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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신경과학자의 대담한 신 존재 증명
마리오 뷰리가드 & 데니스 오리어리 지음, 김영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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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 레드 선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외 지음, 최원서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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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noma.tistory.com/17


  <책의 일부 대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을 남기게 되어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도를 넘어섰다.

  나는 책의 내용 면에서 이렇다 저렇다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충분히 매력있는 이야기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고, 또 기대만큼은 해준다는 걸 인정하는 바다.

  문제는 출판사의 번역과 편집이다. 이 책은, 번역자가 원문 언어만 할 줄 안다고 해서 번역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며, 편집자가 출판에 있어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때 얼마나 웃기는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오탈자는 기본이고 비문이 난무한다. 시공사에서 출간한 그래픽 노벨 중에 "킹덤 컴"이나 "시크릿 워" 등도 나름의 경쟁 상대가 되지만, 이건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몇 개만 골라서 소개한다.

  "...난 심지어 사람들이 말하는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p.9)
  "In my more introspective moments, I even wondered if people were behaving more carelessly in the hope that they might catch a glimpse of ther gaudy circus clown."

  상당히 아름다운 비문이다. 이건 번역 작업에서 동반될 수 있는 원문 해석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원문을 확인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나(I)"이고, 전체 술어부는 "생각한 적도 있다(even wondered)"이다. 그리고 "사람들(people)"에 호응하는 술어는 "하고 있다(behave)"이다. 하지만 번역문에서는 if 절 이하 문장, 즉 "사람들~" 이하의 안긴 문장 처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나"에 대응하는 술어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처럼 보이며, 대신에 "사람들(people)"에 대응하는 술어부는 "말하는"처럼 보인다. 즉 번역된 문장 구조를 고려할 때 그 의미는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나는 경솔한 행동을 했고,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에 대해서 말했고, 나도 그걸 보고 싶었다."

  원문에서 "하고 있다(behave)"의 주어는 "사람들(people)"이지 "나(I)"가 아니다. 이 모든 건 "사람들이 말하는"이라는 구절에서 "사람들"의 주어-술어 호응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혹은, 원문에 더 충실한다면, (아마도) "말하는"에 호응하는 주어인 "그들(they)"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 번역문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술어와 호응한다고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런 경우엔 "말하는"과 호응하는 주어가 없으므로 역시 비문이다. 본래의 번역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제대로 번역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 심지어 사람들이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주어-술어 호응은 그럭저럭 이루어진다. 주어-술어 호응을 문장 안에서 구현하지 못한다는 건 영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한국어가 안 된다는 거다. 아니면 그걸 고칠만큼 성의가 없거나. 이런 예는 더 있다.

  "난 그동안의 시간을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쓸 거야." (p.43)
  "This time will be spent devising a plan to humilate and defeat Superman just as he has humiliated and defeated me."

  놀랄만한 비문이다. 영어 수동태 문장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되면 일견 어색한 것이 사실이고, 능동태로 바꾸어서 번역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그것과 무관하다. 문장을 능동태로 옮기면, 의미상 주어가 "나(I)", 최종 술어는 "쓰다(spend)", 목적어가 "시간(time)"이 되는 건 맞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의 호응 관계가 엉망이다. 원문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이 문장에서 목적어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킨다. 즉 "앞으로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쓸 것이다(will spend)"이지, "그동안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썼다"가 아니다. 아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을  단일한 문장 수식 성분으로 번역하려고 하면서 발생한 오류 같은데, 그렇다면 "그동안"이 수식해야 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이 수식 성분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여하간에 이 문장은 너무 엉망이라서 손을 대기도 힘들다. 그래도 고쳐본다면,

  "난 그동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앞으로의) 시간을 쓸 거야."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just as 이하를 잘라내서 문장 두 개를 만들거나.
  이정도만 해도 번역자나 편집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편집 작업을 한 건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대미를 장식할 표본이 아직 남아 있다. 난 아래 문장을 보면서 울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연구하면서 세상에 그들의 빛나는 '레드 선'이 내 힘을 약하게 하였으며 내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p.-5[뒤에서부터 5페이지])
  "But he's been acting strange lately: working too hard and telling the world that our bright red sun that has dimmed my powers and aged my mind is in danger of consuming us."

