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쿤룬 삼부곡 1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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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지금껏 이런 주인공은 없었다. 제목부터 눈이 가더니, 이야기 자체도 매력이 철철 넘친다. 그래서 이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후속작 두 편이 궁금하다. 3편 모두 영상화 계약이 되었다니 다른 두 편 역시 얼마나 재미있을지 이미 기대가 된다. 앞으로 만들어질 영상화 작품도 기대될만큼.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심각한 결벽증을 가진 미소년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학생 같은 모습의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미소년이랄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년의 직업(?)은 킬러다.


킬러라고는 하나 소년이 대상자로 삼는 이들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 뿐이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이 조직은 다크웹에 비정기적으로 스너프 필름을 올려 놓는다. 모두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저마다 살인 수법은 다르지만 피해자의 흉부와 복부를 절개하는 행위는 조직원들이 빠뜨리지 않고 이행하는 공동 의식이다.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조직원들의 오른쪽 가슴에는 J라 새겨진 흉터가 있다. 소년은 남다른 직감으로 이 조직원들을 찾아내서 살해한다. 그리고 소년의 목표는 타이완 내에 있는 잭의 조직원들의 소탕이다.


"평소에 청소하는 습관이 없습니까?"

"주기적으로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큰 실례입니다."  - P. 19


너무 심각한 결벽증 탓일까? 소년은 독특하게도 자신이 살해하려는 대상자에게 청소에 대한 일장연설을 쏟아내기 일쑤다. 대상자가 죽으면 그 주변을 비롯 대상자가 살고 있던 공간까지 청소해 버리는 일 역시 흔했다. 보통의 킬러들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하는 청소와는 차원이 다른 청소인 셈이다.


'스녠'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예상되는 시간이 아니라 소년을 부르는 유일한 호칭이었다. 소년은 이름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고아에겐 이름이 있을 수 없다.  - P. 32


처음 도망쳤을 때 그는 고작 여덟 살이었고, 두 번째로 도망쳤을 때는 열여덟 살이었다. 꼬박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때부터 자신을 '10년', 스녠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에는 그동안 그가 감내한 고독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던 그 모든 밤을, 모든 것을 간절히 끝내 버리고 싶었던 수많은 고뇌의 밤들을 오직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위해 견뎌 냈다.  - P. 103


남다른 직업 탓에 스녠에게 친구가 있을리 없었다. 샤오쥔, 그녀가 친구에 가까운 인물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좀더 두고봐야 할 일. 대신 조력자는 존재했다. 전문적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남자 다비도프, 또 다른 정보 제공자 닥터 야오, 시체 처리를 담당하는 '업자'가 스녠을 돕는다. 그런데 이들이 스녠을 돕는 이유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어찌보면 이들에게 스녠은 철저하게 농락 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닥터 야오는 끔찍한 인간이었다. 다비도프도 비슷하긴 하나 뭔가 좀 아리송한 인물이었고.


샤오쥔. 그녀는 과연 스녠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샤오쥔도 꽤나 당찬 인물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만 두 번의 납치를 당해 한번은 잭의 조직원에게 죽을 뻔 하고 또 한번은 강제로 인육을 삼켜야 했지만 금방 현실로 다시 돌아갔다. 일을 쉴 수 없는 빡빡하고 여유없는 삶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걸까? 나 같으면 정신과를 찾아가도 여러번 찾아갔을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스녠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를 걱정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니, 평범한 듯 하면서도 굉장히 강한 캐릭터다. 그래서 깨알같은 그녀의 등장들이 꽤 반가웠다.


다크웹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다.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는 살인마와 해커가 활보한다. 라이브 살인 쇼, 암거래, 인신매매, 사이비 종교 의식.. 그 밖에 모든 상상 할 수 있는,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여기서 이뤄진다. 이곳에 접속하려면 특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브라우저 아이콘을 클릭하면 사이트로 연결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므로, 그 방법을 아는 사람만 진입할 수 있다. 빛을 봐서는 안 되는 모든 괴물이 이곳 다크웹에서는 종횡무진으로 활동한다.  - P. 33


갑자기 궁금하다. 실제 현실의 다크웹에서도 이런 일이 존재하는지.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 그저 평생 물음표로 남겨두고 싶은 일이다. 그 어떤 소설 속 이야기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생각하면 존재할 것만 같아서 말이다. 꽤 리얼하고 잔혹한 표현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나는 괜찮았다. 그간 잔인한 소설에 너무 길들여졌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여기서 더 잔인한 소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어김없이 더 잔혹한 소설을 만나곤 했다. 그게 또 신기하다.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부정할 수 없을만큼 현실이 더 잔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독특한 인물들 덕분에 금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다. 얼른 후속편들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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