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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 이 글은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저자 율리아 에브너의 신념과 용기가 너무 멋있어서. 정치학자이자 반극단주의자인 그는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그리고 극단주의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십여 개의 극단주의 단체에 잠입해 내부 실상을 밀착 취재한다. 네오나치, 백인우월주의자, 여성 반페미니스트, 지하디스트 등과 온오프라인으로 접촉, 대화한 내용이 책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머나먼 타국에서 번역된 책을 읽을 뿐인 나조차 긴장돼 손톱을 씹었다. 저자가 극단주의적 논리에 휘말려 잠시 자신을 잃고 흔들릴 때 나도 덩달아 흔들렸고 저자의 신상이 밝혀질 뻔한 순간에는 내 어깨도 뻣뻣이 굳었다. 그러나 매 순간이 이렇듯 공포스러웠던 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어쨌든 이들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뜻을 품고 있듯 같은 극단주의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생각과 감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집단의 이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재미와 친밀감, 성취감 때문에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도 꽤 많았다. 착잡한 동시에 안심이 됐다. 그들은 적어도 설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 나 또한 그 세 요소 때문에 다소 극단적인 이념을 수용했던 적 있어 공감이 되기도 했고...
그러나 극단적 이념을 확산하고 집단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지능적으로 계획,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결코 멍청하거나 줏대 없지 않다. 그들은 '아무것'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 그들은 '방구석 오타쿠'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정치적 위력을 떨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 를 집단에 영입하는 데 무척 능통하다. 조심스럽지만 소심하지 않고, 음지에서 주로 활동하나 궁극적으로는 양지로 도약하려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경계하고 이들의 전략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방책이자 무기를 제공한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그것은 바로 정보다.
극단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전략을 고발하며 저자는 편견을 버리고 경고등을 켤 것을 권한다. 이때 버려야 할 편견이란 극단주의자들이 비주류적이고 두려움을 조성하며 음지에서 '자기들끼리만' 활동하리라는 생각, 그래서 극단주의적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반대로 경고등을 켜야 한다는 말의 뜻은 극단주의(자)를 공포, 경멸, 무시하지 말고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그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글귀가 결국 저자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인 듯 싶다.
"가끔은 행동의 대가를 묻는 데서 더 나아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때의 대가가 무엇일지까지 물어야 한다."
'극단적인 사람들, 극단주의 집단 그까잇거 무시하면 그만 아니야? 맘 둘 곳 없는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이 쉽게 당한다던데 조심해서 안 당하면 되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체적인가, 회피적인가?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심히 회피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극단주의자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 조심스럽고 중도적이며 회피적인 사람들, 대놓고 아니다 싶은 사람들은 피하지만 내 맘 편한 게 중요해 '이 사람은 이런가 보다' 하며 수용해선 안 될 것까지 수용하는 사람들. 저자처럼 뚜렷한 목적을 갖고 집단에 잠입한 사람조차 흔들리는데 나 같은 사람은 까딱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과 경각심을 갖게 됐다. 『한낮의 어둠』이라는 제목이 새삼 다시 보인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악은 쉬이 선의 탈을, 어둠은 쉬이 빛의 탈을 쓰고 오며 극단주의 역시 지극히 무해한, 어쩌면 편하고 즐거운 양태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을 것이다. 관자놀이가 알싸하다. 이 알싸함을 무해함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