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 - 죽음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가지 않았다
에드위지 당티카 지음, 신지현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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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 에드위지 당티카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제대로 하는 독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를 읽는 동안 내내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렸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결국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향하는 생명이 아닐까? 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만인의 소명일 텐데, 그게 참 어렵다. 그 대상이 내 어머니, 내 남편의 어머니일 때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에드위지 당티카의 어머니는, 정말로 사랑받을 만한 어머니였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어린 시절 8년 동안 어머니가 없이 지내야 했던 에드위지 당티카의 글에서는 그 어떤 원망도 보이지 않는다. 연민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을 한다. 어머니를,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는 이 세상 모든 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 모든 독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는 에드위지 당티카의 책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딸의 슬픔이 담겨 있고, 회상이 담겨 있고 사랑이 담겨 있다. 어머니를 잃어야만 하는 딸을 보듬어줄 문학이 담겨 있고 시가 담겨 있다.

 

뉴욕타임스는 에드위지 당티카는 애도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한다.”라고 했다. 나도 에드위지 당티카가 겪어내야 했던 시간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에게도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없어야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존재들이 작가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지닌 숙명일 거다. 누구나, 언젠가는 각자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당티카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토록 심오한 통찰력을 내보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 세상의 모든 딸들은 분명히 어머니에 대해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책, 하지만 신파적이지는 않은 책, 먹먹한 독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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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만나다 - 한용운에서 기형도까지, 우리가 사랑한 시인들
이운진 지음 / 북트리거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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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만나다/이운진 저/북트리거 출간/20182

 

정말로 오랜만에 읽는 시인에 관한 책이다.

 

학창 시절에는, 80년대,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문학소녀답게 시도 몇 편 써보기는 했으나, 결국 시인은 부단한 노력과 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산 지 몇 십 년, 이제는 시 한 편 읽는 것도 버겁고, 또 시를 읽어도 의미도 모르겠어서 영 관심을 끊고 지냈는데, 문득 시를, 시인을 읽고 싶어졌다. 왜일까? 아마도 요즘은 시인 때문에, 문단의 이야기 때문에 세간이 시끄럽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게. 요즘 참 시끄럽다. 순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던 시인들이 -사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예전 문단을 기웃거릴 때 넌지시 전해 듣기는 했으나- 참으로 일반인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인터넷 신문으로 읽는 이야기인데도 입안이 참 쓰다.

 

그래서 시인을 만나다에서는 김영랑 같은 시인을, 박재삼 같은 시인을, 혹은 그런 시인들만을 만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책에는 참 다양한 시인들이 나온다. 시인의 행적은 못마땅하나, 시인의 업적만은 내칠 수 없다는 이운진 시인의 시인을 위한 변명도 계속해서 나온다. “비난 받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학적 성취는 한국 시사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8) , 그러지 말자. 우리 문단이 인성 나쁜 시인들을 대체할 위대한 시인을 배출하지 못할 만큼 빈약한 터전이 아닐진대, 왜 이 사회는 배은망덕한 인간을 참아야 하는 것인가? 실력만이 아니라 인간성으로, 인성으로 사회를 감화시키는 저자만을, 독자로서 갖고 싶다는 마음은 정령 욕심인 것인지.

 

오르한 파묵은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 주는 자”(49)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시인들만을 만나고, 그 시인들만의 작품을 읽고 싶다.

 

그래서 박재삼 시인의 시집을 진지하게 읽어보려고 한다. 시인을 만나다에서 다시 만난, 너무나도 친숙한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향수’(정지용)를 읽으며 왈칵 울어버린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박쥐를 바늘에 꽂는 잔인한 심성을 가진 시인 따위는 버려버리려고 한다(사실 아주 오래 전에 버렸지만). 작가들도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한다, 라는 말로 서로를 용서하지는 말자. 그런 용서가 문단을 황폐하게 만들고 독자를 떠나가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음을 제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정말로 우리 문단은 그런 사람들까지 품어야 할 정도로 빈약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시인이 기형도라서 다행이다. 집 가까이 기형도 문학관이 있다. 늘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한 번도 용기를 내보지 못했던 시인. 빠른 시일 내 문학관도 가보고 드디어 읽기도 해야겠다. 세상에는 사랑해야 할 시인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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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이 이렇게 많이 차 있으면 문제가 많겠는데? 턱이 낮은 곳 지하는 어떻게 해? 지하에도 상가가 많을 텐데.”

