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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극장 앞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몇 주 전에(그러니까 현실에서) 잠깐 차를 타고 지나간 서울극장 앞은 20여 년 전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주 갔던 곳이라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새롭게 바뀐 거리 앞에서 나영은 지난 모습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기억이란 게 참 허무하구나, 하고 웃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이렇게 생생하다니.

 

기왕 영화를 보려고 했으면 이때 안 본 걸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파 앤드 어웨이라니, 우리도 참 대책 없다.”

 

나영은 극장 입구에서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매표소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 재미있잖아?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고.”

 

현수가 으레 그 어때, 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파 앤드 어웨이는 볼 때마다 재미있기는 하지. 톰 크루즈도, 니콜 키드먼도 진짜 예쁘고. 이때는 두 사람이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계속 알콩 달콩 살 거 같았는데, 부부가 참 예쁘게 오래 사는 게 쉽지 않나봐. 톰 크루즈랑 니콜 키드먼도 헤어지고, 킴 베이싱어랑 알렉 볼드윈도 헤어지고, 브래드 피트랑 제니퍼 애니스톤도 헤어지고, 내가 예뻐하던 부부는 다 헤어졌어. , 내가 예뻐한다는 걸 그 사람들은 몰랐을 테지만. 와이드와이드 샷, 찍을 때는 정말 부부라서 저런 장면도 찍을 수 있나보다, 했는데, 그때도 막 헤어지려고 하던 참이라며. 연예인 부부란 참.”

그거, 아이즈 와이드 샷, 아니야? 자긴 진짜 제목 못 외우네.”

 

현수가 앞을 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하는 나영이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부딪치려고 하자, 나영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늘 같은 행동을 하는 현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영은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 늘 나를 이렇게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거였다.

 

어머, 부딪칠 뻔 했네.”

 

나영은 멋쩍게 한 마디 하고, 방금 부딪칠 뻔 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남자였다. 나영은 저 남자도 지금은 진짜 늙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 영화, 서울극장에서 보는 거잖아. 우리, 사실은 이거 녹색극장에서 봤는데.”

 

나영이 말했다. 나영과 현수는 영화 아이즈 와일드 샷20여 년 전에 신촌에 있는 녹색극장에서 봤다. 두 사람이 신촌 지하철역을 나와 극장으로 가려고 할 때,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웬만해서는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밖을 내다봤다. 이미 옷은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 버렸는데, 어느새 비는 강도가 훨씬 약해져 있었다. 이미 표를 구입한 영화라, 두 사람은 완전히 젖은 옷을 입고 영화를 봤고, 젖어 있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봐야 할 뒷사람에게 미안해하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영화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감기 걸렸을 수도 있고, 사실 뒷사람한테 완전 민폐잖아. 진짜 우리 생각이 없었네.”

 

나영이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어려서 그렇지 뭐.”

 

현수가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20여 년 만에(그래, 정확히는 25년 만이다. 나이를 정확하게 인지해아 하는 슬픔이라니) 큰 영화관에서 보는 톰 크루즈는 며칠 전에 본 미이라에 나오는 후덕한 아저씨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먼 젊은 청년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운, 이제는 연기파 배우가 된 것 같은 니콜 키드먼은 훨씬 더 아름답고 앳된 신인 연기자였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억과는 다른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조금은 신기해하면서, 나영은 본 영화를 또 본다는 핀잔을 준 것도 잊어버리고 영화에 푹 빠져서 보고 나왔다.

 

아직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나영은 현수에게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조금 구경하다가 저녁을 먹자고 했다. 이때는 광화문에 먹을 게 뭐가 있었더라? 종로 3가에서 광화문 가는 길에 맥도널드도 있었던 거 같고 이때 교보문고는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던 것도 같고, 한참 신기해하면서 걷고 있던 나영의 눈에 탑골 공원에서 옆에 서 있는 천막이 보였다.

 

, 사주팔자! 이 근처에 이런 것도 있었나 보네.”

그런가?”

 

나영의 말에 현수도 천막을 흘긋 쳐다봤다.

