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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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의 1970년 첫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나목>을 세계사컨텐츠그룹의 리커버로 새롭게 만나볼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다. 책의 만듦새가 책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손으로 자꾸 쓸어보게 된다.

 

1950년 유엔의 서울 수복 이후 이경은 홀어머니와 함께 계동의 커다란 고택에 단둘이 살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오빠 둘을 잃고 부연 회색 속에 살고 있는 어머니와 최소한의 대화로 삶을 이어간다. 명동의 미군 부대 PX에서 초상화 부 점원으로 일하던 중 옥희도라는 화가를 만나게 된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분분히 내리는 눈은 어쩌다가 유리에 와 부딪치곤 했지만 유리에 댄 내 볼에는 와닿지 않았다.

얇으나마 유리창이 사이에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한동안을 유리에 볼을 댄 채 눈송이가 볼에 와닿기를, 그리고 눈이 올 때의 그 함박꽃 같은 기쁨이 다시 내게 오기를 초조하게 바랐다. (p.105)

 

이경은 가정이 있는 옥희도를 사랑하고, PX에서 전기 일을 하는 태수는 이경을 좋아한다. 이경은 밝은 미래를 그려보지만, 현실의 암울함이 계속해서 어두운 커튼처럼 그녀의 삶을 가린다.

 

새롭고 환한 생활에의 동경과 지금 이대로에서 조금도 비켜설 수 없으리라는 숙명 사이에서 아프게 찢기고 있었다. 또한 나는 이 찢김, 이 아픔이 전연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픔을 통해 내가 조금도 새로워질 리가 없을 테니까.

누가 뭐래도 결코 나는 놓여날 수 없는 것이다. 전전긍긍 전쟁을 기다리며 하루 한 번 한쪽이 달아난 검은 지붕을 경건하게 우러르며, 어머니를 미워하고 김칫국을 마셔야 하는 일에서 결코 나는 놓여날 수 없는 것이다. (p.184)

 

오빠들을 자신이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자신을 버려두는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증오, 그럼에도 예전의 다정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스무 살의 이경은 위태롭고 안타깝다. 낮의 활기찬 PX에서 다시 어두운 고택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경은 쉽게 집으로 발걸음을 두지 않고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빛나던 어머니의 눈이 점점 귀찮다는 듯이 게슴츠레 감기며 나에게 잡혔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고 부스스 돌아눕더니 휴 하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p.313)

 

작중 옥희도는 박완서작가가 만난 박수근화가와의 만남의 기록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전기를 쓰고 싶었으나 알고 지낸 기간이 1년 미만이기에 아는 것에 별로 없었고, 작가님은 <나목>은 허구임을 밝혔다.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p.8)

 

전쟁이 남긴 상흔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고 그 사이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골고루 나누리라고. 나는 다만 재난의 분배를 먼저 받았을 뿐이라고.’ (pp.63~64) 형제를 잃고 자신은 버려진 듯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경과 모든 것에 무심한 어머니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이다. 서로를 보듬을 여력조차 없던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아닌가.

 

텅 빈 눈의 어머니에게 나를 보아달라고 몸부림치는 이경의 아픔이 아릿하다. 큰아버지의 따스한 그늘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택하는 모습에서는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 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 걸어나가고 변화하는 이경을 응원하게 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살던 당시 여성들에게 전하는 작가님의 응원 메시지로도 읽힌다.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전쟁의 상흔을 견디고 우리는 다시 희망으로 나아갈 것을 말이다.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용기 있게, 두려움에 맞서 싸우며 진실을 향해 투쟁하는 글쓰기. 그 올곧은 선생님의 문학 정신의 출발점에 <나목>이 있다”.- 최은영 작가의 헌사

 

@segyesa_contents_group 세계사컨텐츠그룹의 서평단으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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