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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평점 :
※꼴깍하고 침이 넘어가더라도 참자.
나이가 한참 들도록 내 손으로 음식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음식은 볶음밥과 유부초밥 정도인 내가 결혼하고 술꾼 배우자와 살게 되면서 요리하게 되었다. <술꾼들의 모국어>를 읽으면서 내내 집안의 술꾼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지를 쪄서 양념장에 무쳐내거나 두부를 부쳐서 매콤한 양념에 조려서 반찬으로 만들면 어김없이 소주가 함께 한다. 묵은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이면 꼭 달걀말이를 해서 술을 안마실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고. 반찬이 곧 안주라는 말을 나는 남편을 통해 알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술꾼이 딱 그렇다.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p.7)
반찬은 계절을 탄다. 봄이면 봄나물 무침, 여름이면 여름에 나는 갖가지 푸성귀들로 식탁을 채우고 가을이면 책에서처럼 무조림, 무생채가 빠지지 않는다. 생선을 얹어 조려낸 무는 일품이다. 겨울엔 뜨끈한 국물이 있는 탕과 찌개가 빠지면 섭섭한데 우리 가족이 특히 좋아하는 찌개는 순두부찌개이다. 바지락을 넣어 매콤 칼칼하게 끓여낸 순부두찌개에 달걀을 넣어 익히면 밥도둑이다. 찬 바람이 불면 둘러앉아 순두부찌개를 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p.170)
다람쥐가 겨울을 위해 도토리를 미리 줍듯 우리집도 준비하는 것이 있다. 국물용 멸치를 구매하고 바람든 무가 있으면 큼지막하게 썰고 냉동하고, 여름 땡초는 필수로 저장해서 육수용으로 쓴다. 지금은 우리 가족의 간식 땅콩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피땅콩을 한 포대 사서 둘러앉아 영화를 보며 깐다. 냉동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볶아서 먹은 지 벌써 10년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식재료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다듬고 요리까지 되는 과정들은 참 정직하다. 그것을 함께 하는 시간이 음식의 깊이를 더한다.
술꾼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주 한잔이 생각이 절로 난다. 특히 꼬막 조림을 상상하니 더 애끓었다. 매년 손질이 귀찮다는 이유로 지나쳤는데 올해는 꼭 꼬막 조림을 맛보고 싶어진다.
곳곳에 있는 웃음 포인트 중 ‘땡초전’에 얽힌 이야기는 정말 재밌다. <토지>의 별당아씨가 산에 핀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문장을 떠올리며 저자는 땡초전을 먹으면서 있지도 않은 연인을 향해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밭에 땡초가 열릴 텐데요……그 땡초 따 땡초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p.56)
얼마나 멋진 조합이 탄생할지 그 기대만으로도 목젖이 바르르 떨려온다. (p.67)
각자의 혀에는 각자가 먹고 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혀의 개성은 절대적이며, 그 개성은 평균적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p.136)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pp.139~140)
“‘술과 음식’이라고 하면 안 되고 ‘술과 안주’라고 해야 합니다. 저에게 그 둘은 달라붙어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 그 둘에 제가 또 들러붙어 삼위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합니다. 개인으로서는 술에 약간 중독돼 위험하고, 작가로서도 술 먹고 깨는 시간이 점점 오래 걸려 역시 위험합니다. 하지만 평생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고 살고 싶습니다. 위험은 언제나 의미를 낳기 때문입니다.” (p.230)
-내가 감수하고 살고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도 그것의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고 싶은 걸까. 고민하게 되는 작가의 말이다.
@hanibook 한겨레출판의 하니포터9기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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