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 명화로 보는 시리즈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이선종 엮음 / 미래타임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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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그림을 더하면 상상력은 줄어들까 늘어날까? 내가 읽고 있는 장면이 이런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내 상상과는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까? 분명히 그림과 함께 보는 글은 상상력에 제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은 그동안 문장을 읽는데만 급급해서 장면을 고민하고  떠올려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던 나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됐다.

사실 단테의 <신곡>은 한 장면 한 장면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때문에 5학년 때 쯤 처음으로 <신곡>에 도전했을 때는 ‘지옥편’을 조금 읽다가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글을 보고 어떤 장면을 상상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책을 읽기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을 다 큰 어른들이 느낄 리는 없지만 그 느낌은 분명히 수많은 예술가들을 자극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신곡>에 나오는 장면을 자기 예술의 모티브로 삼아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들을 많이 모아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을 만들어냈다.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도 시중에 나온 많은 <신곡>처럼 운문이 아니라 산문 형식으로 편역을 했다. 따라서 편역자의 글쓰기 능력이 독서에 상당히 중요한데 편역자 이선종 선생은 단테의 <신곡>을 편하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게 잘  써 주셨다. 아마도 <명화를 보는 단테의 신곡>은 계속해서 책상과 가까운 곳에 두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 펼쳐 읽고 보고 할 것 같다. 물론 저녁에는 못 볼 것 같다. 능력 있는 많은 화가들 때문에 펼쳐볼 때마다 무섭고 섬뜩한 장면이 여럿 있으니까.

<신곡>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는 지옥이나 천국보다는 연옥이 좋다. 연옥은 사실 어째서 선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라는 의문을 풀어주고 나름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고 12세기에 창조한 개념이라고 한다. 가톨릭은 그 개념을 받아들여 13세기에 널리 유통시켰으나, 사실 14세기에 단테가 <신곡>을 쓰지 않았다면 그대로 사장되었을 수도 있는 개념. 아직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은 개념이다. 하지만 나는 선한 자들이라면 종교에 상관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관용이 나타나 있는 연옥이라는 개념이, 결국 인간의 발전을 인정하고 있는 연옥이라는 개념이 좋다. 어두운 길과 밝은 길이 아니라 점점 더 밝아지고 있는 길이 좋다고 해야 하나.


소설을 소설로만 보면 좋겠지만,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을 읽는 내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까, 운문으로도 읽어봐야 할까,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림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오랫동안 글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책, <명화로 보는 ~> 시리즈를 쭉 구입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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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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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책상에서 베고 잘 수는 있을 정도로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두꺼운 책이 가성비도 뛰어날 때가 많다)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한다. 순간의 강렬함과 사건의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데, 잘 쓰인 단편 소설이 주는 쾌감은 엄청난 길이의 글을 끝냈다는 이유로 느끼는 장편 소설의 뿌듯함과는 정말 비교할 수 없다.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도 잘 쓰인 단편 소설들이 줄줄이 나를 감동시킨다. 사실 나는 1930년대 단편소설을 좋아한다. 한 편의 서정시 같은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인데, 커트 보니것의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1950년대와 1960년에 쓴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2차 세계 대전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고 이제 막 경제가 회복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걸까? 왠지 작품 작품마다 나는 조금 쓸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타임>은 “보니것은 조지 오웰과 공포 영화의 주인공 칼리가리 박사, 그리고 SF 만화 주인공 플래시 고든을 한데 섞어 놓은 작가”라고 했다. 칼리가리 박사는 1919년에 독일에서 찍은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 나오는 미치광이이고 플래시 고든은 1974년도 영화 ‘플래시 고든’의 주인공이다. 이 두 인물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보니것은 <타임> 설명대로라면 “엉뚱하지만 도덕적인 미치광이 과학자”이다.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나오는 단편소설들도 딱 그 설명이 어울린다. 엉뚱하지만 도덕적이고 미치광이이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25편이나 들어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커트 보니것이 쓴 소설들이다. 이 문장 하나면 서평이 마무리되는 것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커트 보니것이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인공 구름을 만들던 과학자의 동생으로 더 친숙하지만 세상은 소설가 동생을 더 알아주고, 그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읽어보기를. 단편소설은 그 짧음 덕에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서 읽을 수 있는 여유까지 누릴 수 있으니 하루에 20분의 여유를 가지고 한 편씩 읽어나가보자. 거의 한 달이 행복할 것이다.