 

우리, 사주팔자는 경포대에서 한 번 본 게 다잖아. 그거, 5000원 정도만 주면 되는데, 우리 완전히 속아가지고 3만원 주고 왔잖아. 진짜, 애들 어리버리하다고 완전 사기나 치고. 진짜 못 됐지 않냐? 그때 그 아저씨, 자기는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나한테 은밀하게 할 얘기 있다고 했잖아. 그게 나는 60살 정도까지만 산다고, 인중에 금 있는 거 없애야 한다고 했잖아. 결혼하고 애 낳으니까, 살 쪄가지고 인중선도 사라지더만. 진짜 우리 바보였어.”

 

나영은 천막을 연신 쳐다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사주팔자 보고 싶어? 들어가서 볼까?”

 

현수가 천막을 가리키면서 고갯짓을 했다.

 

아니, 돈 아까워. 분명히 또 책 보면서 쉰소리 할 걸. 3만원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때 경포대에서 그거 쓰는 바람에 우리, 집에 올 차비 말고는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

, 어때. 꿈인데. 들어가 보자.”

아이 참, 아무리 꿈이래도, 할 건 다 하잖아. 더구나, 우리 지금 2만 원 정도 있는 거 아니야?”

깎아달라고 하면 돼지. 보통 5000원 한다며. 그것만 주고 나오지 뭐.”

그게 뭐야. 자기야, , , 진짜.”

 

나영은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손을 잡아끄는 현수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50대 남자가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남자는 고개를 들고 나영과 현수를 쳐다봤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나영은 !” 하는 소리를 냈고, 남자는 나영을 보면서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둘 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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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꿈, 너무 긴 거 같아. 그리고 지나치게 평범하지 않아? 지루해 죽겠어.”

 

노란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나영이 말했다.

 

우리, 가난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돈이 없었나? 꿈이니까 주머니에 몇 십만 원 정도는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근사한 데 가서 잠도 자고. 꿈인데도 시간 되면 졸려. 잠은 자야 하니까, 계속 집에 가야 하잖아. 어제는 엄마한테 맞기까지 했다.”

 

현수가 투덜거렸다.

 

, 이 나이에도 어머니한테 맞는 거야? 하긴 나도 아빠한테 혼났어. 우리 아빠나 자기 어머니나 진짜 무서워. 어머, 이 나이에, 꿈에서도 어머니래. 암튼, 다시, 어머니 아니고, 너희 엄마, 대개 무섭잖아. , 나도 나희랑 어제 대판 싸웠어. 걔는 꿈인데도 여전히 내 옷, 맘대로 입고 가서 늘려 놓는다. , 그거 평생 대개 억울했나봐.”

 

나영이 웃으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근데, 우리 너무 오래 안 하지 않았나? 어차피 꿈인데, 아무 데서나 진하게 한 번 할까?”

 

스무 살 현수가 마흔 살의 현수 같은 표정으로 나영을 보면서 씩 웃었다.

 

뭐래니? 우리 지금 재수생이야.”

 

꿈을 꾸는 마흔 살 나영이 스무 살 나영처럼 얼굴이 벌게지면서 현수를 살며시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잠들기 전에(그러니까 현실에서) 너무 피곤하다고 자기를 밀어내는 나영에게 현수는 이번 주 들어 세 번째로 저 말을 했다. 저녁이면 녹초가 되어 잠들기 바쁜 나영과 달리 아직도(그러니까 역시 현실에서) 체력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현수는 우리 너무 오래 하지 않았잖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피곤해. 나한테 이러지 마.’라는 나영의 말에 늘 그럼 누구한테 그래?’라며 서운해 하는 마흔 살 남편.

 

나영은 라면을 집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현수를 쳐다봤다. 지금 나영이 앞에 앉아 있는 현수는 정말로 스무 살 현수였다. 결혼 전과 후에 몸무게 변화가 2, 3킬로그램도 안 되는 현수였지만, 스무 살 현수는 정말로 마흔 살 현수와는 달랐다. 남편은 나이를 전혀 안 먹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남자도 완전히 늙었던 거다.

 

맞다! 자기야, 혹시 거울 없어?”

 

나영이 급하게 말했다.

 

내가 뭐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

 

현수가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먹던 라면을 후루룩, 마저 먹었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맞다. 남편은 뭐든지 아주 급하게 먹는 사람이었지. 지금은 많이 느긋해져서 저렇게 안 먹는데. 후훗, 기억이 새롭네. , 잠깐만? 저 사람 지금 스무 살이지?