  희망이 없다. 의미 전달이 전혀 안 된다. 비문인 건 당연하고, 영어 문장 부호 콜론(:)에 대한 고려도 안 되어 있으며, 아예 해석 자체가 틀려 먹었다.
  제일 큰 문제는, 번역문의 뒷 문장에 주어가 없다는 거다. 즉 "(말)하다"란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가 없다. 주어 없이 완성된 서술문을 만드는 건 초등학생이나 하는 실수다. 대강의 사정은 이해가 간다. 원문에는 콜론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뒷 문장은 앞 문장의 "그(he)"가 "기이하게 행동하는(be acting stange)" 것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독립 문장이 아닌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 문장으로 옮겼을 때 마침표(.)로 콜론을 대체하고 두 부분을 다른 문장들로 완전히 분리했다면, 당연히 뒷 문장에도 "그"라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콜론을 그대로 살리거나.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고 해도, 번역자가 원문이나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의문이다. 원문에서 telling 이하만 보면, 이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는 물론 "그(he)"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번역문에서 그는, 의미상 다음과 같은 걸 말한다.

  - 빛나는 레드 선이 나(슈퍼맨)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나(슈퍼맨)의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Red sun that has dimmed my power. And My mind is in danger of consuming us.)

  한국어 문장만 봐도, 책 전체의 이야기 내용만 봐도, 이 문장이 의미상 틀려 먹었다는 건 누구나 알 거다. 가장 큰 문제는 red sun 뒤에 있는 that을 관계 대명사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면 그걸 못 봤거나. 전자라면 이건 언어적인 감각이나 번역 실력 이전에 영어 문법이 안 된다는 거다. 이런 결과물은, 그러면서도 대강의 의미만 끼워 맞춰서, 마치 인터넷 번역기 돌리듯이 해석한 결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제대로 번역한다면, 뒷 문장에서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을 거다.

