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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에 어서 오세요 - 소설
타키모토 타츠히코 지음, 아베 요시토시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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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는 광고 문구 한마디에 덥석 사버린 물건이다. NHK는 우리가 잘 아는 그 방송국이 아니라 일본 히키코모리주1) 협회(Nihon Hikikomori Kyokai)의 줄임말이다. 주인공이 자신이 히키코모리임을 타인 탓으로 돌리기 위해 멋대로 정한 가상의 단체이다. 당연히 실제로 그런 단체가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 꽤 인기가 있었는지 출판 만화와 TV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코믹한 요소가 강한 만화판에 비해 소설은 꽤나 심각하다. 웃기긴 하다. 하지만 그 개그 뒤에 숨은 현실은 우울하다. 주인공들이 약을 먹고 기괴한 짓을 할수록, 환각에 빠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면 할수록, 익살스럽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묘한 비참함이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주인공인 사토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4년 동안 방속에 틀어박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불확실한 미래와 싸우지 못하고 3평짜리 조그마한 방으로 도피한 사람이다. 수면은 하루 16시간이고 외출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근처 편의점에서 식료품과 담배를 사러갈 때뿐이다. 히키코모리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거리에만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견딜 수 없다. 결국 제자리다.  

 

 주인공 옆방에는 고등학교 후배가 살고 있다. 그 녀석은 중학교 때 왕따를 당했었고, 여자들에게 수없이 차인 게 상처가 된 나머지 현실세계 여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 못 박는다. 그는 에로 게임 마니아다. 그것도 초등학생 여아(女兒)를 다룬 물건들을 좋아한다. 현실과는 달리 2차원 여자들은 절대 순종하며 배신하지 않는다. 언젠가 세계를 휘어잡을 에로 게임을 만들 꿈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다.  

사토에게 히키코모리를 탈출시켜 주겠다고 다가오는 의문의 소녀가 있었다. 여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사키다. 예쁘고 활발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어딘가 작위적이다. 크게 특별히 하는 건 없으면서 사토를 자꾸 불러내 히키코모리 탈출 특별 수업을 한다. 사실 그녀는 부모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한 자식이었다. 현재 신세지고 있는 집은 독실한 종교주2)집안인데 그것역시 그녀를 구원하진 못한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말이야, 만약 정말로 있다면, 사실은 굉장한 악당이야.(중략) 인간의 일생이란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의 비율이 분명히 9대 1정도입니다.(중략) 그러니까 말이죠, 일부러 이런 괴로운 세상을 만든 하나님은 굉장히 심술궂은 녀석입니다.(중략) 그런 악한 하나님이 있다면, 반대로 우리는 기운차게 살아갈 수 있어. 하나님에게 불행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면, 반대로 그만큼 우리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잖아?” (226쪽~227쪽) - 미사키  


미사키가 사토에게 접근한 건 사토가 자기보다 훨씬 비참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훨씬 비참한 사람을 가르치며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한다. 하지만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다가 결국엔 1년 동안 모은 수면제를 한꺼번에 삼킨다.   

 

이 세 인물들은 모두 현실에서 소외 받고 상처 입은 자를 대변한다. 험난한 현실을 정직하게 맞서지 못하고 도피하며 핑계를 댄다.     

 

“젊고 멋진 두 배우가 청춘이나 연애 같은 것을 의논하면서 비에 젖은 공원 같은 데서 치고 박고하는 드라마. ‘너는 진짜 사랑을 몰라!’ ‘뭐야, 나는 히토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 ‘퍽!’ ‘빡-!’하는 느낌의…. (중략) 저는 말이죠, 그런 느낌의 드라마를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는 진실이 있으니까요. 기승전결이 있고, 감정의 폭발이 있고, 결론이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한편으로 우리들의 생활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어렴풋하고 희미한 불안에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알기 쉬운 드라마라든가, 알기 쉬운 사건이라든가, 알기 쉬운 대결이라든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건 말이죠, 조금 부조리하지 않아요?”(185쪽) - 야마자키  

 