 

나영은 갑자기 지금 앞에 있는 현수의 나이를 생각했다. 지금 현수가 스무 살 현수라면 나영도 스무 살이어야 했다. 스물두 살 때 화장독이 올라 완전히 곰보 피부가 되어 버린 나영이 아니라 아직은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나영이어야 했다. 둘째를 낳고 10킬로그램이나 불어버린 나영이 아니라 똥배는 있을지언정 그래도 44사이즈와 55사이즈 중간에 간신히 몸매를 걸치고 있던 나영이어야 했다.

 

꿈속에서 나영은 밤이면 집에 돌아갔지만 꿈인데도 피곤해서 잠이 들고, 동생들과 실랑이하느라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꿈에서까지 거울을 보면서 한숨 쉴 이유는 없으니까. 스무 살 나영이라면 눈 밑에 기미도 없고 자글자글한 이마 주름도 없고 가슴보다 훨씬 튀어나온 뱃살도 우람한 팔뚝도 없겠지?

 

사실 스무 살 때도 거울 보는 게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마흔 살 아줌마가 되면 거울 보면서 나도 한 때는 이라는 탄식을 하게 마련인데, 그 한 때를 왜 꿈속에서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자각하고 확인해 보지 않았던 걸까?

 

나영은 초조하게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꿈이라고는 해도 왠지 민망한 학원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전철역에서 거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꿈이라고는 해도 마흔 살 나를 알고 있으니, 예뻐 보일까?

 

우리, 이런 얼굴과 몸으로 사랑을 했던 거구나. 나영은 정신없이 라면을 먹는 현수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자기 라면을 다 먹은 현수는 다 먹은 거야?”라며, 미처 나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나영의 라면 그릇을 자기 앞으로 가져가더니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스무 살의 나영은 항상 밥을 반쯤 남겼고, 스무 살의 현수는 늘 나영이 남긴 밥을 먹었다. 사귄 지 1년쯤 지났을 때 현수는 나영이 때문에 자기가 살찐다고 웃었는데. 마흔 살 나영은 이제 두 그릇도 거뜬히 먹어치우는 아줌마가 되었다꿈속에서 현수는 아직도 나영의 밥을 먹는구나. 꿈속에서 나영은 자기 밥쯤은 스스로 야무지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영은 현수가 가지고 간 라면 그릇을 살그머니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 아직 다 안 먹었어.”

 

마흔 살 나영은 , 하고 웃으면서 젓가락을 라면 그릇에 푹 꽂았다. 마흔 살 현수는 그래, 그래, 하고 웃더니 아줌마, 공깃밥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다.

 

라면 먹고 공깃밥 시켜 먹는 꿈이라니, 진짜 재미없다.”

 

마흔 살 나영이 말했고,

 

그게 인생이다.”

 

스무 살 현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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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이었다.

워크맨 커버 안에 곱게 적힌 종이.

익숙한 학원 교실.

옆에 앉은 진아.

그 날이 틀림없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물론 꿈을 꾸는 거겠지. 이 뒤에 벌어질 일을 정확하게 알아.

 

나는 이 쪽지를 열어 읽어볼 테고, 쪽지에 적힌 우라질 내용을 읽고 놀라고 당황하면서 울고 이 교실을 황급히 나가겠지.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밖을 보면서, 머리를 자르고 학원은 그만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집에 가서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괜히 서러워 집안에서 들려오는 재롱이 소리에 재롱아, 언니가 곧 들어갈게, 들어갈게, 라는 소리만 하다가, 문득, 쓰잘데기 없는 편지만 사실은 거의 소설에 가까운 넋두리였지만- 주구장창 쓰다가 점심시간 무렵에 아빠 회사로 가서 열쇠를 받아오고 집으로 들어가 재롱이를 한참을 안고 울다가 한참 잠을 자겠지. 내일부터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그 망할 전화가 오겠지. 우리 진짜 헤어진 거냐는 말을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네가 아니, 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는 거야. 그날 오후, 신도림에서 부랴부랴 만난 우리는 그 즐겁고 행복하고 우울하고 화났던 모든 순간을 다 이기고 두 아이의 엄마, 아빠로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들으면서 25년을 함께 하겠지. 내가 가진 이 세상 최고의 위안은 바로 당신임을 절절하게 느끼면서, 나는 아이 때문에 시어머니 때문에 친정 부모님 때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를, 당신을 보면서 그렇게 삭히면서 살아가겠지.

