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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습지 - 어느 유곽의 110년
이수영 지음 / 학고재 / 2023년 10월
평점 :
「어느 유곽의 110년」
대구에 있던 일본 유곽 ‘야에가키쵸’를 본으로 만든 이야기이다. 1909년에 문을 연 야에가키쵸는 해방 후에도 이름 바꿔 내내 성매매 집결지였다. 110년이 지난 2019년에야 철거되었다. 부산, 원산, 인천, 서울, 평양, 군산 같은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유곽이 만들어졌고 남한에선 성매매 집결지로 이어지다가 2010년이 훌쩍 넘어서야 하나씩 철거되었다. 이 책은 대구 유곽 야에가키초를 본으로 삼았지만 대구만이 아닌 한반도의 ‘어느 유곽-성매매 집결지’ 이야기이다. -들어가며
성매매 집결지는 결코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유곽은 철도, 공장, 신사, 전쟁처럼 정성들여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한반도 일본 이주자를 위한 교육, 토목, 위생, 수도 등 제반 시설을 위한 재정확보에 유곽사업은 요긴했다. 황금알을 낳는 유곽을 유치하기 위해 조선의 일본인들은 마을의 땅을 부동산으로 바꾸었다. 마을의 토성에는 일본의 신사가, 미나리꽝 습지에는 유곽과 공장이, 읍성 밖 갈대밭은 기차역이 되었다. (p.6)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에서 읽은 성매매 당사자의 이야기들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궁금했다. 대구 유곽의 탄생에 일제의 촘촘한 계획이, 1909년에 세워진 유곽 (성매매 집결지) 이 110년이 지나도록 성황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자본주의 논리에서 성매매는 과연 누구의 배를 불렸을까.
저자를 따라가 본 발자취는 슬프고 아팠다. 책에 실린 당사자의 이야기를 읽으니 전에 읽은 책들과 겹쳐져 그녀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은 일들이 지금 만연한 젠더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우리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감추고 싶은 그 공간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공감이다. 우리는 공감함으로써 또 기억해야 함을 느낀다.
우리는 장소에 매여 있다. 장소는 공간적이라기보다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옆 사람들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우린 그들의 시선에서 밀려나고 실패할까 봐 두렵다. 공부가, 싸움이, 초이스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정받기 위해서다. 인정 투쟁에서 실패할 때, 그 시선들의 바깥으로 밀려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생을 끝내기도 한다. 습지가 지옥이더라도 살아야 한다. (pp.148~149)
2019년 6월4일 11시. 기자들과 여성인권 활동가들, 업주들이 분홍습지에 모였다. 업소 60호 건물을 포클레인으로 부수며 철거공사가 시작됐다. 무너지는 건물을 배경으로 기자들은 110년 역사의 성매매집결지가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한때 이 분홍습지에는 70여 성매매업소, 600여 명의 성 판매 여성이 살았다. (p.171)
이제 분홍습지는 없다. 없어졌다. 마땅히 없어져야 할 곳이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짓기 위해 없어졌다. 아파트는 힘이 세다.
성매매집결지였던 전주 선미골, 아산 장미마을은 철거 후에 집결지의 폭력적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 기억장소와 아카이브, 여성소수자 센터를 운영한다.
이 도시는 분홍 습지를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습지는 더 낮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져 스며들 것이다. 성구매자들은 어디선가 분홍 불빛을 안심하고 다시 켤 것이다. 망각은 힘이 세다. (pp.179~180)
‘창녀’는 사건이다.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은 창녀가 사건이라는 것을 감춘다. 보이지 않게 한다. 혼자서는 절대 창녀가 될 수 없다. 성 구매자가 있어야만 창녀 사건을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성매매가 작동될 수 있게 하는 자본주의 장치들, 혐오와 배제라는 감금장치가 없다면 창녀 사건을 일어날 수 없다.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