PS. 개인적으로 나는 ‘포스터의 포트폴리오’와 ‘영원으로의 긴 산책’,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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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서툴다 -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주는 세계 최고 지성들의 명 에세이 컬렉션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외 지음, 이문필 엮음 / 베이직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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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로, 저자별로 적게는 한 편, 많게는 일곱 편의 짧은 글을 실었다. 가장 많은 글을 실은 작가는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이름만 많이 들어보았지 짧은 인용구 외에 실제 에세이를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칸토어가 셰익스피어는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라고 말했는지 알 것만 같은 글들. 재치있고 깊이 있는 글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역시 이 사람, 했던 사람은 몽테뉴.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서재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읽고 또 읽어나가는 이유가 있다.

체호프와 트웨인의 글은 평범했다. 이 작가들의 다른 글을 몰랐다면 에게, 하고 내 머리에서 지워버렸을 것 같지만, 이들이 어떤 글을 쓰는지 알고 있으니 두 작가는 다른 책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는 오리스 마든과 라빈드라나트. 이 작가들의 정보는 책 날개에 들어 있지 않아 책 뒷날개에 적힌 대로 QR 코드를 확인해 보아야 했다.

작가를 편가르거나 좋고 싫음으로 편을 가르고 싶지는 않지만 <모든 삶은 서툴다>를 읽는 동안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작가들은 생겼다. 시로만 알고 있는 브레히트가 그렇다. 거의 20년 이상 뇌리에서 잊혔던 작가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됐다. <예언자>의 칼린 지브란. 사실 몇 달 전 독서에서도 지브란 생각은 났지만 아직까지 미뤄두고 있었다. 이제는 드디어 읽어 봐야지. 동양 작가는 세 명, 지브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뿐이라는 사실은 조금 아쉽다.

발췌 번역들이라, 이 글들의 원문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는 모르지만 발음하는 법을 배워서 푸시킨의 글을 에밀 졸라의 글을, 릴케의 글을 낭독해 보는 건 어떨까? 분명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까? 모르겠다,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서 아이들도 읽어보라고 책장에서 보이는 곳에 꽂아 두었다. 책을 많이 읽은 어른들보다는 이제 새로운 책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에게 좀 더 어울리는 책이기는 하지만 햇살 밝은 날 슬쩍 꺼내서 읽으면서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가들을 떠올려 보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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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미래,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 지음, 이억주.박태선 옮김 / 동아엠앤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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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생각하면서 머리가 어지럽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파인만은 이 세상에 (아마도 제대로라는 말을 붙여야겠지만)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 양자역학에 확률을, 그것도 기존 확률이 아니라 (그렇다고 새로운 확률도 아닌) 낯선 베이지언 확률을 가져다 붙였다. 확률이라면 내가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확률이 0에 가까우니 당연히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할 확률 거의 100%와 결합해 참으로 이상하고도 요상한 독서를 했다. 그렇다고 책이 아주 어려우냐, 그렇지도 않다. 확률로 설명하는 대략 30%쯤만 빼면 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간혹 모레라거나 실재와 실제를 혼동하는 자판 입력의 문제가 있고 아주 약간 영어 어순은 이대로인 거 같은데 한글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번역 상태나 저자의 글쓰기 실력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리고 새로운 물리라니.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이나 관점을 접하면 ‘아,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만 물리학에서는 완벽하게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무언가 내 머리를 퉁 치는 자극이 있을 때는 ‘어, 오, 우와, 완전 멋짐!’이라는 기분이 든다.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도 역시 그런 책. 하지만 표지와 앞날개에서 내세운 그 누구도 실체도 모르고 사실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는 4차 산업혁명하고는 그다지 관계는 없어 보인다. 큐비즘은 그냥 큐비즘으로 끝이 나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는 사실 아직 태어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으니 고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색한 고전 양자역학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설명이 참으로 친절하다. ‘양자’라는 개념 자체는 다른 곳에서 참고하거나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그래서 네이버를 찾아봤다.


양자란 이런 녀석이다.

“고전역학에서 물리량은 연속적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나 전기량 등은 전기소량(素量) e의 정수배로 되어 있다. 이 e와 같이 어떤 종류의 양이 모두 그 정수배로 되어 있을 경우, 이것을 일반적으로 양자라 한다. 방사에너지에 관해서는 1900년 M. Planck가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제창하고 양자가설(量子假說)을 제기하면서 이 최소량을 에너지양자라고 불렀다. 작용량의 최소단위로서 작용양자(作用量子)가 고려된 후부터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양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자 [quantum, 量子] (원자력용어사전, 2011.,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63851&cid=42434&categoryId=42434)


이때 소량은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종류(種類)의 양의 최소(最小) 단위(單位)”라고 한다. 역시 네이버 사전이다. 그러니까 합쳐보면 양자란, 비연속적인 정수배로 나타나는 단위 물리량이라고 하면 될까? 으악, 문과적 머리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자라는 개념만 살짝 피해가면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에서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왜 그렇게 되는가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입장/파동 이중설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이중슬릿 실험도 모두 그러한 것이 있다더라, 그러니 내 상식으로 채택하겠노라, 하는 입장을 충분히 견지할 수 있다.


