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는 아니지만 많이 닮은 형제자매 같은 책이다. 농업기술과 한국사가 이태진 선생의 주요 연구분야다 보니 당연한 결과다. 6년의 시간차를 두고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 기술"이 "한국사회사 연구"보다 먼저 나왔다. 동생인 한국사회사 연구는 좋은 내용같지만 읽는 동안 안구건조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겨울이 되어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을 연속해서 읽으니 날씨 탓이 아니었다. 의술과 인구는 부드럽게 술술 잘 넘어간다. 비슷한 내용도 이렇게 속칭 글발에 의해 받아들여 지는 것이 다를수 있다. 두 책의 핵심은 고려말  한국사회는 의학과 농업기술이 급진전을 이루어 조선 초기에 유교자본주의적 농업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사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흥행하기 힘든 영화라면, 의술과 인구 농업기술은 상도 받고 대중성도 얻는 영화다.표지는 한국사회사가 훨씬 멋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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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별 2014-12-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구건조증 조심하세요^^
 

지난 8월 10일 중부지방에 쌍무지개가 나타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잠시 취할 수 있었다. 모두들 각종 SNS에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고 쌍무지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쌍무지개가 행운을 상징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직접 보게 되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뉴스에서도 쌍무지개를 길조로 여기는 등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사회가 어수선해 무지개에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집중하게 할 만큼 쌍무지개는 드문 현상이다. 무지개의 과학적 원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나오듯이 빛의 산란이다. 이날 내린 소나기로 공기 중에 물방울이 많아져 태양빛이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굴절과 분산이 일어나 무지개가 발생하였다. 태양을 등진 전면에 1차 무지개가 발생하고 그 뒤에 2차 무지개가 발생하면 이를 쌍무지개라고 부른다. 드물게는 달빛에 반사되어 생기는 달빛 무지개도 일어난다고 한다. 과학적 지식으로 단련된 우리는 무지개를 자연이 주는 선물로 인식하고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과거에는 무지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 조상들도 꽃과 단풍을 감상하듯 무지개의 광채를 즐겁게 누렸을까?



루이 14세가 태양왕이라고 불리기 이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임금을 태양에 비유하였다. 지금도 물론 그러하지만 농업이 대다수 백성의 삶이었던 시기에 자연현상 그중에서도 태양이라는 존재는 더욱 절대적이었다. 왕이 태양에 비유되는 것은 상징이상이었다. 왕이 태양인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자연현상이 하늘이 왕에게 주는 신호였다.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모두 왕의 부덕 때문이었다. 천재지변이 들면 왕은 몸소 반찬을 줄이고 거처를 옮기는 등 모범을 보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 용서를 빌었다. 그래도 천재지변이 멈추지 않으면 왕이 정치를 잘못해 죄 없는 자의 원성이 하늘에 닿아 일어난 것이라며 온 나라의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홍수와 가뭄 같은 천재지변 이외에 다양한 자연현상에도 반응을 하였다. 현대과학에서는 돌연변이로 보는 하얀 사슴이 나타나면 국가의 길조로 보았고 한 줄기에 네 이삭이 난 보리를 상서롭다고 여기고 발견자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무지개는 어떤 의미를 가진 자연현상이었을까? 무지개의 한자어는 홍예(虹霓)다. 글자를 하나씩 풀어보면 虹은 벌레충 부수에 무지개 홍, 어지러울 홍, 양기가 음기를 공격할 홍으로 쓰이는 등 좋지 않아 보이는 의미를 가졌다. 霓는 무지개 예이다. 우리말 무지개라는 어감이 좋고 느낌이 좋은 단어가 한자말로 풀어 놓으니 불길하고 무서운 단어가 되었다. 유교적 천문관에서 무지개는 군주의 상징인 임금인 태양을 가리는 요물이었다. 중국의 [진서] “천문지” 운기조편에서 홍예는 태양 곁에서 태양 빛을 가리는 복일광명(覆日光明)의 요기로 취급하였다. 즉, 해를 가리는 귀신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무지개는 태양 옆에서 서로 총애를 다투는 모습이라 하여 신하가 인군을 모략하는 흑심이나 후비를 쫓아 내려는 내음(內淫)의 징조로 생각하였다. [한서] “식부궁열전”에서는 무지개가 뜨면 해와 달을 가리고 유언비어가 유행하며 현명한 인재들이 숨는다고 표현하였다. [한서] “오행지”에 인용된 “경방역전”은 무지개가 이중으로 끼면 가을까지 가물며, 처가 순종하지 않으며, 부인이 국정을 전횡하고, 군주가 음란해져 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조상들에게 무지개는 아름다운 자연현상이 아니라 왕의 상징인 태양을 가리는 재변이었다.