 

나영은 발밑까지 차오르려고 하는 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당장 지하철도 문제가 많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야?”

 

현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도시 한 가운데가 이 정도라면, 분명히 사단이 난 걸 텐데…….”

 

나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앞만 보았다.

 

일단 다시 들어가서 식당 전화를 좀 빌릴까? 집에 문제없는지 알아봐야지.”

 

현수가 다시 지하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게. 지금은 우리, 휴대폰도 없지. 우리 집은 그래도 조금 높은 곳에 있으니까 다행인데, 자기 집은 지대가 낮잖아. 어떻게 하지? 지금 시간이면 어머니 혼자 계실 텐데. 빨리 전화 해 봐.”

자기 집은?”

나는, 집 전화번호를 모르겠어.”

이런.”

 

현수의 집 전화번호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같았으니까 기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25년 동안 네 번이나 이사를 다닌 나영은 인천 집 전화번호를 도무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일단,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 봐. 그리고 사람들한테 말해서 빨리 나오라고 하고. 여기 넘치기 시작하면 지하에 있는 사람들 다 문제가 될 거야. 일단 옥상이라도 올라가 있어야지. 이거, 도로로 나가서 어딘가로 갈 수는 없을 거 같아.”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내려갔다 올게.”

 

현수는 다급하게 말하고 재빨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나영은 혹시라도 물이 건물로 흘러 들어와 지하가 잠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현수가 내려간 지하를 쳐다봤다가 물이 넘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면 다시 건물 밖에서 찰랑이는 물을 쳐다보면서 현수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현수가 뛰어서 올라왔다.

 

엄마 집은 아무렇지도 않대. 여기만 그런가봐.”

사람들은?”

나오라고 했어. 다들 나온다고 했는데, 챙길 게 있나봐.”

물 넘치기 전에 나와야 할 텐데.”

 

나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바깥을 내다봤다.

 

물이 조금 줄어든 거 같지 않아? 살짝 내려 간 거 같은데?”

그러네.”

 

현수와 나영은 건물 현관 앞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렇지? 물이 조금 빠진 거 같지?”

그런 거 같아. 아주 빨리 빠지고 있는 거 같은데. , 층계도 하나 보인다.”

정말. 어디가 넘쳤다가 빠지고 있나봐.”

이렇게 많은 물이 넘쳤다가 이렇게 빨리 빠지는 것도 문제 아니야?”

 

현수는 건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뭐 하려고 그래?”

물이 어느 정도 깊은가 한 번 보려고.”

아까, 층계 서너 개 올라왔잖아. 이렇게 뿌연데, 괜히 잘못 빠졌다가 큰일 나려고. 일단 기다려.”

 

물에 발을 담가보려는 현수를 말리던 나영은 문득 끔찍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파래졌다.

 

혹시, 물이 빠진 뒤에 시체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 한강이 완전히 넘쳐버린 거 같은데. 예전에 태국에 해일이 덮쳤을 때…….”

에이, 설마.”

 

그렇게 말은 했지만 현수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만 같았다.

 

빨리 들어와.”

 

불안했던 나영은 현수를 잡아끌었고,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나영에게 잡아 끌어당겨진 현수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어!”

 

아차 하는 순간에 현수의 발은 건물 밖 물 표면에 닿았고, 그 순간, 물은 빠른 속도로 먼 소실점을 향해 빠르게 응축하기 시작했다.

 

자기야, 저거 뭐야?”

 

나영은 팔을 바깥쪽으로 쭉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러게, 저게 뭐야.”