하지만 확률은 이야기가 다르다. 빈도확률이건 베이지언 확률이건(왜 베이즈 확률이라고 하지 않는 걸까?) 확률은 다시 두 눈을 부릅뜨고 여러 번 읽어봐야 한다. 빨리 그런 시간이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1차 독서에서는 실패했다. 그러니가 16장부터 19장까지는 좀 더 고민하면서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해야 할 숙제가 생겼다는 걸 기뻐하기를!(나한테 하는 말이다.)

그래도 큐비즘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마음에 든다. 어떤 행위자가 개인의 경험 내용에 대한 신뢰도를 조직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의 전부라니.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보편을 찾으려고 노력하려는 시도라니. 말들이 참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173쪽에 “큐비즘은 사물들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기에 자연의 법칙이 발명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문장에서는 멋진 책을 읽는다는 독자로서의 희열도 느껴졌다. 이제 큐비즘은 처음 알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분명히 계속해서 알아나가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행복하다. 기쁘다. 독서는 이런 맛에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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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나이를 찾아서 색깔 있는 과학 시리즈 1
김경렬 지음 / GIST PRESS(광주과학기술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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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보았을 때 출판사가 광주과학기술원이라고 써 있는데,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디자인이나 포맷을 디스하는 게 아니다. 사실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적절하고 어울리네, 라고 생각했다. 내용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문장도 깔끔해서 입자물리학, 방사능물리학, 운석학, 지리학, 화석학, 기타 지질학의 기본을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단 하나 읽는 내내 불만이었다면 ‘~의’라는 표현이 남발되고 있다는 거? 한국어의 ‘~의’는 소유의 형태로만 사용해 주면 좋을 텐데. 책에서 ~의를 한 80퍼센트만 덜어내면 더욱 깔끔하고 멋진 문장들이 남을 것 같다. 물론 과학책을 읽고 소감을 쓰면서 어떤 근거 자료도 제시하지 못한 채 단호하게 80퍼센트라고 쓰고 있는 것은 반성한다).


지구의 나이를 찾아서라는 제목을 보면 지질학을 다룬 책이 아닐까 싶었지만 실제로 저자가 다룬 분야는 신학부터 지질학까지 다양하다. 등장하는 인물도 캘빈경부터 라부아지에까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과학자부터 니어 같은 조금은 생소한 이름까지 다양하다. 스테노와 누중의 원리, 허턴의 동일과정의 법칙 같이 일반인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여러 법칙들도 깔끔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며 다양하게 실은 실존 인물의 신화들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초반에 아무 생각 없이 형광펜으로 쭉쭉 줄을 치면서 읽었는데 3분의 1쯤 읽다가 후회했다. 이런, 깨끗하게 보고 아이들이 읽어보게 했어야 하는데. 분명히 엄마가 낙서를 해놓았다고 투덜대거나 책을 손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읽어보라고 설득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 구입을 해야겠다. 문득 여행을 간다면 진주운석이나 두원운석을 보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두원운석을 한국으로 반환할 수 있게 해 준 서울대 이민성 교수와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며 문득 숙연해졌다. 자기들이 훔쳐간 남의 나라 물건을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려준 일본이나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나라들은 참으로 황당하구나 싶다가도 이 나라가 광포한 시대에 힘이 있었다면 우리라고 달랐으랴 싶으니 그쯤에서 분개는 멈추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일단은 45억년이라고 합의를 본 지구의 나이, 그리고 태양계의 나이. 과학은 반증가능한 사실만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친다고 했던가. 45억년인 것이 아닌 것을 반증할 수 있다면 지구 나이 45억년이라는 서술은 과학적 서술이 된다. 그 서술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래도 반증 가능한 서술을 해주었기에 과학이 아니라고는 말하기 힘든(그러니까 과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간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은데) 어셔 주교와 안티오크의 주교 테오필루스에게도 조금만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하지만 기원전 4004년이나 기원전 5529년에 태어난 지구는 별로 재미는 없다. 분명히! (과학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는 반론도 기꺼이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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