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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신청해 읽고 글을 쓰기까지 몇 개의 망설임을 거쳐 왔다. 나의 자살, 내 주변인의 자살, 남겨진 이의 가슴에 남을 상실감과 상처는 삶이 다소 고될 때 내 머릿속 상상 세계에서 몇 번이고 재생-되감기되었으나 실제 세계에서 그것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는 내 상상 속 비디오와는 전혀 다른 것일 터여서, 감히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받을 감정적 타격이 두렵기도 했다. 심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과 장례식을 경험해 본 적 없어 이따금 상상으로 그것을 구현해 볼 뿐인 철없는 내가 자살 사별자들의 마음을 곡해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인간인지 회의감도 들었다.
<내일>이라는 웹툰이 그런 나의 등을 가만히 떠밀어주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자살을 결심하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 비록 허구세계 속 인물들이었지만 스스로 죽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펑펑 울고 웃었던 나이기에, 나는 그 안에서 나와 주변인, 내가 모를 뿐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사람들을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기에 지레 겁 먹지 말고, 마냥 내 얘기나 남의 얘기라고 일갈하지도 말고 그냥 책장을 한 번 펼쳐 보자 마음 먹었다. (엄마와 산책하며 이런 솔직한 마음을 나누었던 것도 조그만 용기가 됐다.)
자살, 자살 사별자라는 단어만 봐도 처음에는 움칫거렸다. 그러나 먼저 떠난 이를 잘 애도하고자 낯선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자처하고 괴로운 기억, 감정, 생각 등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때로는 눈물로 화로 그것들을 흘려 보내는 자살 사별자들의 용기가 점점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고인과 함께였던 과거를 지우거나 뭉개 없애지도, 과거의 자신을 한없이 탓하거나 하여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영영 그렇지는 않았다. 고인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치열하게 애도했다. 자신과 같고도 다른 이들의 쓰린 마음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보듬으며 서로의 내일을 응원했다. 여섯 밤 동안 펼쳐진 그 일련의 과정이, 한 사람이 쓴 르포르타주를 보았을 뿐이지만, 너무나 따뜻하고 감동적이어서 이야기 끄트머리에서 조금 울었다.
읽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도 했지만 실제로 내 행위가 변화하기도 했다. <내일>을 읽으면서도 나를 여러모로 돌아봤는데 <여섯 밤의 애도>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 우리는 힘듦을 강조할 때 죽음을 쉽게 들먹이고 여차하면 자살한다고, 또는 자살하라고 농담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 자살 사별자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지는 그 단어를 농담처럼 내뱉을 수 없다.
어젯밤 친구 한 명과 시시콜콜한 카톡을 하다가 별 생각없이 '귀찮아 죽겠다'를 쓰려는데 손가락이 뭔가에 걸린 듯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간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손으로 뱉었던 죽겠다, 죽는다, 죽인다 같은 말들이, 그 실재성이 나를 멈춰세웠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농담일 이 말들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음을, 또 누군가는 이 말을 농담인 척 진담 100%로 건넬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부디 내가 이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텐데. 만회할 수 있는 실수가 있는 한편 결코 만회할 수 없는 말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도 있으니까.
새로이 깨달은 것들 말고 특히 공감되거나 맘에 와닿는 말들도 있었다. 애도 상담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놔서인지 나도 누군가와 대화하듯 책장과 머릿속 생각장을 맘 놓고 넘나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기념하는 의식, 날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요즘의 나는 내 생일날을 아닌 척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 신기하네.'
'나도 날씨처럼 변화하는 내 감정을 '그렇구나.'하며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했는데. 지금도 어려운 건 매한가지지만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됐을지도 모를 많은 이름없는 것들이 그저 흘러갔어.'
'1보 전진 2보 후퇴를 1보 후퇴라고 말할 수는 없어. 잠시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아무튼 전진해봤잖아. 전진해봤기에 후퇴를 결정할 수 있었던 거야. 애도도 그렇고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1보 전진 2보 후퇴를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겠지. 그 순간들이 파도처럼 내게 왔을 때 무리해서 그저 앞으로만 가려 하지는 말자. 뒤만 돌아보지도 말자. 천천히 그 과정을 통과하는 거야.'
아래 글귀들을 보고 영화 <코코>가 떠오르기도 했다. 죽은 이를 기억(re-membering)하는 과정을 아름다운 상상력을 보태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단단하게 그려낸 영화. 자살 사별자가 경험하는 것들은 여타 사별자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지만 모든 사람은 삶을 살아가며 소중한 존재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를 애도하며 이전과는 달라진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코코>도, 아래 세 글귀도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 싶다. 특히 애도의 과정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이들이 홀로 모든 걸 감당하려 하며 너무 큰 고통을 짊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 고인의 행복, 고뇌, 열정까지 온전하게 기억하기
- 세상은 묘지 위에 있고, 죽은 자는 산 자의 틈 속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써 지우려 하지 말자.
- 슬픔은 연결의 감정이다. 누군가를 잃은 그 자리에서 사별자는 다시 누군가와 단단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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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레 두려워하며 도망치지 않기를 잘했다. <여섯 밤의 애도>는 절절한 고통에 휩싸인 이들의 소리지름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했으나, 오히려 애도 상담 참여자들은 지면 너머의 나보다 담담하고 용기 있었다. 그들이 고인을 애도해가는 과정을 읽어나가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전과는 달라진 삶을 살아가는 것, 고인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배웠다.
정작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오늘 나의 생각과 배움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겠지만 설령 그렇대도, 또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 들이 나를 혼란스럽고 괴롭게 해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한다 해도 애도란 원래 그러한 것을 거쳐가며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으니 괜찮은 것도 같다. 어떤 감정들은 봇물 터지듯 두는 게 나은 것 같다는 어느 상담 참여자의 말 한마디가 왠지 마음에 맴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