어요.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만해요.”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땐 분명 좋겠다고 했잖아요. 달라진 건 없어요. 그 때 했던 말 그대로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 검은 구름의 바다가 있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모를 불빛에 부서진 물방울이 이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나의 귓전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멍멍한 침묵이 그녀의 입에 걸린 채 창과 나 사이를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말없이 창밖을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뭘 원하는 거예요?”
“당신이요. 당신이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이미 다 알잖아요.”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하네요.”
일순, 나는 말을 잃었다.
“말해 봐요, 마음속에 어떤 게 먼저인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아니면 이미 나라고, 얘기해줬기 때문에요?”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다른 어떤 게 중요하죠? 나라면서요. 말해 봐요. 왜 안다고 생각한 건지.”
“…….”
처음이었다. 그녀가 그녀 스스로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억울함이 치밀었다. 당신은 이러면 안 돼, 당신이 왜 이러는지 말해줘.
“왜인지 말해줄게요.”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창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러지 마요.”
“이러지 마요.”
그녀는 나와 동시에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건 중요치 않잖,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건 중요치 않잖,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혐오스럽도록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귀와 눈과 입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키스를 했다. 아니, 키스 한 줄 알았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파란 드레스자락이 물방울의 그림자를 또르르 흘리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공을 찼다. 헥헥거리던 아이들이 어느덧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갈 즈음엔 여느 때처럼 마지막으로 공을 맞는 아이가 공을 교실에 갖다놓는 규칙이 있었다. 멀리서 엉겁결에 공을 맞은 소년은 또 누가 가까이 있나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저기 도망가고 난 후였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의 술래가 자기가 되었음을 안 소년은 김빠지는 어깨와 걸음으로 수돗가로 가 얼굴을 씻었다. 심통이 나 퉁퉁거리며 공을 튀겨 반에 갖다놓고 학교 본관을 나왔다. 여름이어선지 아직도 햇살은 한가로운 오후인 듯이 홀로 남은 소년에게 샐쭉거리는 것이었다. 그에 소년은 아직 갈 때도 되지 않았는데 애들이 갔다며 모래바닥에 발끝을 찼다.
훅훅 찌는 더위에 후문계단을 올라가자니 지겨웠다. 소년은 계단 옆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의 울창한 그늘아래 잠시 앉기로 마음먹었다. 앉아서 미지근한 바람이 종아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 멀리서 퉁, 퉁, 거리는 공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아래 어딘가로 고개를 돌려다보니 여자아이가 있었다. 머리를 묶은 그녀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벽을 향해 공을 치고 있었다. 듣고만 있고 보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어느새 신발주머니도 놓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 신발주머니가 있나 확인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소년은 꿩이 바로 옆 오솔길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나뭇잎 새에서 내려오는 빛의 그물로 꿩의 깃털은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발길을 돌려 숨죽이고 꿩에게로 갔다. 완벽히 잡을 수 있겠다 싶어 미소 지었을 때 꿩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푸드덕대며 달리는 꿩을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따라 달렸다.
“야!”
소년은 여자애에게 소리쳤다. 여자애는 소년이 꿩을 뒤쫓는 것을 보고는 둘 다 코트가 있는 아래쪽으로 오고 있음을 알았다. 라켓을 바닥에 던지고 여자애도 뛰기 시작했다. 꿩이 달려올 오솔길을 따라 숲을 올라갔다. 꿩은 소년의 눈앞에서 잡힐 듯 그러나 잡히지 않았다. 여자애와 소년이 앞뒤로 거의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꿩은 왼쪽의 숲으로 튀어 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덤불 새로 숨어버렸다.
소년은 숨이 가득 찬 목구멍 너머로 안녕, 이라 말하고는 쭈그려 앉았다. 여자애도 난데없는 소동이 재밌었는지 배시시 웃고는 소년을 보며 서있었다. 소년이 연습 몇 시까지 하냐, 고 묻자 여자애는 7시라 대답했다. 소년은 헤, 지겹겠다며 내색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꿩이 어디로 사라졌나 숲을 둘러다 보았다. 소년도 여자애의 고갯짓을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다.”
“저기 있다.”
멀리서 고개를 우스꽝스레 움츠리는 꿩을 보고 동시에 두 아이가 말했다. 여자애가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빨주노초파남보! 하고는 소년의 팔을 꼬집었다. 동시에 같은 말을 하면 무지개의 일곱 색을 찾을 때까지 꼬집는 놀이었다. 소년은 얼른 찾기 위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하나하나 말했다. 앞의 나뭇잎 위에 있던 무당벌레를 가리키며 빨강, 그 옆 다른 무당벌레는 주황, 그리고 저기 테니스코트 노랑, 여기 또 풀 초록, 그리고……. 에, 잠깐만. 남색은 너 지금 입고 있는 옷, 보라색은 너 신발. 그리고……. 파랑은, 파랑은. 소년은 파랑을 찾지 못해 허둥댔다. 팔 끝이 계속 저려오자 소년은 찾기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도망칠 줄 생각 못했던 여자애는 소년이 두발 나가자 그제야 뒤쫓았다. 히히거리던 소년은 신발주머니를 아무렇게나 쥐고는 후문을 향해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두 장의 이력서를 편지봉투에 봉하고 주소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두컴컴한 주택가에선 아무 소리도 없어 치이익, 하고 타오르는 소리가 깊게 빨 때마다 내 귀에까지 전해졌다. 골목 양쪽에 하나씩 뎅그러니 있는 가로등을 둘러봐도 고양이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고 찬바람만이 굴러다니는 이파리들을 흔드는 것이었다. 담배 끝에서 놀고 있는 빨간 불과 나만이 한겨울에 밖으로 내던져진 채 바람 따라 거친 숨을 쉬었다.
푸른 불로 몸을 감싼 화장터의 환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철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히면 푸른 방울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그리고 그 불꽃에 닿아 발끝이 얼어 손이 굳는다. 뜨거운 피와 차가운 냉기가 섞여 심장이 시원하게 녹는다, 그리고 멎는다.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지도 푸른 불도 손톱이 저려오는 것도 없을지 모르는 것이나 그러나 내가 그 겨울의 불상처럼 혹은 그보다 단단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는지 궁금했다. 너무나 알고 싶었는지 손은 바람에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을 돌리려도 고민은 이미 할대로 한 후라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막연히 계획이라 할 수 없는 계획들뿐이었다. 내일 아침에 가면 사직서를 내고……. 만약 안 되면, 설마 안 되기야 하겠다마는 다시 죄송하다 그러고. 또 되면 뭐를 해야 하나. 슬슬 방이랑 물건들 정리하고. 우습게도 순간 사랑니 부근이 아려옴에 이가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양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양치를 하고 그러고 잠에 들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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