세상은 드라마처럼 간단하지 않다. 스캇 펙이 그랬던가? 인생은 복잡하다고. 결국 그들은 세상을 탓한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NHK의 음모라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NHK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요원들을 곳곳에 배치하며 히키코모리를 양산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 소설을 놓고 평이 약간은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긍정적이라고 보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말도 있고, 주인공들의 행동과 사고가 전혀 공감이 안 간다는 말도 있었다. 나?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지 공감되었다. 히키코모리였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우울증 경력이 있는지라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재작년에 연애에 실패하고, 교환학생 지원에 실패했다. 일단 그것까지는 견딜만 했지만, 내 자신의 한계 때문에 거의 다 된 일을 코앞에서 놓쳐버리는 일이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 사건은 가끔씩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데, 눈앞에서 내가 목표로 하던 일이 내가 가진 결점 때문에 무너져 버린 사건은 모든 일에서 자신감을 앗아가 버렸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내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노력한다 해서 될 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하나님의 기대를 배신했다.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 졸업하면 뭐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생각의 연쇄는 내가 살아갈 이유가 뭔지를 질문하게 했고, 우울증을 낳았다. 지금은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 더 이상 자살 생각은 나지 않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나마 ‘난 이 정도는 아니었어’ 정도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는 있었다고나 할까?  

 

 소설은 분명하게 이 시대 일부 젊은이들의 삶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은 개인주의가 원래 강한 나라인데다 장기적인 경제 불안이 아마도 저런 사람들을 낳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길을 잃은 젊은이들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하나? 안 그래도 지금 한국 20대는 욕을 진창 얻어먹고 있는데 말이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지는 말자.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눈 부릅뜨고 살아내자. 그렇게 말하고 싶다.  

 

 덧) 일본에는 이외에도 오타쿠, 니트족(취업할 생각을 아예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프리터족(취업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들이 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일본이 이런 사회 문제(사실 오타쿠는 좀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를 상업적으로 잘 이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히키코모리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과 만화로도 제작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오타쿠는 굳이 <현시연>이나 <전차남>의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재가 되었다. <N.H.K.에 어서오세요>도 작가자신이 히키코모리 출신이다. 사람에 따라 어느 정도 호불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는 PC방 폐인을 다룬 어떠한 소설이나 영화도 나와 있지 않음을 염두에 두면 참 신기하기도하다. 이런 작품들이 마냥 흥밋거리로 전락하지 않고 일반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히키코모리를 무슨 잠재적 살인마 정도로 생각하는 <외톨이>같은 영화는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주1) 히키코모리는 우리나라에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슨 병명(病名)같은 이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틀어박히다’라는 뜻인 ‘히키코모루(引き籠もる)’를 명사화하면 히키코모리가 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틀어박힘이’정도 되겠다. <N.H.K.에 어서오세요>의 만화판 번역에서는 ‘방구석폐인’이라 했다는 데 이것도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따라서 본 포스트에서는 그냥 히키코모리라고 하겠다.

주2) 작품 속엔 종교 이야기도 나온다. 주인공인 사토와 미사키가 만나게 된 계기도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종교 단체이고, 결국 사토가 그 교회에까지 찾아가는 것까지 나오니 이 소설은 종교와도 상당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 종교는 (추정컨대)여호와의 증인이다. 두 사람씩 짝지어 잡지 두 권을 쥐어주며 전도하는 것 하며(원래는 ‘깨어라!’인데 여기서는 ‘눈을 떠라!’로 나온다), 요한계시록을 푸는 모습이나, 교회건물이름이 ‘제국회관’인 것(이것도 원래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을 바꾼 것 같다)이 그 증거다. 사토와 야마자키가 미사키의 정체를 알기위해 잠입한 교회의 모습은 사실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리얼한 부분이다. 내 생각에는 작가가 직접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를 찾아오는 신자 아닌 많은 일반인들도 비슷할 것 같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보통 현대식 건물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과도하리만큼 살갑게 대하는 신도들. 야마자키는 아무 것도 아닌 자기들에게 이렇게까지 대하는 신도들에게 감동까지 받는다. 하지만 교회의 닫힌 언어는 역시 그들에겐 생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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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1
타니가와 나가루 지음, 이덕주 옮김, 이토 노이지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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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이제야 접했다. 그 유명한 ‘하루히 댄스’가 판을 휘어 잡고 있을 때도 ‘저게 뭐임?’하면서 그냥 지나쳤던 나다. 하지만 요즘 갑자기 라노베 바람이 불어 일단 유명세를 믿고 값을 치룬 책이 바로 이 작품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되겠다.  

