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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 ㅣ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평점 :
상은의 세계는 슬픔의 실체는 없고 자기 연민만 가득했다. 타인은 없고 자신만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없는 세계,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이용 가치에 따라 선과 악이 바뀌는 세계, 그 안에서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기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상처도 슬픔도 모두 전형이다. 전형적인 사고에 갇힌 자에게 자기 언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생각도 없고 변화도 없는 세계, 고작 그런 세계, 고작 그런 사람,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이의 실체.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p.144
기주는 남편을 여의고 상은과 함께 살고 있는데 고모 집에 맡겨 두었던 로아를 집으로 데려온다. 상은은 로아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제 말을 잘 듣는 아이로 만들려 한다. 한파가 있던 날 욕조에 물을 받아 로아를 발가벗겨서 물속에 밀어 넣고, 이후로도 끊임없이 폭력을 가한다. 온몸이 무지개빛으로 멍이 든 로아는 상은의 폭력에 대항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다. 기주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언니 말을 잘 들으라는 말밖에는, 상은이 부리는 패악이 무서워 로아를 감싸지도 못하는 엄마이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로아는 병상에 누워 생각에 잠긴다. 이 고통의 근원을 찾아보기로.
그러려면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서 지난 일들을 되짚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상은이 되어 보기로. 가해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시간을 마주해서 현실을 보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다.
해설에 김이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을 다 읽고는 다시 도입부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폭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악인에게 서사를 주는 것이 아닌, 피해자가 자신에게 씌워진 피해자라는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도구로 사용되는 회귀의 방식을 말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시선으로 폭력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낯설고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폭력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에 당위를 주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도 어딘가에 수많은 ‘로아들’이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닫힌 현관문 안에서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는 방법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도.
가슴 서늘한 소설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폭력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도 배우게 된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안전하지 않으니까.
나는 방치하는 언니가 아니다. 나는 열네 살, 일곱 살이나 많은 로아의 언니다. 짓밟아야 로아도, 나도 살 수 있다. 누구도 구해주지 않는 아이,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아이, 길에서 태어나 길에 버려진 아이, 길바닥에서 살아온 아이, 그게 로아이고 동시에 나다. p.25
그렇게 해가 거듭될수록 집은 아름다운 무질서의 세계, 아름다운 폭력의 세계가 되어갔다. 무질서와 폭력의 질서가 잡힌 부드러운 세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물렁물렁한 세계, 결핍을 결핍으로 채우는 달콤한 나의 집. 이곳에 로아가 있었다. 무지개빛 육체가 있었다. p.52
“어차피 맞을 거였어. 덜 맞고 싶기는 했지. 그것보다도 살기 위해 생각을 하지 않는 척했는데 결국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안게 더 끔찍했어. 계속 그렇게 사는 건 내가 나를 방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끔찍해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지.” p.135
내 슬픔의 기원은 내가 그들을 닮았다는 것, 그들의 또 다른 몸뚱이라는 것.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모습을 바꿔 나를 또다시 시험대에 올리지. 몸통을 자르면 여러 마리로 증식하는 것처럼. p.133~134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몰이해의 증거일 뿐이니까. p.144
@jakkajungsin 작가정신출판사의 작정단13기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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