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가 들려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권정생 이야기
정지아 지음, 박정은 그림 / 마이디어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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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고달프다는 것을,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정생은 그 누구보다 뼈져린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자기 몸을 떼어 가난한 사람을 도운 저 행복한 왕자처럼. (p.80)

 

동화작가 권정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굶주리고, 가족과 이별하고, 해방된 나라에서는 폐결핵에 걸려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희망은 바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난이 주는 것들을 겪어내면서도 대가 없는 다정한 손길들이 그를 살게 했고 그는 그것을 평생에 걸쳐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세상을 따스하게 했다.

 

정생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고구마 가게에서 남들을 속이고 있을 때 물건값을 주지 않았다며 기어이 돈을 주고 갔던 순박한 시골 아주머니며, 나무를 닮았다는 목생이 형이며, 주인에게 늘 맞고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도쿄 혼마치의 경순 누나며, 지금까지 만난 숱한 사람들이 정생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p.87)

 

정생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헤매고 다닌 세상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정생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돈 오십 원과 고구마 몇 개에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던 문둥이 청년, 열흘 동안 매일 아침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의 자그마한 식당 아주머니,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준 할머니, 뱃삯도 안 받고 강을 건네준 뱃사공, 자기가 빌어 온 밥을 기꺼이 먹여 준 외팔이 사내, 그 고마운 사람들이 외롭디외로운 정생의 마음속에서 등불인 양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pp.119~120)

 

권정생의 머릿속, 가슴 깊은 곳에 함께 하는 이들이 그를 일으켜 세우고 또 손잡아 주었던 것일까.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는 것, 그리고 받은 그것을 진심으로 행하는 것. 자신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더 슬픈 것을 바라보며 깊이 아파하고 다정한 손길을 내밀어주는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의 일생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책을 덮으면 나는 또 잊고 나를 위해 살아갈 테지만 지금 이 순간 뜨거워진 감정을 기억하고 싶다. 그 감정을 기억함으로써 다시금 정생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야 하기에. 작은 시간들이 쌓여 결국 더 넓고 깊은 마음으로 갈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되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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