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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맨 The SandMan 9 - 친절한 그들 ㅣ 시공그래픽노블
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샌드맨 7권 "짧은 생애Brief Lives"에 대해서, 여지껏 국내에 발매된 The Sandman 라이브러리 가운데 그것을 최상의 것으로 고르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쓴 적이 있다. 동시 발매되었던 8권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예감했지만, 이 말은 고작 두 달도 안된 지금에 와서는 응당 재고해야할 필요가 었어 보인다. 물론 동일작가의 연작을 놓고 이게 더 좋으니 나쁘니 하는거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정도의 투정일 뿐이며, 가끔 삼촌이나 할머니가 더 좋다는 아이들도 올바르게 자라나는데 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9권 "친절한 그들The Kindly Ones"은 여러 의미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질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 이야기 구성 자체의 훌륭함이야 다른 편들도 전혀 뒤떨어질 것 없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 전체 샌드맨 시리즈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최정점에 자리한다. 즉 여기에는 그간 등장했던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이 재등장하고, 1권부터 액자식으로 전해졌던 각 이야기들이 전체 흐름 속에서 정돈되며, 그 전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이 드러난다. 사실 국내 발간된 샌드맨 책들의 소개를 참고한다면 아직 두 권, 즉 10권 "장례전야The Wake"와 11권 "영원의 밤The Endless Night"이 더 남아있지만, 샌드맨 이야기 전반적인 흐름은 여기에서 종결된다고 생각해도, 혹여 '끝'이라는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 번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의 원숙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과 색채, 인물 표현은 물론 편집도 훌륭하며, 분량은 "짧은 생애"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만약 라이브러리 초반의 거칠면서도 세심한 펜선을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그림체에 대해 약간은 불평할지도 모르지만, 라이브러리 후반에 종종 등장했던 -- 예컨대 8권 "세상의 끝Worlds' End" 가운데 '글루라칸의 이야기' -- 대담한 색채와 묘사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우리말 번역도 나쁘지 않고, 역주도 친절하다. 다만 전체 라이브러리에서의 위치상 "친절한 그들"은 독립된 것으로 읽기가 쉽지 않으므로, 앞선 책들을 어느 정도 읽어 본 다음에 읽어볼 필요는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한 이야기의 종결점이며, 거의 모든 에피소드들에 대한 반향과 함께 주요 인물들이 제각기 등장하고 또 엇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 여기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건 직접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는 편이 나을테고, 나아가 한번 옮겨버린 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이야기를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호기심과 기억의 거부할 수 없는 습관에 따라 아주 잠시만 뒤돌아보자면, 모르페우스가 로더릭 버제스의 비밀 결사대에 납치되어 70년 이상 감금당하고 풀려난 뒤("서곡과 야상곡Preludes and Nocturnes") '파괴Destruction'를 찾는 여행이 최후의 결과를 낳을 때까지("세상의 끝") 대략 5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우리가 닐 게이먼으로부터 전해들은 그 5년간의 다사다난한 '꿈Dream'의 여정은 어떤 일들로 이어질 것인가? 그 시간은 형성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에게 관련되었던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예컨대 영원한 각성을 선물받은 알렉스와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받은 존 콘스탄틴("서곡과 야상곡")은 어떻게 되었나? 기나긴 의무에서 벗어난 오르페우스의 신관들과 '분열Delirium'이 돌보게 된 바나바Barnabas("짥은 생애")는 어디에 있는가? 로즈 워커와 그녀의 친구들, 헥터 할과 그의 아내 히폴리타, 아들 다니엘("인형의 집Doll's House" 및 "우화들Fables &Reflections")은? 석양을 바라보던 루시퍼와 되살아난 찰스 롤랜드("안계의 계절Season of Mists"), 홉고블린 퍽Puck("꿈의 땅Dream Country"), 테살리인 마녀와 교활한 뻐꾸기("당신의 게임Game of You")를 비롯하여, 다른 '영원Eternity' 일족들과 한여름 밤의 요정들, 조각된 범신들과 꿈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들 모두는 어떻게 변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이 목록은 "친절한 그들"에 담긴 내용에 대한 적확한 질문들은 아니며, 또한 완성된 질문들도 아니다. 개중에는 관련없는 사건들도 있고, 지극히중요하지만 빠진 인물들도 있으며, 아예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여하간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일이다. -- 실제로 이 책의 서문에는 이야기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다면 서문은 건너뛰는 것이좋다. --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보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라이브러리 전체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되었던 "짧은 생애"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의도되건 의도되지 않았건 대체로 그 이전부터 준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1권 "서곡과 야상곡"의 '그녀의 날개소리'에서부터, 또한 운명과 선택, 전체와 부분(개인), 현상과 이면의 교차가 낳는 새로운 관점들 및 영원의 의미에 대한 탐색과 필멸의 가치에 대한 고민, 현실의 나약함과 몽상의 위대함이 제시되었던 모든 문맥과 설긴 여백들로부터. -- 내가 직접 책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 그렇게 해서 한 차례의 현실-폭풍이 지나기지만, 이야기를 이루었던 각각의 부분들은 이야기 자체의 종결과는 무관하게 제 나름대로 지속한다. 카인이 인용한 말처럼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수수께끼, 즉 의문 자체이다. 이야기 내부에서조차 우주는 계속되고, 사람들은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며, 언제든 재생되고 창조될 여백과 기다림들이 존재한다.
무안스레 표지에도 적혀 있듯이 샌드맨 이야기는 언제나 독립적인 완결을 지향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원하는가, 원경에서 비춰진 전체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부차적이다. 실로 모종의 신격을 향한 "친절한 그들"이란 제목에서부터 이것이 일종의 신화myth이자 비극tragedy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선후 관계과 인과 관계는 유기적인 전체 안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각각의 위치에 관련될 따름이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은 기승전결로 완성되는 도도한 열 시간짜리 영화 필름이 아니라, 독립된 깊이를 간직한 작품들이 전시된 영원의 회랑이요,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모티브들이 결합된 교향곡이다. 따라서 이 책을 위해 고전적인 신화를 외우거나 『오레스테스』를 읽을 필요는 거의 없다. -- 게다가 현존하는 『오레스테스』대본은 가장 오래된 것조차 너무 예의바르다 -- 그런 시도가 이야기의 배경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읽는 재미를 더할 것임은 분명하겠지만, 전혀 걱정하지 마시기를. 닐 게이먼은 여전히 친절하고, 설득력있는 표현과 훌륭한 이미지를 곁들일 줄 알며, 나아가 모든 책은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권고받더라도 별다른 댓가를 요구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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