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컷 (2DISC) - 본편 BD + 부가영상 DVD
리들리 스콧 감독, 다릴 한나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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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컨트Replicant는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힘과 순발력, 지능을 지닌 채 유전 공학자들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창조된다. 비록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과 동등한 혹은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특정한 목적과 의지를 간접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기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즉 어디까지나 레플리컨트란 인간의 편리와 확장의 이념에 존재하는, 좀 더 진보적인 도구tool에 불과하다. 하여 만약 그것이 쓸모없어진다면, 즉 창조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도구로서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게 된다면, 단지 파괴되거나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창조주인 인간의 사용 의지를 더욱 자연스레 구현하기 위하여 이 영민한 도구는 인간과 같은 외형과 정서 반응, 언어 사용, 대뇌 매커니즘, 유기체적 조직을 갖춘 유사-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인간의 신체 및 정신과 감정, 마음을 완전히 해석하고 설계할 수 있는 유전자 생물학과 생물학적 인지과학의 발전이 전제됨으로써, 이 유사-인간의 능력을 구현하는 매커니즘 자체가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특정한 기억을 구성하고 그것을 독립된 시스템 속에 종속시키는 유기체적-정신적 매커니즘 역시 구현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러한 기억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레플리컨트에게 부여하는 한편, 현재 속에서 의식과 의식-외부의 상호 관계에 대한 적응 능력을 선사하는 근본적인 바탕, 말하자면 각 개인의 의식-정체성을 안정시키는 중추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범위의 차이는 존재하더라도 유사-인간의 독립된 의식 작용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레플리컨트가 자신을 외부의 의지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유기체적-정신적-의지적 활동을 펼쳐나가는 독립 개체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만들어진 유사-인간과 순수한 자연적 인간은 신체적인 능력의 수준 차이와 함께 정서적 반응의 깊이와 안정성의 차이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요컨대 이 유사-인간은 인간과 동일한 인간-존재로서 세계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하는 방법인 Voight-Kampff 테스트조차 명쾌한 이분법적 결과를 즉각 산출하지 못한다. 즉 여기서 인간과 레플리칸트, 즉 유사-인간은 그것이 존재하는 매커니즘의 현실적 구현에 대하여 정도degree 차이만을 포함할 뿐 본질적으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특성이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결과적인 구별 불가능성, 결과의 검증 불가능성이 두 개체를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닐 테지만 -- 제한된 범위 안에서 -- 양자가 동일한 가치에 의해 판단될 하나의 근거가 됨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인간들은 레플리컨트의 죽음을 퇴거retirement라 부른다. 인간은 어떠한 권리에 의해 탄생한 생명의 죽음을, 이 세계에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죽음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존재는 인간-존재의 영역에 관한 의문의 근본적인 계기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영화 속에서 이는 창조주로서의 지위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거부된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타자적인 도구와 구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은 그들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인간의 내부적인 존재론적 층위를 자기 외부의 유사적 존재들에게 제약적으로 확대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 본래 유사-인간에 의해 초래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호성은 그것의 설계 과정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다. 말하자면 유사-인간의 실제적인 등장이 의미하는 인간 혹은 의식-생명에 관한 해석적 매커니즘은 창조주들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고, 이에 그들은 더 이상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자연적 생명이 아니라 과학 기술에 의해 포섭되고 다루어지는 개체적인 분열을 맞게 된다. 이 분열이 낳은 양면성의 극단은 영화 속에서 레플리컨트를 창조하는 테일러Tyrell와 그들을 파괴하는 데커드Deckard로 수렴하며, 보다 일반적으로 부의 계층적 서열화와 양극화로 묘사된다. 즉 유사-인간의 등장은 그것에 부여되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관한 모순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계층화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 조건에 관한 내부의 분열과 그 분열이 역설적으로 생산하는 인간 조건의 폐쇄성이다. 그렇기에 레플리컨트의 기억은 -- 비록 그것이 가상일지라도 --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이식되며, 모든 과거는 하나의 문서로서 저장되어 그들로부터 외재화된다. 이와 함께 레플리컨트에게 주어진 4년의 수명, 즉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도구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인간의 의지와 목적에 반하도록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안전장치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자신과 같은 존재임을 거부하는 인간의 기만과 폭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이 하나의 단위로서 세계의 무규정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확신 속에서, 그것과 동등한 의식 활동의 귀결을 보장받은 유사-인간의 의식은 한갓 꿈일 뿐이고, 유사-인간의 자의식과 권리 주장은 작동상의 오류일 따름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제작물에 부여되는 심리적인 우월성의 투영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유사-인간의 등장 속에서도, 인간 자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 조건의 선험적 규정을 파괴함으로서만,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한계를 거부함으로서만 진정으로 재고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블레이드 러너』는 자신의 질문에 관한 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인간을 다른 사물들과 구별하는,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짓는 근거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신에 그것의 불확정성을 냉정하게 제시한다. 이는 영화가 기존의 인간 조건으로부터 탈선된 영역을 새로이 규정짓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비극성, 즉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는 현실 자체를 표현하는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포스트모던적 가치들을 부여하는 해석은 단지 형식일 뿐,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관계는 양자 모두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 그러한 이중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사실성이 이 영화의 시선을 지배한다. 레플리컨트의 삶은 가상이며 인간의 삶이란 실제인가? 혹은 레플리컨트의 삶이 인간의 기만적 삶보다 더 실제적인가? 양자 삶은 동일한 현실이자 오직 단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레이첼Rachel과 데커드의 도피로부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들의 사랑은 무언가 새로운 현실을 희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로이Roy와 프리스Pris 역시 서로를 사랑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던가. 가프Gaff의 오리가미와 기획된 4년간의 수명은 침묵처럼 언제나 놓여있다. 아마 레이첼과 데커드의 죽음도 로이의 독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에 하나로 기억될 그의 마지막 독백 -- 정확히 독백은 아니지만 -- 은 다음과 같다.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ä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the rain.
…Time to die."



   로이의 모든 것은 하나의 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은 기획된 설계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그 죽음은 예정 조화의 실현일 뿐이다. 그의 눈물이 내리는 비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거기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니콘이 달리는 숲 속, 투명하게 뻗어나가는 별빛, 거대한 건축물에 의해 펼쳐진 광활한 시야, 먼 과거의 추억과 사진들, 그들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말해주듯 그들이 서로를 향해 서 있는 세계는 온전하게 닫혀있다. 결국 인간의 추함과 유사-인간의 고통이 무한히 지속되는 디스토피아를 영속시킴으로써 영화는 인간-존재에 관한 열망이 -- 로이의 죽음을 통해서 -- 낳게 될 희망이 아니라 그에 관한 망각과 함께 불가해가 의미하는 무량한 슬픔으로 인간-존재 자체를 결정화한다. 즉 영화 속에서의 인간이란 결코 질문하지 않으며 유사-인간이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로이의 독백에서 함열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감정적인 지도는 죽음의 공포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에, 유사-인간의 죽음이 인간보다 더 고결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연인과 친구를 죽인 인간을 도리어 구원한다는 사실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기만적인 무능력함과 측정할 수 없는 무의미함에 의해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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