우리 조상은 천재지변을 세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던 기록의 대가들이다. 태양을 가리는 재변인 무지개도 당연히 조심스런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무지개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면 “무지개”로 1317건 “쌍 무지개”로는 68건이 검색 된다. 이 중에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도 있고 다른 논의 중 무지개가 언급된 것들을 모두 합한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기록 되고 논의될 만큼 무지개는 중요한 자연 현상이었다. 물론 즐거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현상이었다. 특히 흰 무지개가 태양을 가로지르는 현상인 백홍관일(白虹貫日)은 왕에게 큰 재변이 일어나거나 나라에 병란이 발생 할 징조로 해석되어 특별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무지개라는 화려한 요기(妖氣)가 왕의 상징인 태양을 직접 침범해서 빛을 가리니 정말 큰 변괴나 재난이 일어날 징조였다. 선조 6년에 백홍관일 현상이 일어나자 왕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 구언하고 지방에 있는 유력한 신하인 성운(成運)과 이항(李恒)까지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여 재앙을 해소할 계책을 물으려고 하였다. 구언은 신하나 재야에 있는 선비들에게 조정에 일어난 일에 대해 건의를 듣는 일로 어떤 주장을 펼쳐도 왕이 죄를 묻지 않는 특단의 대책 중 하나였다. 그래서 보통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왕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많이들 한다. 그런데도 구언을 요청한다는 것은 왕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방증이었다. 선조 11년에도 백홍관일 현상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자연재변에 책임을 지고 정승들이 사직을 요청할 만큼 무지개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무지개는 정쟁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선조 12년 흰 무지개가 두 번이나 태양을 가로지르는 변괴가 일어났다. 선조는 관례대로 구언(求言)하였다. 이 때 사헌부에서는 백홍관일 현상을 이용하여 심의겸을 소인이라 하고 정철과 김계휘를 사당(邪黨)이라고 공격을 하게 된다. 동인은 당시 등장하고 있던 서인이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이 무지개로 왕에게 경계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서인을 공격한다.


중종 때 조광조와 관련해서도 천재지변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성종말 이후 소빙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에도 자연재해가 급증되었다. 연산군 당시 급증한 천재지변에 대해서 연산군의 방탕을 천재지변과 연관 지으면서 정권을 탈취한 중종과 조정은 중종 치세에서도 계속되는 재변에 당황한다. 반정을 이루었으니 하늘이 감응해서  줄어들어야 할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났다. 이 때 등장한 조광조 등 사림은 천재지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사방식을 요구한다. 당시 이조정랑 김정국은 천변을 줄이기 위해서는 왕이 매일 신하를 만나 진언을 듣고 현인을 뽑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조광조의 현량과로 이어져 사림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하였다. 현량과의 시행과 위훈삭제의 건이 결합되어 기존의 훈구세력을 자극하면서 중종 14년(1519년) 11월 16일 반정공신이 조광조와 사림을 숙청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우연히도 같은 날 전라도지역에 쌍무지개 같은 빛이 몇 시간동안 태양을 침범하는 일변(日變)현상이 일어난다. 이 소식이 13일 뒤 29일 조정에 전달된다. 조정대신들은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8명을 한꺼번에 유배 보낸 탓이 아닌가하며 두려워하게 된다. 특히 부제학 이사균은 “백홍(白虹)이라는 것은 음기(陰氣)인데 감히 태양을 범하여 겨울철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큰 변입니다. 확실히 지목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마침 조광조 등을 죄준 날에 나타났습니다. 조광조 등은 경학(經學)으로 잘 다스려지게 하고자 하였고 임금께서도 말하면 들어주고 계책은 따라 주셨으므로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후진의 선비들도 보고 본떠서 과격한 폐단을 이루었으나 저 사람들의 마음은 나라의 일을 위하였을 뿐인데 하루 아침에 8인을 귀양보내었으니, 외간 사람들이 다 중간에서 한 일이라고 의심합니다. 사류(士類)라면 누구인들 의구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일은 필부와 달라서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천상(天象)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 라고 조광조를 엄호한다. 승지 김희수는 “신은 감히 천청(天聽)을 돌이킬 것을 바라지 않으나, 임금께서 이미 저들에게 간사한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 죄를 조금 감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며 조광조를 변호한다. 겨울이어서 어려웠겠지만 쌍무지개가 한번 나타났으면 중종의 마음이 변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지만 조광조가 살아남았다면 사림과 훈구의 대결을 새로운 모습이었을 왕권과 신권의 대결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달랐을 것이다. 연이어지는 천재지변을 무기로 특히 자신들이 하옥되던 날 나타난 쌍무지개로 훈구와 중종을 압박했으면 사림의 등장이 더 빨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조광조는 다음 달 사사된다. 무지개가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태양의 힘이 약해져 기후가 추워진 소빙기에 더욱 절실히 태양의 힘이 아쉬웠을 것이다. 태양을 가리는 무지개는 오늘날과 같이 아름다운 자연현상이 아니라 두려움과 위기감을 일으키는 재변이었다. 과학이 발달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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