  -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이성)을 지치게 한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의미상으로도 이게 맞다. 한편, 이 실수가 너무 커서 뭐라 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번역문에서 대체 "세상에"는 뭔가? 이렇게 써 놓으면, 읽는 사람의 대다수는 "세상에 빛나는"으로 붙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단어를 목적어 뒤, 즉 동사에 붙여 쓰는 게 한국어에서는 더 읽기 편하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저런 의미로 옮긴 것은 아니겠지. 그러길 빈다. 돈을 받고 번역 작업을 하는 전문 번역자가, 인쇄된 출판물을 판매하는, 그것도 꽤 이름있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그런 실수를 한다는 건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다시 번역해보면,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연구에 매진하면서,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을 지치게 한 저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약간의 의역과 모호한 문장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의미 전달에 이상은 없다고 생각된다.
  실무 번역자들이 번역 자체에 관한 성찰을 반드시 할 필요는 없다. 번역 작업이 갖는 철학적인 의미들과 무관한 영역에서도, 번역은 극히 어려운 일이고, 언어 능력과 감각이 뛰어난 사람 역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들이 완전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영어 실력은 그닥 좋지 않으며, 한국어 실력이나 언어 감각도 높지 않다. 아마 이 글에도 비문이나 문장 오류가 몇몇 있을테다. 따라서 나한테 다른 사람의 번역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건 꽤 올바른 생각일게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더라도 너무하다고 여길 정도로, 이 책은 편집과 번역이 원서를 처절하게 망쳐놓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아이언맨"마저 이 모양이라면, 이 번역자의 작품은 불매 운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픽 노벨에 대한 애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번역자와 출판사가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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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맨 The SandMan 9 - 친절한 그들 시공그래픽노블
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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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샌드맨 7권 "짧은 생애Brief Lives"에 대해서, 여지껏 국내에 발매된 The Sandman 라이브러리 가운데 그것을 최상의 것으로 고르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쓴 적이 있다. 동시 발매되었던 8권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예감했지만, 이 말은 고작 두 달도 안된 지금에 와서는 응당 재고해야할 필요가 었어 보인다. 물론 동일작가의 연작을 놓고 이게 더 좋으니 나쁘니 하는거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정도의 투정일 뿐이며, 가끔 삼촌이나 할머니가 더 좋다는 아이들도 올바르게 자라나는데 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9권 "친절한 그들The Kindly Ones"은 여러 의미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질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 이야기 구성 자체의 훌륭함이야 다른 편들도 전혀 뒤떨어질 것 없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 전체 샌드맨 시리즈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최정점에 자리한다. 즉 여기에는 그간 등장했던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이 재등장하고, 1권부터 액자식으로 전해졌던 각 이야기들이 전체 흐름 속에서 정돈되며, 그 전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이 드러난다. 사실 국내 발간된 샌드맨 책들의 소개를 참고한다면 아직 두 권, 즉 10권 "장례전야The Wake"와 11권 "영원의 밤The Endless Night"이 더 남아있지만, 샌드맨 이야기 전반적인 흐름은 여기에서 종결된다고 생각해도, 혹여 '끝'이라는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 번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의 원숙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과 색채, 인물 표현은 물론 편집도 훌륭하며, 분량은 "짧은 생애"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만약 라이브러리 초반의 거칠면서도 세심한 펜선을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그림체에 대해 약간은 불평할지도 모르지만, 라이브러리 후반에 종종 등장했던 -- 예컨대 8권 "세상의 끝Worlds' End" 가운데 '글루라칸의 이야기' -- 대담한 색채와 묘사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우리말 번역도 나쁘지 않고, 역주도 친절하다. 다만 전체 라이브러리에서의 위치상 "친절한 그들"은 독립된 것으로 읽기가 쉽지 않으므로, 앞선 책들을 어느 정도 읽어 본 다음에 읽어볼 필요는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한 이야기의 종결점이며, 거의 모든 에피소드들에 대한 반향과 함께 주요 인물들이 제각기 등장하고 또 엇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 여기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건 직접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는 편이 나을테고, 나아가 한번 옮겨버린 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이야기를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호기심과 기억의 거부할 수 없는 습관에 따라 아주 잠시만 뒤돌아보자면, 모르페우스가 로더릭 버제스의 비밀 결사대에 납치되어 70년 이상 감금당하고 풀려난 뒤("서곡과 야상곡Preludes and Nocturnes") '파괴Destruction'를 찾는 여행이 최후의 결과를 낳을 때까지("세상의 끝") 대략 5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우리가 닐 게이먼으로부터 전해들은 그 5년간의 다사다난한 '꿈Dream'의 여정은 어떤 일들로 이어질 것인가? 그 시간은 형성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에게 관련되었던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예컨대 영원한 각성을 선물받은 알렉스와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받은 존 콘스탄틴("서곡과 야상곡")은 어떻게 되었나? 기나긴 의무에서 벗어난 오르페우스의 신관들과 '분열Delirium'이 돌보게 된 바나바Barnabas("짥은 생애")는 어디에 있는가? 로즈 워커와 그녀의 친구들, 헥터 할과 그의 아내 히폴리타, 아들 다니엘("인형의 집Doll's House" 및 "우화들Fables &Reflections")은? 석양을 바라보던 루시퍼와 되살아난 찰스 롤랜드("안계의 계절Season of Mists"), 홉고블린 퍽Puck("꿈의 땅Dream Country"), 테살리인 마녀와 교활한 뻐꾸기("당신의 게임Game of You")를 비롯하여, 다른 '영원Eternity' 일족들과 한여름 밤의 요정들, 조각된 범신들과 꿈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들 모두는 어떻게 변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이 목록은 "친절한 그들"에 담긴 내용에 대한 적확한 질문들은 아니며, 또한 완성된 질문들도 아니다. 개중에는 관련없는 사건들도 있고, 지극히중요하지만 빠진 인물들도 있으며, 아예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여하간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일이다. -- 실제로 이 책의 서문에는 이야기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다면 서문은 건너뛰는 것이좋다. --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보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라이브러리 전체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되었던 "짧은 생애"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의도되건 의도되지 않았건 대체로 그 이전부터 준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1권 "서곡과 야상곡"의 '그녀의 날개소리'에서부터, 또한 운명과 선택, 전체와 부분(개인), 현상과 이면의 교차가 낳는 새로운 관점들 및 영원의 의미에 대한 탐색과 필멸의 가치에 대한 고민, 현실의 나약함과 몽상의 위대함이 제시되었던 모든 문맥과 설긴 여백들로부터.
-- 내가 직접 책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 그렇게 해서 한 차례의 현실-폭풍이 지나기지만, 이야기를 이루었던 각각의 부분들은 이야기 자체의 종결과는 무관하게 제 나름대로 지속한다. 카인이 인용한 말처럼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수수께끼, 즉 의문 자체이다. 이야기 내부에서조차 우주는 계속되고, 사람들은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며, 언제든 재생되고 창조될 여백과 기다림들이 존재한다.

