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날이었다.

워크맨 커버 안에 곱게 적힌 종이.

익숙한 학원 교실.

옆에 앉은 진아.

그 날이 틀림없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물론 꿈을 꾸는 거겠지. 이 뒤에 벌어질 일을 정확하게 알아.

 

나는 이 쪽지를 열어 읽어볼 테고, 쪽지에 적힌 우라질 내용을 읽고 놀라고 당황하면서 울고 이 교실을 황급히 나가겠지.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밖을 보면서, 머리를 자르고 학원은 그만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집에 가서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괜히 서러워 집안에서 들려오는 재롱이 소리에 재롱아, 언니가 곧 들어갈게, 들어갈게, 라는 소리만 하다가, 문득, 쓰잘데기 없는 편지만 사실은 거의 소설에 가까운 넋두리였지만- 주구장창 쓰다가 점심시간 무렵에 아빠 회사로 가서 열쇠를 받아오고 집으로 들어가 재롱이를 한참을 안고 울다가 한참 잠을 자겠지. 내일부터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그 망할 전화가 오겠지. 우리 진짜 헤어진 거냐는 말을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네가 아니, 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는 거야. 그날 오후, 신도림에서 부랴부랴 만난 우리는 그 즐겁고 행복하고 우울하고 화났던 모든 순간을 다 이기고 두 아이의 엄마, 아빠로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들으면서 25년을 함께 하겠지. 내가 가진 이 세상 최고의 위안은 바로 당신임을 절절하게 느끼면서, 나는 아이 때문에 시어머니 때문에 친정 부모님 때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를, 당신을 보면서 그렇게 삭히면서 살아가겠지.

 

그럼 이제 이 편지를 열어봐야 하나. 너 우는 거 싫어서, 이만 끝내자는 말이 분명히 적혀 있을 텐데, 이 편지를 보고 또 울어야 하나? 이건 꿈인데? 그나저나,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이 편지를 주고 간 거였어? 우와, 그거 때문에 25년을 괴롭혔지만, 새삼 열 받네. 이 많은 아이들이 내가 울고 나가는 걸 본 거 아니야. 아씨, 쪽팔려. 그래놓고는 다음 날 웃으면서 같이 들어왔어. 어린 건지 미친 건지. 그때는 이렇게 쪽팔린 일인지 몰랐는데.

 

, 그래도 지금은 울지 않겠지. 이 편지, 그때는 내일 저녁에 노량진역에서 태워버렸지. 불나면 어떻게 하려고, 진짜 둘 다 생각이 없다. 라이터 불로 칙, 종이에 불을 붙여서 없애 버렸는데.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그럴 듯하게 괴롭혀 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25년 내내 이 편지에 어떤 글이 적혀 있었는지 궁금했었어. 이틀 동안 여러 번 읽어 봤는데, 기억나는 건 너 울게 하기 싫어서 헤어지자뿐이니까. 한 페이지 가득 뭐라고 적어 놓았던 거 같은데. 어디, 한 번 읽어볼까. 지금쯤 그 녀석은 학원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겠네. 그래, 가라. 가서 못 마시는 술이나 실컷 마셔라. 같이 있는 친구는 2년 뒤에 죽을 텐데, 꼭 말려야 해. 대학 가면 MT 가지 말라고.

 

편지를 펼치려다 말고 나영이는 흠칫 놀랐다. 지금쯤 학원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어야 할 현수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 되어 있는 얼굴이 계단을 뛰어 올라온 게 분명했다.

 

편지, 그거 맞지?”

 

현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야? 왜 돌아와? 명호랑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자기, 소주랑 과자 사가지고 명호네 가야지.”

 

나영의 목소리가 컸는지,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자기란다.”

 

들었냐? 자기래. 재들 왜 저러냐?”

 

이런, 자기라는 말은 현수 군대 제대 선물로 바꿔 부른 호칭이었지. 여기서는 나랑 너라는 호칭을 썼는데. 아우, 재수학원에서 자기가 뭐냐고.

 

나영의 얼굴은 빨개졌지만, 현수는 다른 아이들 반응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맞지? 지금 이거, 그 날이지?”

 

현수가 나영에게 물었다.

 

맞는 거 같은데, 꿈에서는, 자기, 돌아왔네?”

 

나영이 대답했다.

 

꿈인 거 맞지? 근데 무슨 꿈이 이러게 생생하냐?”

 

그러게. 나 진짜 화났었나보다. 자기 돌아오는 꿈도 다 꾸고. 재밌네. , 돌아왔으면 앉아서 수업 받을 준비나 해. 명호가 황당하겠다. 오늘은 학원 안 나오고 돌아갈 거라고 했을 텐데.”

 

나영은 현수의 책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꿈인데 무슨 공부를 해. 나가자.”

, 그럴까? 잠깐만 이 편지 좀 읽고.”

됐어. 무슨 편지를 읽어.”

, 자기 흑역사지?”

흑역사는 무슨.”

 

현수는 나영이 들고 있는 편지를 잡아채더니 나영의 손을 잡았다.

 

가자. , 참 꿈인데, 한 번 뽀뽀나 할까?”

뭐래? 꿈이래도 애들 다 보는데.”

 

현수의 말에 나영이 아이들을 흘긋 쳐다보면서 입을 삐죽였지만, 현수는 과감하게 나영의 허리를 잡더니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빈정대고 종이가 날아오는 순간, 현수는 손을 들어 아이들을 향해 V자를 그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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