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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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던 화인은 갑자기 집에 불이 나고 아버지는 창밖으로 추락해서 사망한다. 화인에게는 화상 자국이 없고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발화점도 그 어떤 원인도 찾지 못한 채 미제로 남게 된다.

 

혼자 살던 빌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k씨의 죽음. k씨는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어 놓은 듯한 열상을 목에 입고 사망했다. 옷장 안에는 두 손목과 발목까지 청테이프로 묶인 채 감금된 여성이 있었다. 미제 사건이다.

 

혼자 사는 집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Y. 폐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되었다. 평소 운전기사인 M을 심하게 폭행하는 영상이 CCTV에 잡혔고 같은 아파트의 입주민도 목격자이다. M은 퇴근했고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 움직임이 없었다. 이 또한 미제 사건이다.

 

위 세 사건의 공통점은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이 몸에 타투를 했고 같은 문신술사에게서 했다는 점이다. 샐러맨다를 목덜미에 문신한 화인, 표범을 문신한 여성 작곡가, 우키요를 문신한 M. 화인과 같은 회사를 다니는 시미는 50대의 이혼녀이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화인으로부터 소개받은 문신술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타투는 부적으로도, 자신을 지켜줄 수호신 같은 의미로도, 단순히 치장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겠다. 나를 지켜준다니. 이 책을 읽으니 당장 타투를 하고 싶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 몸에 타투를 그려 넣는다면 그것을 볼 때마다 심장에 새겨진 듯 나는 생각하겠지. 얇고 작은 책을 한 번 읽고 또 읽었다. 몸에 남은 상흔이 심장에 새겨진 것을 나는 안다. 몸은 기억한다고 하듯이. 상흔은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지만 그 상흔이 사라져 갈 때쯤 나는 괜찮아지질 것이다. 상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문다고 하지 않던가. 상흔이 사라지면 스스로 다시 빛나는 날이 찾아오리라 믿고 싶다.

 

흘러넘친 끝에 고갈되었으나 일상의 바닥에 들러붙은 꿈의 침전물을 목격한 어느 날,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샐러맨더 한 마리를 몸 안에 키우면서,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했던 날들에 대해. 저녁놀이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은 몸통의 그라데이션과, 그 무늬 아래 타래를 틀고 도사린 이야기들에 대해. (p.40)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그것은 아마도 육신에 관한 이야기. 필멸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영원해 보이는 피부 위의 흔적이라도 죽음까지 봉인할 수는 없으니. (p.44)

 

정말로 나를 지켜줬어요. 제일 절박했던 순간에. 이러다 죽을 것 같았을 때.”

그리고 자기 일을 마치고 떠나갔어요.” (PP.106~107)

 

단순히 나이와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사냥이나 자수 등 기량의 등급을 매기기 위해, 때로는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애도하기 위해, 결의를 이어 나가거나 자신의 용기를 자랑하기 위해. 자연의 어느 부족에서는 사자의 장례를 치를 때 그의 영혼이 들고나는 통로를 마련해주고자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와 구실이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거라면, 자신을 수호하는 용도의 문신이 있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p.129)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p.136)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p.138)

 

내 몸이 어제와는 달라지기를,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p.140)

 

시미는 앞으로의 인생에 지금처럼 충동이 자신의 온몸을 구성 또는 대체할 정도로 부피가 커질 날이 다시 있을까 생각했다.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p.142)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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