일단 표지와 초기 몇 페이지를 읽을 때 느낌은 전형적인 학원코믹물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냥 스즈미야라는 좀 별난 캐릭터가 SOS라는 괴동아리를 만들어 우당당탕 재미있는 소동 속에서 고뇌하지만 어쩔 수 없이 휩쓸리는 주인공을 그린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이거 판타지다! 그것도 매우 참신한!  

일단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 특유의 위트가 살아있다. 스즈미야의 궤변에 마음 속으로만 반론을 펴는 그런 부분들 말이다. 작가가 글재주가 상당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개그물도 아니다. 스즈미야의 그런 행동에는 또 나름대로 과거가 있었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캐릭터의 매력을 아주 살짝 올려주는 그런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너무 과거를 까발리면 안 된다. 살짝 알려주고 독자의 상상에 어느 정도 맡기는 게 포인트다. 이 소설은 그런 부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때맞추어 이오공감에까지 하루히가 떴으니 그 유명하다는 애니메이션도 볼 마음이 생겼다. 정말 밥먹으며 책읽기 스킬을 몇년만에 사용한 건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빠져 읽었다. 2권은... 글쎄 아직 생각 중이다. 왜냐하면 좀 다양한 라노베를 읽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다 읽을 생각은 안나고 2권이나 3권까지는 혹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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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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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초장기 베스트셀러인 본 작을 이제야 접했다. 특별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굽시니스트님의 <본격 제2차세계대전 만화>에 나오는 히틀러가 이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필받아서 읽었다. 상당한 두께이지만 매끄러운 번역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소설을 그리 읽지 않았고 또 일어일문학과를 다니면서도 일본문학은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대중 소설을 제외한 순수문학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소설 중 <냉정과 열정사이>가 가장 많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둘 다 연애를 큰 축으로 하는 섬세한 감성소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잡지에서 일본소설을 놓고 여러 사람들이 대담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아무래도 일본 소설 중에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많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도 우울한 정서를 많이 느꼈다. 격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일상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모습을 세세히 묘사해 놓았다. 감정을 직접 묘사하기보다 생활 면면을 마치 스케치를 하듯 그려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묘사가 감성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더욱더 효과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성관계 묘사는 너무 사실적이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외설적이지는 않다. 주인공들의 심리가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본 작에서는 예전 우리 문학처럼 정치적 소재를 다루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간관계가 주가 된다. 그러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판 386이라 할 수 있는 전공투세대이다. 일본 근대에서 정치적격동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대학생이었으며 그건 이 작품의 배경이기도 하다. 작가 스스로 한국인을 위한 서문에서 ‘이 소설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에 등을 돌린,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8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작품 간간히 주인공인 ‘나’와 미도리를 통해서 당시 운동권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자기가 정의의 투사인양 동맹휴교니 투쟁이니 하며 떠들다가도 결국 4학년이 되면 졸업해야 하니 수업도 들어야 했고, 졸업하고 머리 짧게 깎고 대기업에 들어가 마르크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랑 결혼해서 사회 주류층이 되는 대학생들을 가짜들이라고 비난한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학생운동에 대해서 깊은 회의감을 표출한 것 같아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게 아닐까 싶은 부분도 많아 더욱 그렇다.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저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시킨 변화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8쪽)  

 

작품은 삼각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끊임없이 겹쳐지며 전개된다. 3류 드라마처럼 남자 하나 놓고 밀고 당기는 그런 건 아니다. 작가가 ‘연예 소설’이라 했지만 내겐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를 살아가던 젊은이들, 그 중 아주 약간은 유별나고 외로웠던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다. 읽고 있으면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왜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지. 자폐증, 우울증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유달리 일본 문화는 이런 경우가 많이 나온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진실로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인간 군상들을 모아놓은 듯하다. 우리나라도 점점 비슷한 분위기로 가고 있기에 지금까지 이 소설에 그리도 열광하는 것 같다.   

