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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는다더니, 잘 먹네.”
“뭐, 원래 먹는 거야, 앞에 있으면 그냥 먹잖아. 이러니까 살찌지.”
투덜대는 나영을 보면서 현수는 그래, 내가 잘 알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그런 현수가 얄미웠다. 항상 저렇게 동조하지 않아도 될 말에 동조하는 거, 정말 얄미웠다.
“그래도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뭐.”
나영은 접시에 남아 있는 밥을 흘긋 보고는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25년이 지났는데도 레스토랑의 풍경은 낯설지가 않았다. 종로에 오면 꼭 들르던 곳. 몇 해 전에, 엄마들 모임에 가기 전에 이곳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찾아와 봤다가 이미 건물도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로 아쉬워했던 곳인데.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 식당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나영은 좋았다. 결국 몇 년 뒤에는 사라질 곳이라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을 주방장을 찾아가서 힘내시라고, 행복하시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나영은 혼자 씩 웃었다.
“왜, 배가 부르니까, 이제 좀 기분이 좋아졌어?”
현수가 나영의 속도 모르고 한 마디 했다.
“아니거든.”
“아무튼, 집에 가서 절대로 안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지?”
“아니거든. 절대로 안 돌아갈 거야.”
단호한 나영의 말에 현수는 혀를 찼다.
“도대체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어디 있다고 그래? 어차피 우리가 이 때로 돌아온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억을 잃어버린다며. 지금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또다시 25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니, 기억을 간직하고 산데도 힘들고 지루한 시간일 거 같은데, 어차피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서든 비슷한 삶을 살아갈 텐데, 굳이 뭘 또 그걸 반복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는 찾아낼 거야. 일단 자기가 주고 간 편지를 찢어서 절대로 내용을 읽지 않고, 집이 아니라 독서실로 가서 공부할 거야. 5분 내내 왜 어렸을 때는 연애를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길게 길게 써 놓고, 내가 절대로 집에 못하게 해 달라고 진아한테 부탁할 거야.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결국은 미래는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래, 그리고 며칠 뒤에 내가 전화해서 다시 만나고, 뭐 그런 거겠지.”
현수는 연어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집어 먹고 물을 마시면서 입을 헹궜다. 원래 이 식당에 오면 돈까스를 시켜 먹던 현수였지만, 어차피 3주 후면 미래로 돌아갈 거라며 용돈을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연어 스테이크를 시켜먹었다. 5000원은 나영이 냈고.
“일단, 다시 미래로 가건 다시 과거로 가건, 돌아가려면 3주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는 속 편하게 놀자. 어차피 이 시간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잖아.”
“아니, 절대로 자기는 안 만날 거야.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작전을 짤 거야.”
“그래, 그래. 내가 전화하면 일단 나오기는 하고.”
“안 나온다니까.”
나영의 말에 현수는 씩, 웃으며 또, 그래 알았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과 머리 밖에 없었던 현수의 저 자신감을 좋아했었지.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신감으로 나영은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듯이 행동했던 어린 현수를 어린 나영은 사랑했었다. 물론, 조금도 변하지 않은 나이든 현수도 나이든 나영은 사랑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40대의 일상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몸으로 저녁밥을 차려야 할 때면 너무나도 화가 나고, 너무나 피곤해서 저녁밥을 사먹을 때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삶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 없이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상쾌하게 샤워하고 그냥 자고 싶을 만큼 자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언제 잠들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현수의 삶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일단, 오늘은 가서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고민해 보자. 한 3주 이상 고민하다보면 뭔가 결론이 나겠지. 우리, 내일은 강촌 갈까? 거기,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 번 가보고 싶네. 기차 타고 가자. 우와, 우리 경춘선을 탈 수 있는 거야. 그게 없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식당에서 나오면서 현수가 말했다.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만난다니까. 난 혼자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해.”
“에이, 그러지 말고.”
현수는 나영의 어깨를 잡으면서 살짝 흔들었다.
“아니, 절대로 싫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장난처럼 웃으며 나영을 끌어당기는 현수를 밀어내면서 나영은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와 건물 현관을 빠져나가려던 나영은 현관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자기야?”
“왜?”
“이 무렵에 종로가 물에 잠긴 적이 있나?”
“뭐? 없을 걸?”
“그지? 도로가 이렇게 물에 잠긴 건 몇 년 뒤에 강남에서만 있었던 일 아니야? 저거 봐봐. 저게 뭐야?”
“응? 뭐가?”
뒤에서 따라오던 현수가 나영의 앞으로 나오다가 흠칫 멈춰 섰다.
“이런, 이게 뭐야.”
식당 건물 앞 도로는 완전히 물에 잠겨 있었고, 도로를 채운 물은 거의 현수의 발을 적실 정도로 건물의 층계 위까지 올라와 언제라도 건물 안으로 넘쳐들 기세였다.
“비가 온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앞 건물도 안 보여.”
나영은 말했고, 현수와 나영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