  무안스레 표지에도 적혀 있듯이 샌드맨 이야기는 언제나 독립적인 완결을 지향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원하는가, 원경에서 비춰진 전체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부차적이다. 실로 모종의 신격을 향한 "친절한 그들"이란 제목에서부터 이것이 일종의 신화myth이자 비극tragedy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선후 관계과 인과 관계는 유기적인 전체 안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각각의 위치에 관련될 따름이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은 기승전결로 완성되는 도도한 열 시간짜리 영화 필름이 아니라, 독립된 깊이를 간직한 작품들이 전시된 영원의 회랑이요,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모티브들이 결합된 교향곡이다. 따라서 이 책을 위해 고전적인 신화를 외우거나 『오레스테스』를 읽을 필요는 거의 없다. -- 게다가 현존하는 『오레스테스』대본은 가장 오래된 것조차 너무 예의바르다 -- 그런 시도가 이야기의 배경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읽는 재미를 더할 것임은 분명하겠지만, 전혀 걱정하지 마시기를. 닐 게이먼은 여전히 친절하고, 설득력있는 표현과 훌륭한 이미지를 곁들일 줄 알며, 나아가 모든 책은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권고받더라도 별다른 댓가를 요구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http://onoma.tistory.com/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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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컷 (2DISC) - 본편 BD + 부가영상 DVD
리들리 스콧 감독, 다릴 한나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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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컨트Replicant는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힘과 순발력, 지능을 지닌 채 유전 공학자들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창조된다. 비록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과 동등한 혹은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특정한 목적과 의지를 간접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기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즉 어디까지나 레플리컨트란 인간의 편리와 확장의 이념에 존재하는, 좀 더 진보적인 도구tool에 불과하다. 하여 만약 그것이 쓸모없어진다면, 즉 창조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도구로서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게 된다면, 단지 파괴되거나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창조주인 인간의 사용 의지를 더욱 자연스레 구현하기 위하여 이 영민한 도구는 인간과 같은 외형과 정서 반응, 언어 사용, 대뇌 매커니즘, 유기체적 조직을 갖춘 유사-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인간의 신체 및 정신과 감정, 마음을 완전히 해석하고 설계할 수 있는 유전자 생물학과 생물학적 인지과학의 발전이 전제됨으로써, 이 유사-인간의 능력을 구현하는 매커니즘 자체가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특정한 기억을 구성하고 그것을 독립된 시스템 속에 종속시키는 유기체적-정신적 매커니즘 역시 구현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러한 기억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레플리컨트에게 부여하는 한편, 현재 속에서 의식과 의식-외부의 상호 관계에 대한 적응 능력을 선사하는 근본적인 바탕, 말하자면 각 개인의 의식-정체성을 안정시키는 중추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범위의 차이는 존재하더라도 유사-인간의 독립된 의식 작용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레플리컨트가 자신을 외부의 의지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유기체적-정신적-의지적 활동을 펼쳐나가는 독립 개체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만들어진 유사-인간과 순수한 자연적 인간은 신체적인 능력의 수준 차이와 함께 정서적 반응의 깊이와 안정성의 차이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요컨대 이 유사-인간은 인간과 동일한 인간-존재로서 세계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하는 방법인 Voight-Kampff 테스트조차 명쾌한 이분법적 결과를 즉각 산출하지 못한다. 즉 여기서 인간과 레플리칸트, 즉 유사-인간은 그것이 존재하는 매커니즘의 현실적 구현에 대하여 정도degree 차이만을 포함할 뿐 본질적으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특성이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결과적인 구별 불가능성, 결과의 검증 불가능성이 두 개체를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닐 테지만 -- 제한된 범위 안에서 -- 양자가 동일한 가치에 의해 판단될 하나의 근거가 됨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인간들은 레플리컨트의 죽음을 퇴거retirement라 부른다. 인간은 어떠한 권리에 의해 탄생한 생명의 죽음을, 이 세계에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죽음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존재는 인간-존재의 영역에 관한 의문의 근본적인 계기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영화 속에서 이는 창조주로서의 지위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거부된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타자적인 도구와 구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은 그들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인간의 내부적인 존재론적 층위를 자기 외부의 유사적 존재들에게 제약적으로 확대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 본래 유사-인간에 의해 초래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호성은 그것의 설계 과정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다. 말하자면 유사-인간의 실제적인 등장이 의미하는 인간 혹은 의식-생명에 관한 해석적 매커니즘은 창조주들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고, 이에 그들은 더 이상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자연적 생명이 아니라 과학 기술에 의해 포섭되고 다루어지는 개체적인 분열을 맞게 된다. 이 분열이 낳은 양면성의 극단은 영화 속에서 레플리컨트를 창조하는 테일러Tyrell와 그들을 파괴하는 데커드Deckard로 수렴하며, 보다 일반적으로 부의 계층적 서열화와 양극화로 묘사된다. 즉 유사-인간의 등장은 그것에 부여되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관한 모순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계층화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 조건에 관한 내부의 분열과 그 분열이 역설적으로 생산하는 인간 조건의 폐쇄성이다. 그렇기에 레플리컨트의 기억은 -- 비록 그것이 가상일지라도 --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이식되며, 모든 과거는 하나의 문서로서 저장되어 그들로부터 외재화된다. 이와 함께 레플리컨트에게 주어진 4년의 수명, 즉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도구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인간의 의지와 목적에 반하도록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안전장치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자신과 같은 존재임을 거부하는 인간의 기만과 폭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이 하나의 단위로서 세계의 무규정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확신 속에서, 그것과 동등한 의식 활동의 귀결을 보장받은 유사-인간의 의식은 한갓 꿈일 뿐이고, 유사-인간의 자의식과 권리 주장은 작동상의 오류일 따름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제작물에 부여되는 심리적인 우월성의 투영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유사-인간의 등장 속에서도, 인간 자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 조건의 선험적 규정을 파괴함으로서만,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한계를 거부함으로서만 진정으로 재고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블레이드 러너』는 자신의 질문에 관한 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인간을 다른 사물들과 구별하는,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짓는 근거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신에 그것의 불확정성을 냉정하게 제시한다. 이는 영화가 기존의 인간 조건으로부터 탈선된 영역을 새로이 규정짓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비극성, 즉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는 현실 자체를 표현하는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포스트모던적 가치들을 부여하는 해석은 단지 형식일 뿐,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관계는 양자 모두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 그러한 이중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사실성이 이 영화의 시선을 지배한다. 레플리컨트의 삶은 가상이며 인간의 삶이란 실제인가? 혹은 레플리컨트의 삶이 인간의 기만적 삶보다 더 실제적인가? 양자 삶은 동일한 현실이자 오직 단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레이첼Rachel과 데커드의 도피로부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들의 사랑은 무언가 새로운 현실을 희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로이Roy와 프리스Pris 역시 서로를 사랑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던가. 가프Gaff의 오리가미와 기획된 4년간의 수명은 침묵처럼 언제나 놓여있다. 아마 레이첼과 데커드의 죽음도 로이의 독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에 하나로 기억될 그의 마지막 독백 -- 정확히 독백은 아니지만 -- 은 다음과 같다.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ä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the rain.
…Time to die."



