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년, e-pub

소설은 대체로 쉬는 시간에 읽기 때문에 작가가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하는 sf는 나에게는 먼 장르였다. 무협 역시 세계관이 존재하지만, 역사와 맞물려있는데다가 일관성이 있으므로 크게 어렵지는 않은데 (무협은 분량이 장벽이다) sf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게다가 나에게는 이과적인 기척만 느껴져도 머리가 아프고 글자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불치병이 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가가 만든 세계를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현실의 문제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었으며, 무겁지 않았다.

다만. 

달에 식민지를 만들고,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세계에서도 여성은 그 지겨운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혁명가인 여성이 등장할 때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섹시함'을 강조하는 묘사가, 22세기든 23세기든, 지구인이 달로 가든 화성으로 가든 성역할은 변하지 않을것이라는 선포같았다. 로봇과, 우주와, 그 새로운 세계에서도 여성은 두 가지 부류였다. '섹시한 워킹우먼' (저돌적이고 '당차'지만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은 부족한)과 따스한 조력자(엄마같은 아내). 차라리 사극이면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서 그런가보다,하겠지만 사극을 볼때의 감정으로 굳이 sf를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달의 무자비한...은 몇 십년전의 작품이라 그런가보다했고, 그것을 이유로 작가를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즐거웠던 마음이 조금 식어버렸다.

그러나 당연히 세상은 바뀌고,

재능있는 작가들은 보다 나은 세계를 그려준다.

고정화되지 않은 여성. 입술이나 목선, 가슴이 묘사되지 않는,

각자의 개성을 가진 평범한 여자사람들이 나온다. 당연히 이야기에 몰입하기 쉬워진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모든 이야기가 좋았다.

좀비가 창궐하는 세상에 직면하여 옥탑방에서 버텨나가던 사람의 이야기도,

지렁이가 지구를 파괴하여 오히려 지구인들이 살아남게 되는 이야기도,

타고난 능력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지만 그로 인해 삶을 즐기는 법을 찾게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인간이 세상을 망치고, 또 인간이 서로 적당히(!) 기대어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러나 아마, 단편이라서 그렇겠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몰입이 안되었다.

인류 전체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해결책을 공유한다는 것. 하나의 역사 기술을 공인하고 모두가 함께 배우며 다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 나간다는것. 전 인류가 이견없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그것은 거대 지렁이가 문명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어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좋았던 건 '리셋'과 '목소리를 드릴게요'.

-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라져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지금도 종종한다. 누구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 역사도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멸망도, 리셋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리셋된 세계에도 인간은 존재한다. 지금의 인간이 태초를 잊은 것처럼, 리셋된세계에서 새로 시작하는 인간도 언젠가는 '역사'를 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누군가가 다시 리셋하겠지. 그럴 여력이 없다면 아예 멸망해버릴지도. 나는 이 소설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그린 것인지 절망을 그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그 모호함이 좋다.

- 사회적으로 격리되면서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 격리 생활에서 찾은 궁극적 행복이 또 사람인건 아이러니하면서도 당연한 것도 같다. 사람이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우리는 자주, '이성'에게는 '사랑'이라는, '동성'에게는 '우정'이라는 이름을 얹어버린다. 그러나 감정이 언제나 그렇게 명확한 테두리에 싸여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언제나 그렇게 이름지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 어디엔가 있는 감정, 사랑인지 우정인지 굳이정의내려질 필요가 없는 좋은 감정들을 느끼는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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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오직 두 사람, 2017년, 문학동네, e-pub

그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언어를 써왔다.

저녁의 대화는 아버지의 기대와 '나'의 죄책감으로 겨우 이어졌다. 아버지의 집착으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어지던 유대는 다른 이들과의 삶을 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와의 유대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다. 다른 유대가 없어진거다.

아빠는 '모국어' 같은 존재라고 하지만, 모국어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느낌'과는 다른 것이다. 때때로 외국어로 말하는게 더 직접적이고 논리적이기도 하다. 고려할 것이 적다. 직접적인 말이 해당 문화권에서 약간의 무례로 인식되더라도 상대의 양해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모국어가 언제나 가장 익숙한, 혹은 능숙한 언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존재였던 거다, 아버지란.

현주는,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 가족들 누구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하지 못했을 말들을 고백처럼, 변명처럼, 혹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처럼 '언니'에게 써내려갔다. 오직 '두 사람'이라면, 그것은 현주와 그 편지를 받을 '언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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