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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세트] 은수저 (총15권/완결)
ARAKAWA Hiromu / 학산문화사/DCW / 2020년 11월
평점 :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입시과정에서 탈락해 떨어져 나간 주인공이 입시지옥과는 동떨어진 농고에 입학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목표를 찾으며 공존하는 과정을 찾는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
개인적으로 만화가 아라카와 히로무의 장점이라 생각하는, 좌절의 현실감을 가장 잘 살린 만화가 아닌가 합니다.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고난을 겪고 힘들어 할 때 어떤 만화는 그 감정이 크게 와 닿을 때가 있고, 또 어떤 만화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만화들이 특히나 그렇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면 어쩐지 나이 먹고 뻘소리를 하는 것 같아 자제하고 싶지만 실제로도 요즘 나오는 컨텐츠들이 그런 경향이 있긴 합니다.
이 만화가의 만화가 그런 좌절의 현실감을 잘 살린다고 운을 띄운 이유는 이 은수저에서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전작인 강철의 연금술사와 은수저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처입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실수,실패를 겪고 가까운 주변 사람이 상처입는 것을 겪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만화에서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는 패턴이라 별로 색다르진 않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기 위해 현실적인 고민을 수없이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방법을 찾아도 곧바로 해답으로 넘어가지 않고 딜레마를 부여합니다. 그게 정말 맞는 길인가? 확실하게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현자의 돌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어도 도덕적인 딜레마를 부여하고 주변 사람들이 돌이킬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때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고치기 위해 힘을 쓸 것인지 고민하게 하듯이, 은수저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돕기 위해 힘을 쓰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부터 성장해야 함을 깨닫고 방법은 한가지만 존재하지 않음을 꾸준히 생각하며 발견해 냅니다.
이렇게 고민을 하고 의문을 던지는 주인공을 보며 독자는 이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기도 합니다. 농고의 활동을 통해 사전 정보를 전달하고, 등장인물들이 떠올리는 제안을 읽어 가다보면 머리속에서는 정보가 저절로 조합이 되어 나도 모르게 답을 찾게 만드는 방식이죠. 소크라테스 대화법이라 불리는 문답법의 형식과 비슷합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관련이 깊고 비판적 사고와 능동적 경청을 이끌어내 극중 주인공의 심리에 독자가 가깝게 반영이 되게 만들다보니 저절로 이야기는 현실감을 띄게 되고 공감하기가 쉬워집니다. 요즘 만화가 그렇지 못 하다 라고 꼰대처럼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도 상당수 컨텐츠들은 의문 없이 답만을 뽑아내는 방식에 의존하는 편이니까요.
뻘소리는 이쯤하고 은수저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현실감을 높게 가지는 것이 물론 동시대를 그리는 시간적,공간적 배경도 있겠지만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식량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선대가 쌓아올린 발자취를 따라 더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현실적인 물가 싸움을 머리속에서 하게 되는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피자 한판에 500엔, 소세지 100그램에 295엔, 돼지고기 1kg이 얼마얼마를 생각하다 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가까운 마트에 오른 식자재들이 실제로는 농축산 관계자들에게 얼마나 돌아가는지 신경 쓰이게 되기도 하구요. 너무나도 밀접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한 농가의 주 생산품이 바뀌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내 일이 아닌데도 두렵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이세계 같기도 한 농고의 교육과정을 가까운 현실로 가져와 독자에게 전달하는 점에서 이 만화책은 교과서보다 더 유익한 내용을 담으며 교훈과 더불어 뛰어난 메세지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구 일본군 복장과 쿠릴 영토 반환 이야기만 없었다면 말이죠...
구 일본군 복장은 1,2권 초반에만 나오고 말아 계속해서 신경 거슬리는 부분은 아닌데 쿠릴 영토 분쟁, 일본식으로는 북방 영토 반환 문제를 언급하고 러시아 땅 사서 사업하기 위해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작가의 인식이 역사 문제는 관심 없고 영토 확장에만 관심있나 싶어 소름끼치기도 합니다. 이걸 굳이 만화의 내용으로 담았다는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은연중의 답을 만화로 표현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좋은 내용으로 추천을 하려다가도 이런 부분 때문에 쉽사리 말을 꺼낼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별점 1점을 깍게 되는 것은 이 만화의 내용이 1학년까지는 괜찮은데 2학년 부터는 대충 날림이 되어 버립니다. 1년은 약 11권 이상을 들여서 이야기를 전개한 반면 나머지 2,3학년은 4권 내에서 마무리 해 버리는데 그것조차도 대입과 창업 문제로 질질 끄는 것이 대부분이라 농고 에피소드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던 내용에서 꼭 농고가 아니어도 되는 평범한 대입 시험 준비 문제, 나름 방법을 찾고 고찰하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연관되는 캐릭터가 많아 난잡하고 중심이 없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창업과 더는 발전할 부분이 없어 적당한 시점에서 정리 했어야 할 승마 이야기, 세가지를 3학년 마지막까지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이야기 하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집니다.
승마 고시엔을 2년차 에피소드로 놓고 3학년때는 후배들을 보조 해 주는 정도로 그치면서 신세대를 소개 하고 적당히 물러났어야 은수저에서 말한 역사를 통해 이어나가는 부분이 연결이 될텐데, 그러지 않고 현 세대의 대입과 사업과 승마 이야기에만 몰빵하다 보니 하치켄 이후의 세대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작 이어나가는 이야기가 아닌 뚝 끊겨버리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생각 해 보면 1학년때는 피자 만들기다 뭐다 하며 등장했던 여러 캐릭터들이 필요가 없어지니까 쥐도새도 모르게 안 보이게 되었으니 하치켄의 위쪽도 아래쪽도 별볼일 없이 역사를 이어나간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 되었네요. 선배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만큼 선배가 된 하치켄이 성장한 모습이나 중간에 나온 시험 에피소드에서 하치켄 형이 남긴 공부법으로 농고를 입시에 강한 고교로 만든다던지를 통해 공부를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을 잘 하긴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이야기로 2학년 에피소드를 만들수도 있었을텐데 그런게 아니더라도 대충 비워버린 2,3학년 이야기의 퀄리티가 아쉬운 부분입니다. 창업 부분도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이 본인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 시도를 해도 될 것을 너무 서두른 부분이 있습니다. 애초에 자기 대학 진학 비용으로 출자를 해 달래놓고 여기서 안 가려던 대학까지 가 버리니 비용 면에서 말이 안 되고 맙니다. 하다못해 돼지고기 펀드의 경험을 살려서 공동 출자 하고 동창들과 선후배와 지속적으로 엮여도 될 것을 이것 역시 뚝 끊겨버려 자신의 창업 관련 자료를 도서관 자료실에서 후배들이 자신의 발자취를 찾아내는게 아니라 단순히 선생님의 말을 빌려 이런 선배가 있었다 정도만 들어야 하니 역사가 전달되는 방식 면에서 세련미가 좀 떨어집니다.
좋은 만화이고 한번쯤은 볼만하긴 한데 뒷심과 마무리는 좀 부족한 아쉬운 만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