대학생, 학생운동, 연예, 삼각관계, 친구의 죽음을 회상하듯 그렸다. 어쩌면 이 모두가 하나의 추억이고 그 추억 역시 언젠가 빛바랜 사진처럼 변색되어 상실해버릴지 모른다. 이제 20대 중반을 넘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마지막 화자의 독백처럼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가? 과연 20년 후에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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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양장본) IVP 모던 클래식스 9
짐 월리스 지음, 정모세 옮김 / IVP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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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회심은 일생 중 한번은 겪어야 할 중대한 사건이다. 복음주의자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첫사랑 같은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든 아니든 아무튼 회심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대단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겪고 말하는 회심은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과 같은 것인가?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s, 청림출판)>로 미국에서 주목받은 짐 월리스는 회심한 복음주의자를 다시 회심의 자리로 부른다.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예수를 따르라는 요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회심은 같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회심을 강조하지만 그 목표를 잃어버린 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활동을 강조하지만 회심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자들로 갈라져 있다.’(41쪽) 짐 월리스는 보수교회와 진보교회가 잃어버린 반쪽을 하나로 엮는다. 십자가 부활의 회심을 말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고, 사회 정의를 위해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회 운동 한복판에서 있으면서도 기도와 예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예언자적 삶과 목회적 삶 사이의 일치와 통합을 말한다.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거창한 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닌 피상화 된 가난한 자들, 혹은 적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을 직접 느끼고 함께 하라고 권유한다. ‘함께 하라. 말하거나 가르치거나 심지어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듣는 자리에 그리고 변화될 자리에 놓아두라.’(93쪽) 참된 예언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214쪽). ‘예언자들은 거만하고, 교만하고, 비꼬고, 절망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그 백성을 향한 사랑과 소망에서 나온 말을 했다. 소망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182쪽)  

여러모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The Irresistible Revolution, 규장)>랑 비교될만한 책이었다. 두 책의 저자 모두 복음주의 교회에서 성장했고, 공동체를 만들어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리를 선포하는 점도 비슷한다. 단, <믿음을...>이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 쓴 책이라면 <회심>은 신학적인 책이다. 둘 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원래 사회참여와 회심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그리했고, (적어도 짐 월리스의 주장에 따르면)19세기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했고, 100여년 전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이 그러했다. 이게 새로운 사상인 마냥 책이 돼서 나오는 게 어쩌면 불행한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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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 톰 라이트의 기독교 제자도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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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라이트와의 첫 만남이다. 그는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역사학자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간간히 역사관련 이야기를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은 없다. 설교를 모은 책이기 때문에 전체가 유기적으로 세세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손가락은 모두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삶을 가리키고 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균형에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죄사함에 한정짓지 아니하고,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악을 다룬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곳을 나 개인의 차원을 넘어 세상 속의 불의에 맞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내용들을 통해 단순히 세상 종말이 아닌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지금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 뿐 아니라 우리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 개개인의 육체적 부활까지 나아간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대개 이런 식으로 책을 전개하면 개인 영성 부분은 소홀히 다루어 질 수 있는 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개인 영성과 사회 영성이 절묘하게 조화된다. 거창한 하나님의 위대함 이외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같은 개인 영성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는다.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살피고 우리에게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이르며 이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가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자유주의가 이성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놓칠 수 있는 부분(예를 들어 ‘기적’같은 것)에 천착하지 않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설교문을 모은 것이라 그런지 논의에 약간 깊이가 없는 점은 아쉽다. 아마 학자로서 글을 쓸 때에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이론들도 하나씩 다루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지옥’장에서 마가복음 13장에서 태양과 달이 어두워질 것이며 별이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직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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