 

현수도 놀라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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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 먹는다더니, 잘 먹네.”

, 원래 먹는 거야, 앞에 있으면 그냥 먹잖아. 이러니까 살찌지.”

 

투덜대는 나영을 보면서 현수는 그래, 내가 잘 알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그런 현수가 얄미웠다. 항상 저렇게 동조하지 않아도 될 말에 동조하는 거, 정말 얄미웠다.

 

그래도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

 

나영은 접시에 남아 있는 밥을 흘긋 보고는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25년이 지났는데도 레스토랑의 풍경은 낯설지가 않았다. 종로에 오면 꼭 들르던 곳. 몇 해 전에, 엄마들 모임에 가기 전에 이곳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찾아와 봤다가 이미 건물도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로 아쉬워했던 곳인데.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 식당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나영은 좋았다. 결국 몇 년 뒤에는 사라질 곳이라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을 주방장을 찾아가서 힘내시라고, 행복하시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나영은 혼자 씩 웃었다.

 

, 배가 부르니까, 이제 좀 기분이 좋아졌어?”

 

현수가 나영의 속도 모르고 한 마디 했다.

 

아니거든.”

아무튼, 집에 가서 절대로 안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지?”

아니거든. 절대로 안 돌아갈 거야.”

 

단호한 나영의 말에 현수는 혀를 찼다.

 

도대체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어디 있다고 그래? 어차피 우리가 이 때로 돌아온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억을 잃어버린다며. 지금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또다시 25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니, 기억을 간직하고 산데도 힘들고 지루한 시간일 거 같은데, 어차피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서든 비슷한 삶을 살아갈 텐데, 굳이 뭘 또 그걸 반복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는 찾아낼 거야. 일단 자기가 주고 간 편지를 찢어서 절대로 내용을 읽지 않고, 집이 아니라 독서실로 가서 공부할 거야. 5분 내내 왜 어렸을 때는 연애를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길게 길게 써 놓고, 내가 절대로 집에 못하게 해 달라고 진아한테 부탁할 거야.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결국은 미래는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래, 그리고 며칠 뒤에 내가 전화해서 다시 만나고, 뭐 그런 거겠지.”

 

현수는 연어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집어 먹고 물을 마시면서 입을 헹궜다. 원래 이 식당에 오면 돈까스를 시켜 먹던 현수였지만, 어차피 3주 후면 미래로 돌아갈 거라며 용돈을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연어 스테이크를 시켜먹었다. 5000원은 나영이 냈고.

 

일단, 다시 미래로 가건 다시 과거로 가건, 돌아가려면 3주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는 속 편하게 놀자. 어차피 이 시간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잖아.”

아니, 절대로 자기는 안 만날 거야.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작전을 짤 거야.”

그래, 그래. 내가 전화하면 일단 나오기는 하고.”

안 나온다니까.”

 

나영의 말에 현수는 씩, 웃으며 또, 그래 알았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과 머리 밖에 없었던 현수의 저 자신감을 좋아했었지.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신감으로 나영은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듯이 행동했던 어린 현수를 어린 나영은 사랑했었다. 물론, 조금도 변하지 않은 나이든 현수도 나이든 나영은 사랑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40대의 일상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몸으로 저녁밥을 차려야 할 때면 너무나도 화가 나고, 너무나 피곤해서 저녁밥을 사먹을 때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삶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 없이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상쾌하게 샤워하고 그냥 자고 싶을 만큼 자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언제 잠들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현수의 삶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일단, 오늘은 가서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고민해 보자. 3주 이상 고민하다보면 뭔가 결론이 나겠지. 우리, 내일은 강촌 갈까? 거기,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 번 가보고 싶네. 기차 타고 가자. 우와, 우리 경춘선을 탈 수 있는 거야. 그게 없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식당에서 나오면서 현수가 말했다.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만난다니까. 난 혼자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해.”

에이, 그러지 말고.”

 

현수는 나영의 어깨를 잡으면서 살짝 흔들었다.

