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꿈, 너무 긴 거 같아. 그리고 지나치게 평범하지 않아? 지루해 죽겠어.”

 

노란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나영이 말했다.

 

우리, 가난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돈이 없었나? 꿈이니까 주머니에 몇 십만 원 정도는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근사한 데 가서 잠도 자고. 꿈인데도 시간 되면 졸려. 잠은 자야 하니까, 계속 집에 가야 하잖아. 어제는 엄마한테 맞기까지 했다.”

 

현수가 투덜거렸다.

 

, 이 나이에도 어머니한테 맞는 거야? 하긴 나도 아빠한테 혼났어. 우리 아빠나 자기 어머니나 진짜 무서워. 어머, 이 나이에, 꿈에서도 어머니래. 암튼, 다시, 어머니 아니고, 너희 엄마, 대개 무섭잖아. , 나도 나희랑 어제 대판 싸웠어. 걔는 꿈인데도 여전히 내 옷, 맘대로 입고 가서 늘려 놓는다. , 그거 평생 대개 억울했나봐.”

 

나영이 웃으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근데, 우리 너무 오래 안 하지 않았나? 어차피 꿈인데, 아무 데서나 진하게 한 번 할까?”

 

스무 살 현수가 마흔 살의 현수 같은 표정으로 나영을 보면서 씩 웃었다.

 

뭐래니? 우리 지금 재수생이야.”

 

꿈을 꾸는 마흔 살 나영이 스무 살 나영처럼 얼굴이 벌게지면서 현수를 살며시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잠들기 전에(그러니까 현실에서) 너무 피곤하다고 자기를 밀어내는 나영에게 현수는 이번 주 들어 세 번째로 저 말을 했다. 저녁이면 녹초가 되어 잠들기 바쁜 나영과 달리 아직도(그러니까 역시 현실에서) 체력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현수는 우리 너무 오래 하지 않았잖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피곤해. 나한테 이러지 마.’라는 나영의 말에 늘 그럼 누구한테 그래?’라며 서운해 하는 마흔 살 남편.

 

나영은 라면을 집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현수를 쳐다봤다. 지금 나영이 앞에 앉아 있는 현수는 정말로 스무 살 현수였다. 결혼 전과 후에 몸무게 변화가 2, 3킬로그램도 안 되는 현수였지만, 스무 살 현수는 정말로 마흔 살 현수와는 달랐다. 남편은 나이를 전혀 안 먹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남자도 완전히 늙었던 거다.

 

맞다! 자기야, 혹시 거울 없어?”

 

나영이 급하게 말했다.

 

내가 뭐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

 

현수가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먹던 라면을 후루룩, 마저 먹었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맞다. 남편은 뭐든지 아주 급하게 먹는 사람이었지. 지금은 많이 느긋해져서 저렇게 안 먹는데. 후훗, 기억이 새롭네. , 잠깐만? 저 사람 지금 스무 살이지?

 

나영은 갑자기 지금 앞에 있는 현수의 나이를 생각했다. 지금 현수가 스무 살 현수라면 나영도 스무 살이어야 했다. 스물두 살 때 화장독이 올라 완전히 곰보 피부가 되어 버린 나영이 아니라 아직은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나영이어야 했다. 둘째를 낳고 10킬로그램이나 불어버린 나영이 아니라 똥배는 있을지언정 그래도 44사이즈와 55사이즈 중간에 간신히 몸매를 걸치고 있던 나영이어야 했다.

 

꿈속에서 나영은 밤이면 집에 돌아갔지만 꿈인데도 피곤해서 잠이 들고, 동생들과 실랑이하느라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꿈에서까지 거울을 보면서 한숨 쉴 이유는 없으니까. 스무 살 나영이라면 눈 밑에 기미도 없고 자글자글한 이마 주름도 없고 가슴보다 훨씬 튀어나온 뱃살도 우람한 팔뚝도 없겠지?

 

사실 스무 살 때도 거울 보는 게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마흔 살 아줌마가 되면 거울 보면서 나도 한 때는 이라는 탄식을 하게 마련인데, 그 한 때를 왜 꿈속에서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자각하고 확인해 보지 않았던 걸까?

 

나영은 초조하게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꿈이라고는 해도 왠지 민망한 학원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전철역에서 거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꿈이라고는 해도 마흔 살 나를 알고 있으니, 예뻐 보일까?

 

우리, 이런 얼굴과 몸으로 사랑을 했던 거구나. 나영은 정신없이 라면을 먹는 현수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자기 라면을 다 먹은 현수는 다 먹은 거야?”라며, 미처 나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나영의 라면 그릇을 자기 앞으로 가져가더니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스무 살의 나영은 항상 밥을 반쯤 남겼고, 스무 살의 현수는 늘 나영이 남긴 밥을 먹었다. 사귄 지 1년쯤 지났을 때 현수는 나영이 때문에 자기가 살찐다고 웃었는데. 마흔 살 나영은 이제 두 그릇도 거뜬히 먹어치우는 아줌마가 되었다꿈속에서 현수는 아직도 나영의 밥을 먹는구나. 꿈속에서 나영은 자기 밥쯤은 스스로 야무지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영은 현수가 가지고 간 라면 그릇을 살그머니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 아직 다 안 먹었어.”

 

마흔 살 나영은 , 하고 웃으면서 젓가락을 라면 그릇에 푹 꽂았다. 마흔 살 현수는 그래, 그래, 하고 웃더니 아줌마, 공깃밥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다.

 

라면 먹고 공깃밥 시켜 먹는 꿈이라니, 진짜 재미없다.”

 

마흔 살 나영이 말했고,

 

그게 인생이다.”

 

스무 살 현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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