 

그럼 이제 이 편지를 열어봐야 하나. 너 우는 거 싫어서, 이만 끝내자는 말이 분명히 적혀 있을 텐데, 이 편지를 보고 또 울어야 하나? 이건 꿈인데? 그나저나,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이 편지를 주고 간 거였어? 우와, 그거 때문에 25년을 괴롭혔지만, 새삼 열 받네. 이 많은 아이들이 내가 울고 나가는 걸 본 거 아니야. 아씨, 쪽팔려. 그래놓고는 다음 날 웃으면서 같이 들어왔어. 어린 건지 미친 건지. 그때는 이렇게 쪽팔린 일인지 몰랐는데.

 

, 그래도 지금은 울지 않겠지. 이 편지, 그때는 내일 저녁에 노량진역에서 태워버렸지. 불나면 어떻게 하려고, 진짜 둘 다 생각이 없다. 라이터 불로 칙, 종이에 불을 붙여서 없애 버렸는데.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그럴 듯하게 괴롭혀 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25년 내내 이 편지에 어떤 글이 적혀 있었는지 궁금했었어. 이틀 동안 여러 번 읽어 봤는데, 기억나는 건 너 울게 하기 싫어서 헤어지자뿐이니까. 한 페이지 가득 뭐라고 적어 놓았던 거 같은데. 어디, 한 번 읽어볼까. 지금쯤 그 녀석은 학원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겠네. 그래, 가라. 가서 못 마시는 술이나 실컷 마셔라. 같이 있는 친구는 2년 뒤에 죽을 텐데, 꼭 말려야 해. 대학 가면 MT 가지 말라고.

 

편지를 펼치려다 말고 나영이는 흠칫 놀랐다. 지금쯤 학원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어야 할 현수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 되어 있는 얼굴이 계단을 뛰어 올라온 게 분명했다.

 

편지, 그거 맞지?”

 

현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야? 왜 돌아와? 명호랑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자기, 소주랑 과자 사가지고 명호네 가야지.”

 

나영의 목소리가 컸는지,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자기란다.”

 

들었냐? 자기래. 재들 왜 저러냐?”

 

이런, 자기라는 말은 현수 군대 제대 선물로 바꿔 부른 호칭이었지. 여기서는 나랑 너라는 호칭을 썼는데. 아우, 재수학원에서 자기가 뭐냐고.

 

나영의 얼굴은 빨개졌지만, 현수는 다른 아이들 반응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맞지? 지금 이거, 그 날이지?”

 

현수가 나영에게 물었다.

 

맞는 거 같은데, 꿈에서는, 자기, 돌아왔네?”

 

나영이 대답했다.

 

꿈인 거 맞지? 근데 무슨 꿈이 이러게 생생하냐?”

 

그러게. 나 진짜 화났었나보다. 자기 돌아오는 꿈도 다 꾸고. 재밌네. , 돌아왔으면 앉아서 수업 받을 준비나 해. 명호가 황당하겠다. 오늘은 학원 안 나오고 돌아갈 거라고 했을 텐데.”

 

나영은 현수의 책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꿈인데 무슨 공부를 해. 나가자.”

, 그럴까? 잠깐만 이 편지 좀 읽고.”

됐어. 무슨 편지를 읽어.”

, 자기 흑역사지?”

흑역사는 무슨.”

 

현수는 나영이 들고 있는 편지를 잡아채더니 나영의 손을 잡았다.

 

가자. , 참 꿈인데, 한 번 뽀뽀나 할까?”

뭐래? 꿈이래도 애들 다 보는데.”

 

현수의 말에 나영이 아이들을 흘긋 쳐다보면서 입을 삐죽였지만, 현수는 과감하게 나영의 허리를 잡더니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빈정대고 종이가 날아오는 순간, 현수는 손을 들어 아이들을 향해 V자를 그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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