 

아니, 절대로 싫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장난처럼 웃으며 나영을 끌어당기는 현수를 밀어내면서 나영은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와 건물 현관을 빠져나가려던 나영은 현관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자기야?”

?”

이 무렵에 종로가 물에 잠긴 적이 있나?”

? 없을 걸?”

그지? 도로가 이렇게 물에 잠긴 건 몇 년 뒤에 강남에서만 있었던 일 아니야? 저거 봐봐. 저게 뭐야?”

? 뭐가?”

 

뒤에서 따라오던 현수가 나영의 앞으로 나오다가 흠칫 멈춰 섰다.

 

이런, 이게 뭐야.”

 

식당 건물 앞 도로는 완전히 물에 잠겨 있었고, 도로를 채운 물은 거의 현수의 발을 적실 정도로 건물의 층계 위까지 올라와 언제라도 건물 안으로 넘쳐들 기세였다.

 

비가 온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앞 건물도 안 보여.”

 

나영은 말했고, 현수와 나영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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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수는 저녁을 먹지 않고 집에 가겠다는 나영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종로 3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배 안 고프다니까.”

 

쇼파형 의자에 앉으면서 나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는 배고프다며.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는데.”

 

현수가 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갑자기 배가 안 고파졌어.”

갑자기 왜? 게다가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들어간다고?”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단 말이야.”

,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아니라니까.”

 

나영은 현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할 때도, 22년 결혼 생활을 할 때 나영은 현수와 있는 시간을 한 번도 지루해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할 때는 시간이 나면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서 돈 떨어지고 버스 떨어질 때가 붙어 있기를 바라던 나영이었다. 그런 나영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집에 간다고 했으니, 나영을 너무나도 잘 아는 현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분명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집에 가서 생각을 했더라도 나영은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물론 생각을 정리한 뒤에 말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지.

 

, 무슨 일인데?”

 

현수가 말해보라는 듯이 나영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음…….”

 

나영은 길게 콧방귀를 꼈다.

 

? 말해 보라니까?”

 

다시 한 번 재촉하는 현수를 흘끔 쳐다본 나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어디를?”

 

나영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현수가 되물었다. 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실로?”

 

현수가 또 물었다.

 

현실이 아니라, 미래겠지.”

 

나영이 대답했다.

 

꿈인데, 현실이건 미래건, 무슨 상관이 있어?”

 

현수가 또 물었다.

 

꿈이건, 현실이건, 미래건, 난 상관이 있어.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꿈이면, 꿈인 채로 새롭게 살아볼 거야. 현실이면, 당연히 새롭게 살아볼 거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돌아가기 싫다고.”

 

나영이 고개를 돌려서 현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돌아가면, 아이들은 어쩌고?”

 

현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차피 우리가 안 돌아가면 아이들도 없어.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돼.”

 

나영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문제 될 건 없는 거 같아. 그냥, 나는 지금 살아가는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이번에는 나로서, 나 혼자서 살아볼 거야.”

그게 말이 돼? 어차피 한 달 뒤면 기억을 잊는다며? 그럼 또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텐데, 그거 지겨워서 또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리고 20대가, 30대가, 자긴 좋아?”

 

현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좋지 않아.”

 

나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남겠다는 거야?”

“20대라는 시기가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는 없는 시기란 거 잘 알아. 마음만 앞서고 제약은 많고. 어른들은 답답하고, 가진 건 하나도 없고. 게다가 우리 20대는 IMF도 있을 테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나는 꼴랑 하나 가지고 있었던 중위권 대학 졸업장조차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근데,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는 않아.”

이런 식이 어떤 식인데?”

 

현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물었다.

 

매일 같이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도대체 왜 이유도 모른 채로 그 많은 전을…….”

 

나영은 전은 남편도 같이 부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명절, 제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40대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산더미처럼 차고 넘쳤으니까.

 

아무튼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그 순간, 식탁으로 다가온 레스토랑 종업원에게 저는 돈까스 주세요.”라고 말했고, 현수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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