   로이의 모든 것은 하나의 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은 기획된 설계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그 죽음은 예정 조화의 실현일 뿐이다. 그의 눈물이 내리는 비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거기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니콘이 달리는 숲 속, 투명하게 뻗어나가는 별빛, 거대한 건축물에 의해 펼쳐진 광활한 시야, 먼 과거의 추억과 사진들, 그들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말해주듯 그들이 서로를 향해 서 있는 세계는 온전하게 닫혀있다. 결국 인간의 추함과 유사-인간의 고통이 무한히 지속되는 디스토피아를 영속시킴으로써 영화는 인간-존재에 관한 열망이 -- 로이의 죽음을 통해서 -- 낳게 될 희망이 아니라 그에 관한 망각과 함께 불가해가 의미하는 무량한 슬픔으로 인간-존재 자체를 결정화한다. 즉 영화 속에서의 인간이란 결코 질문하지 않으며 유사-인간이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로이의 독백에서 함열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감정적인 지도는 죽음의 공포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에, 유사-인간의 죽음이 인간보다 더 고결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연인과 친구를 죽인 인간을 도리어 구원한다는 사실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기만적인 무능력함과 측정할 수 없는 무의미함에 의해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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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크리스 웨어 지음,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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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지미 코리건에 관한 이 책에 대해서 국내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실제로 만화가이자 예술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 크리스 웨어Chris Ware에 대해서조차 거의 소개된 적 없으니까. 그렇다고해서 우리네 인생이 다른 이들보다 더 비참한 것임이 증명되진 않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으며 읽을만한 이야기들은 끝이 없으니, 꼬리뼈도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채 육해공을 활보하는 다윈의 자손들에게 이쯤은 가볍게 무시하더라도 죄가 되진 않으리라. 게다가 작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이를 읽는다고 해서 삶이 한껏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닐테니 말이다(이 가설은 어느 정도 증명된 바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 책의 소개에 쓰여진, 그리고 앞으로도 쓰이게 될 찬사들만으로도 수많은 잉크와 종이가 소비된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물론 미디어의 현학적인 과장에 질려버린지 오래인 사람들에게, 10년이 다되어가는 수상 내역과 진부한 후렴구처럼 붙어있는 '최고''새로움'이니 하는 소리들은 출판 홍보팀의 역량 증명과 소비 충족 효과를 위한 최면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하물며 이 이름없는 독자가 붙여놓은 한 페이지짜리 소개서 따위는, 실로 아무것도 아니거나, 화려한 광고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었던 실용물에 실망한 구매자가, 실망을 안고 혼자서 외로이 죽을 수는 없다는, 혹은, 일반 도서의 두 배가 넘는 금액 손실에 힘입어 자기 만족과 과시욕에 취해 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그런 야멸찬 의도에서 작성했다고 의심해 볼만하다.

