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포옹
박연준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요한 포옹/박연준 산문/마음산책


공부하()는 어른은 낡지 않는다. 몸은 늙어도 눈은 빛난다. 공부를 내려놓은 어른은 눈빛부터 굳는다. 내가 아는 어른 중에 누군가 얘기하면 상체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듣는 이가 있다. 나는 그의 태도로 귀를 기울이다란 표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남의 말을 듣고 공들여 밖을 보는 것이 공부라면, 그는 늘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p.97)

 

기분이 좋은 일,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더 많이 찾아서 하렴. 어른들이 쓸데없다고 나무라는 일,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일을 많이 해보렴. 책상을 벗어나 걸어 다니렴. 어른들이 오랫동안 수갑을 채워놓은 죄의식을 풀어버리렴. ‘마땅히라는 말을 바다에 던져버리렴. 걱정과 불안 때문에 현재를 달달 볶는 일은 그만두렴. 나아갈 때는 전진만 있는 게 아니란다. 지그재그로 춤추듯 깡충거리며 나아가도 되고, 멀리 돌아가도 괜찮아. 시간은 얼마든지 많단다. 후진했다 다시 나아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부디 나처럼 걱정이 많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내가 자라면서 충분히 듣지 못한 말을 해줄 것이다. (p106)

 

무언가를 하기에 적당한 때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같다. 일단 시작해버리는 때, 그때가 바로 적당한 때란 걸 알았다. (p.130)

일단 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다음, 어떤 순간이 오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야 한다. (p.136)

 

누군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를 물어보라. 이야기 중에 그를 이루는 구성 성분의 씨앗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가 자란 시대의 얼굴, 문화의 흐름이 같이 따라와 익숙한 듯 새로운 풍경을 보여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p.156)

 

 

내가 처음 본 영화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인어공주이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친구들끼리 종로에 가서 웬디스에서 햄버거와 밀크쉐이크를 먹고 극장에서 인어공주를 봤다. 현란한 화면과 아름다운 노래들이 나오는 만화영화이다. 부잣집 친구의 초대로 갈 수 있었는데 가난했던 나는 시내 구경도, 햄버거와 밀크쉐이크도, 영화도 정신없이 몽롱했던 기억이다. 다 처음인 내게 영화라는 낯선 경험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울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지배적이다. 잊을 수 없는 나의 첫 영화 인어공주이다.

 

그날 밤 드디어 혼자가 되었고 나는 은박지처럼 구겨져, 비로소 슬퍼할 수 있었다.

슬픔이 사건으로 지나간 후, 그다음 여진이 밀려드는 자잘한 슬픔(혹은 개켜진 슬픔)은 타인과 나눌 수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 앞에서라면 한사코 혼자이고 싶다. (p.165)

 

슬픔은 뜨거운 것이라서 포장하려 하면 포장지가 들러 붙는다. 보기 좋게 세공하려 하면 내용물이 터져 나온다. 무언가 하면 할수록 슬픔은 원래 모양과 열기, 에너지를 잃는다. 이쪽에서 받을 수 있는 건 쭉정이처럼 가느다래진 슬픔의 그림자밖에 없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생긴 모습 그대로, 들고 있던 형태 그대로 이쪽을 향해 내려두기. 그냥 두는 일이 최선이 아닐까? 두는 일이란 슬픔을 보이는 일이다. (p.198)

 

책을 덮고 가만히 책을 다시 펴보게 된다. 북마크 한 곳을 다시 읽어 본다. 다시 덮고 책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어 본다. 어여쁜 이를 만지듯 나는 이 책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내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마치 책이 알기라도 하듯이 나를 가만히 포옹한다.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그 구절을 옮겨 적고 읽고 또 읽는다.

 

이제 나는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 당신이 간직한 금이 혹시 나로 인해 부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다가서는 포옹이 좋다. 등과 등에 서로의 손바닥이 닿을 때, 가벼운 포개짐이 좋다. 고양이처럼 코끝으로 인사하며 시작하고 싶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금 간 것을 계속 살피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어렵더라도. - 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