  당신의 공정하고 적절한 의심을 다시금 의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재고할 기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은 충분히 의심해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나 역시 그 길고 긴 예술사의 패배자들과 더불어 천재들에 대한 애증과 천재적 작품을 향한 동경과 질투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확실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자 가장 외로운 어른이며, 무엇과도 교류하지 못한 채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상상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지미 코리건에 대한 이 책이,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예술 작품들과 텍스트들을 뛰어넘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대신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자 가장 외로운 어른이며, 무엇과도 교류하지 못한 채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상상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지미 코리건에 대한 이 책은, 만화이기 때문에 다른 예술 작품들과 텍스트들을 뛰어넘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깊이에 도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전달하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흐름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따라서 연결된 각 프레임 간의 관계는 그 자체로 해석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는 통상적인 이미지-말풍선이 가졌던 담화-구상의 종속 관계를 벗어나 일러스트레이션, 타이포그래피, 사전적 활용, 종이접기, 카드놀이 등등의 형식으로 옮겨가며 자유롭게 연관되어 있고, 그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극적인 집약, 자유로운 시공간적 이미지 전환은 물론 종이의 여백과 양면까지도 활용된다. 요컨대 여기에는 이미지와 그것의 구성이 갖는 시각 효과 자체가 어떻게 보조적인 수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는지, 나아가 한 권의 책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그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시도들이 담겨 있다. 즉 그것은 오직 인쇄된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그것만이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새로운 시도들에 비례하여, 이 책을 읽는(보는) 것은 분명 쉽지만은 않다. 아니,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연속되는 이미지를 볼(읽을) 때 발휘하는 특유의 직관을 새롭게 확장시키기를, 그러니까 어느 정도 새로운 방식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겁먹거나 경건해질 필요는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매우 직관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풀어 놓기 때문이다. 지미'들'의 이야기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고 배치되는 방식, 그들의 가계에 대한 추척이 시각적인 연결을 통해 제시되는 방식, 상상과 현실의 교차가 사건들 안에서 전환되고 확장되는 방식 등은 난해하고 지루한 퍼즐, 추상적인 작가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직관적이고 경쾌한 -- 동시에 상당히 치밀하고 냉소적인 -- 농담에 가깝다. 여전히 그것은 만화책이고, 오후 3시의 어설픈 기대와 버림받은 추억, 대기실의 지루한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최상의 선택인 셈이다. 

  습관화된 지성과 감각의 사용법들을 재고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없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 중 대부분은 작가와 편집자들이 정도껏 대비해 놓은 상태이다(그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책 안에 포함된 안내서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이름없는 독자의 부질없는 찬양과 해설은 한갓된 사설에 불과하다. 『지미 코리건』은 이런 이야기들이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좋은 책이며, 설사 이에 반대하더라도 굉장히 독특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다시 한번 크리스 웨어의 작업에게 경의를 표한다.



첨언 : 책의 각 부분들을 다 읽고, 표지까지 펼쳐본 후에도 도저히 지미의 가계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음 웹페이지를 방문해보는 것이 좋겠다. (주의 : 그러나 아래와 같은 방식의 표현은 이 "책"이 지닌 본래의 매력과는 별개의 것임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www.acmenoveltyarchive.org/media/video/159.swf



 

onoma.tistory.com/7 (이상은 블로그에 작성된 리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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